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복치 ― 사랑의 부검 기록 / 가여운 것들
내게 〈가여운 것들〉은 불편한 영화가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 기괴함과 노골적인 장면들 앞에서 거부감을 말했지만, 나는 거의 충격을 받지 않았다. 벨라는 여자 프랑켄슈타인이다. 죽음과 탄생, 실험과 창조, 육체와 정신이 뒤섞인 채 다시 만들어진 존재. 그 설정만으로도 이 영화가 무엇을 꺼내 보이려는지는 충분히 선명하다. 여성의 몸, 욕망, 해방, 남성의 시선,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길들여지는 감각. 이 영화는 그런 오래된 문제들을 낯설게 보이도록 다시 배열한다. 그런데 내게 그것들은 낯설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너무 잘 배열되어 있어서 감정적인 파열을 일으키지 못했다. 나는 살아 있는 상처를 본 것이 아니라, 오래 공들여 정렬된 기호들을 본 느낌이었다. 잘 만들어진 미장센, 전시된 문제의식, 정확하게 의도된 충격. 그런데 이상하게도 정확한 것은 언제나 나를 끝까지 데려가지는 못한다.
벨라라는 인물의 힘은 성장의 순서를 뒤집는 데 있다.
그녀는 세계의 규칙을 배우기 전에 자기 감각부터 밀어붙인다. 부끄러움을 학습하기 전에 욕망을 통과하고, 도덕을 내면화하기 전에 쾌락과 호기심을 먼저 겪는다. 보통의 서사가 여성을 길들이는 순서를 따라간다면, 〈가여운 것들〉은 그 순서를 거꾸로 놓는다. 그래서 벨라는 해방적으로 보인다. 남성들이 설명하고 규정하고 소유하려 들수록, 그는 더 낯설고 더 예측 불가능한 방식으로 세계를 건너간다. 내가 불편하지 않았던 이유도 거기에 있다. 벨라가 보여주는 것은 타락이 아니라, 이미 길들여진 인간들에게서 빠져버린 어떤 원초적 운동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이 영화는 지나치게 영리해진다.
벨라가 통과하는 세계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실험실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구부러진 건물들, 과장된 원근, 동화와 악몽을 섞어놓은 듯한 색감과 세트, 인공성을 숨기지 않는 화면.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벨라의 성장만이 아니라 그녀가 지나가는 세계 자체를 표본병 안에 넣어 보여준다. 모든 것이 의도되어 있고, 모든 장면이 스스로 우화임을 알고 있다. 그 점은 인상적이면서도 동시에 이 영화의 한계다. 너무 잘 알고 있는 영화, 너무 능숙하게 자기 주제를 수행하는 영화. 감탄할 수는 있어도 깊이 흔들리기는 어려운 완성도였다.
나는 문학적인 것을 더 좋아한다.
정합성보다 균열을, 메시지보다 잔여를, 설명보다 끝내 설명되지 않는 감각을. 그런데 〈가여운 것들〉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자기가 무엇을 말하는지, 무엇을 비틀고 있는지, 그것을 얼마나 아름답게 보여줄 수 있는지. 그래서 나는 감탄할 수는 있어도 깊이 흔들리지는 않았다. 불편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사랑할 수도 없었다. 내가 본 것은 잔혹함 자체가 아니라, 잔혹함을 배열하는 방식이었다. 살아 있는 문장이라기보다, 탁월하게 설계된 도해에 가까웠다.
그 영화를 함께 본 사람이 있었다.
나는 그 영화를 보자고 했고, 그는 따라왔다. 우리는 대화를 많이 나누던 사이였지만 그 대화들은 늘 헛돌았다. 말은 많았으나 핵심에는 닿지 못했고, 서로가 정말 같은 풍경을 보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어쩌면 그 영화를 하나의 시험처럼 골랐는지도 모른다. 직접 묻는 대신, 같은 장면 앞에 함께 서보는 일. 인간에 대한 감각, 폭력과 욕망을 읽는 방식, 전시된 잔혹함 앞에서 얼마나 멀리 들어갈 수 있는지. 그 정도는 비슷할 거라고, 적어도 그 정도의 인식은 공유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예상은 예상대로 끝났다.
나는 놀라지 않았고,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좋다거나 싫다거나, 불편하다거나 아니었다거나, 아무 문장도 끝내 오지 않았다. 그 침묵은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었다. 오래 헛돌아온 대화들이 마지막에 도착하는 방식이 원래 그런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끝내 닿지 못하는 것. 말은 있었지만 이해는 없었던 시간. 같은 영화를 보고 나와도 서로 전혀 다른 층위에 남겨지는 일.
그래서 내게 〈가여운 것들〉은 페미니즘 영화였느냐 아니냐보다, 이미 전시된 상처 앞에서조차 서로 다른 깊이로 멈추는 두 사람의 거리로 남아 있다. 나는 그 영화의 기괴함보다 그 뒤의 침묵을 더 오래 기억한다. 스크린 안에서는 한 존재가 자기 감각으로 세계를 뚫고 나가고 있었는데, 스크린 밖에서는 끝내 자기 감각을 문장으로 꺼내지 못하는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 간극이 내게는 영화보다 더 정확했다.
아마 사랑도 그랬을 것이다.
우리는 많은 말을 나누었지만, 정작 중요한 것 앞에서는 자주 헛돌았다. 서로를 통과하지 못한 대화들, 끝내 도착하지 못한 인식, 설명 대신 남아버린 침묵. 그러니까 이 영화의 기억은 영화의 기억이 아니라 하나의 부검 기록에 가깝다. 무엇이 죽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열어보는 기록. 내가 그날 확인한 것은 영화의 급진성이 아니었다. 같은 장면 앞에 앉아도 끝내 같은 깊이로 내려가지 못하는 두 사람의 구조였다. 사랑이 끝난 뒤에야 선명해지는 것은 늘 감정이 아니라 구조다. 그날도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