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은 오래 알아도 끝내 알 수가 없다. 시간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애초에 자기 중심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를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셈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얼굴과 존재를 아는 시간에 가까웠다. 동네에서 스쳐온 세월이 길었을 뿐, 서로의 삶을 깊이 이해하는 사이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는 가끔 가까운 사람처럼 말을 걸었고, 무엇인가를 추천하며 자기 취향을 내밀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더 분명하게 느꼈다. 아, 나는 이 사람을 정말 모르는구나.
그가 좋다고 말한 것들은 하나같이 내게 어떤 빈약함으로 남았다. 「먹는 존재」의 여성 캐릭터를 좋아한다고 말할 때조차, 그것은 인물에 대한 이해라기보다 자기 이상형을 투사하는 방식처럼 보였다. 살아 있는 한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취향에 맞는 몇 가지 인상만 골라 사랑이라고 부르는 태도에 가까웠다. 그래서 나는 자꾸만 멈칫했다. 저건 인물을 읽는 일이 아니라 기호를 소비하는 일 아닌가. 사랑을 말하는 듯하지만 실은 자기 욕망의 표면만 더듬는 일 아닌가.
「사랑의 이해」를 추천했을 때도 비슷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 책이 있다는 것도, 그 작가가 대체로 어떤 결의 소설을 쓰는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굳이 찾아 읽고 싶지는 않았다. 어떤 남성의 비겁함에 대해서라면, 나는 이미 충분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망설이는 척하며 책임을 피하고, 감정이 있는 척하며 끝내 자기보존 쪽으로 기우는 태도. 그런 것은 문학이 처음 가르쳐주는 진실이 아니었다. 오히려 삶이 먼저, 그리고 더 선명하게 보여준 종류의 것이었다. 그래서 내게 그 작품은 통찰의 예고가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장면의 반복처럼 느껴졌다.
그럼에도 그는 드라마까지 보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실제로 보았다. 그런데 끝내 알 수 없었다. 이 작품이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지. 모호한 작품과 텅 빈 작품은 다르다. 어떤 작품은 쉽게 단정할 수 없어도 끝내 붙드는 질문이 있는데, 그것은 관계의 비겁함을 끝까지 밀어붙이지도 못하고, 사랑의 잔혹함을 정면으로 해부하지도 못한 채 자꾸만 흐려졌다. 보고 난 뒤 내게 남은 것은 여운이 아니라 공허함이었다. 그리고 그 공허함은 작품 자체보다, 그 작품을 좋다고 내민 사람 쪽에서 더 크게 번져왔다.
어느 순간에는 이런 생각까지 들었다. 나를 바보라고 생각한 걸까. 물론 속마음까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나를 끝까지 정확히 대해야 할 사람으로 여기지는 않았던 것 같다. 대충 얼버무려도 되는 사람, 설명이 빈약해도 넘어갈 사람, 자기 모호함을 굳이 들키지 않아도 되는 사람처럼 대하는 기색. 사람을 가장 지치게 하는 것은 노골적인 멸시보다 이런 식의 성의 없는 취급일 때가 있다. 대놓고 깔보는 말보다, 끝까지 응답할 필요가 없는 존재처럼 다루는 태도가 더 깊게 사람을 모욕한다.
그래서였는지, 그 앞에만 서면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원래 말을 잘하는 사람이다. 말을 길게 끌고 갈 수도 있고, 웃기게도 할 수 있고, 날카롭게도 만들 수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앞에서는 맥이 먼저 빠졌다. 무슨 말을 해도 닿지 않을 것 같았고, 닿는다 해도 제대로 받아질 것 같지 않았다. 말은 결국 오가는 감각 위에서 살아나는 것인데, 그와 마주한 순간에는 그 바닥 자체가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침묵은 참는 것이 아니라 남는 것이었다. 나는 말을 아낀 것이 아니라, 말해봤자 소용없겠다는 예감 앞에서 조용해졌던 것이다.
지금 돌아보면 내가 피로했던 것은 작품들이 아니라 태도였다. 장면을 소비하고, 기호를 소비하고, 사랑조차 기호처럼 소비하는 태도. 나는 그런 식의 가벼움을 견디지 못했다. 오래 알고 지냈다는 사실은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았다. 시간은 흘렀지만 이해는 쌓이지 않았고, 친숙함 대신 오래된 위화감만 남았다. 그래서 생각나는 대목이 있을 때마다 뒤늦게 알게 된다. 아, 그래서 그랬지. 그 말은 지나간 관계의 해석이라기보다, 오래 남아 있던 옹이의 이름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