욕망이 욕망을 욕망하는 구조

Killing Eve에 대한 기록

by Peppone


나는 이 드라마를 퀴어로 기억하지 않는다.

장르로도, 메시지로도.

Killing Eve에서 핵심은 정체성이 아니라 구조였다.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욕망을 대하는 욕망,

그리고 욕망이 스스로를 인식하며 다시 욕망하는 과정.


이 드라마가 기존 서사와 달랐던 이유는

관계의 위계를 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추적자와 도망자의 구도는 곧 무력화되고,

남는 것은

서로의 욕망을 알아보는 순간에 발생하는 긴장뿐이다.


Villanelle은 소비되지 않는 여성이다.

아름답지만 호감을 유도하지 않고,

매력적이지만 초대하지 않는다.


그 성질이 가장 명확하게 드러난 장면이

아이스크림 가게다.


아이스크림을 먹는 아이,

아이에게 친절한 남성 직원,

그리고 잠시 그 장면을 바라보는 Villanelle.

대사는 없고, 감정의 안내도 없다.

나가며 아이스크림을 엎는 동작은

잔혹해서가 아니라

아무 의미도 부여하지 않기 때문에 오래 남는다.


그 장면에서 나는

폭력보다 태도를 보았다.

죽이기 직전의 정적,

다음 행동으로 넘어가기 위한 상태.

그것은 무감각이나 냉소가 아니라

의미를 증식시키지 않는 집중에 가깝다.


그래서 그 행위는

이상하게도 타당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나 역시 그랬을 것 같다고 느꼈다.

행동이 아니라

상태에 대한 공감이었다.


Villanelle은 멈춰서 살 수 없는 인물이다.

일이 끝나면 집으로 돌아오고,

옷을 사고,

자기에게 호감을 보이는 남성과

스포츠처럼 섹스를 한다.

그 관계들에는 서사가 없고, 축적도 없다.

그녀는 사람을 소비하지 않는다.

소비하는 것은 상황이다.


이것은 방종이 아니다.

관계의 과잉 의미화를 거부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그녀는 아름답지만

사랑받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아이스크림 가게에서도,

침실에서도,

끝내 소비되지 않는다.


Eve가 Villanelle을 사랑하게 된 이유 역시

로맨스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것은 외로움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말할 대상이 없었던 외로움.


Villanelle은 설명 불가능한 존재였고,

Eve는 그 불가능성을

끝까지 보려고 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말하지 않아도,

자신을 축소하지 않아도 되는 시선.

그 하나로 욕망은 사랑으로 오인되고,

결국 사랑이 된다.


그래서 마지막의 선택은

처벌도, 사랑의 소멸도 아니다.

욕망의 회로를 스스로 끊어낸 존재가

이 서사 안에 더 머물 수 없다는 표시다.

그 장면에서 눈물이 난 이유는

슬퍼서가 아니라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Killing Eve가 웃긴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공포와 웃음은 섞인 것이 아니라

같은 뿌리에서 나온다.

규범이 어긋날 때 우리는 웃고,

동시에 불안해진다.

그래서 이 드라마의 웃음은

긴장을 풀지 않고

오히려 더 날카롭게 만든다.


요즘에는

이 드라마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조차

조심스러워진다.

작품을 어떻게 읽었는지는 사라지고,

좋아한다는 사실 자체가

윤리나 태도로 환산되는 공기 속에서.


그래서 기록으로 남긴다.

설명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의미를 과잉 부여하지 않기 위해.


나는 폭력의 미학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기억에 남은 것도

살해 장면이 아니라

아이스크림을 엎는 손짓이었다.


Killing Eve는

나에게 완벽한 드라마였다.

끝까지 욕망을 교정하지 않았고,

소비되지 않는 존재를

끝내 소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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