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봉인된 시간

우리가 처음 만났던 스물, 스물하나... 그 순간부터

by Peppone



부재조차 하나의 실재였음을, 나라는 사람이 증명한다


사랑은 없었다.


처음 나는 그렇게 썼다. 그 문장은 그때의 나에게 필요했다. 없었다고 말해야만 견딜 수 있는 시간이 있었고, 없었다고 단정해야만 무너지지 않고 통과할 수 있는 구간이 있었다. 사랑이라고 부르는 순간 너무 많은 것이 내 쪽으로 되돌아왔고, 그 이름을 받아들이는 순간 감당해야 할 붕괴가 지나치게 커졌다. 그래서 나는 부재라고 썼다. 없었다고 썼다. 그 말은 틀리지 않았다. 우리가 끝내 서로를 온전히 응시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같은 자리에 서 있다고 믿었던 시간마저 실은 어긋나 있었다는 점에서, 그것은 분명 부재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하나의 문장만으로는 다 담기지 않는 무엇이 남았다. 없었다면 왜 이토록 오래 남아 있었는지, 비어 있었다면 왜 이토록 무겁게 나를 변형해 놓았는지, 나는 그 물음 앞에서 오래 멈추어 있었다. 어떤 관계는 실체보다 잔해로 더 선명해진다. 함께 있었던 시간보다 끝난 뒤의 시간이 더 많은 것을 입증하기도 한다. 돌이켜보면 내가 오래 사로잡혀 있었던 것은 그 사람 자신이 아니라, 그 사람을 통과한 뒤 이전과 같지 않게 바뀌어 버린 나였는지도 모른다. 사랑이 남긴 것은 추억이 아니라 구조였다. 믿는 방식, 기다리는 방식, 침묵을 감내하는 방식, 상실을 내면에 가라앉히는 방식까지, 나의 내부는 서서히 재편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제 와 처음의 문장을 폐기할 생각은 없다. 사랑은 없었다. 그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다만 그 말이 전부는 아니었다는 사실을 덧붙여야 할 뿐이다. 없었던 것은 헛된 것이 아니었고, 비어 있던 것은 무효가 아니었다. 어떤 부재는 단순한 공백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한 사람의 시간 속에 달라붙어 감각을 바꾸고, 생의 결을 바꾸고, 이후의 존재 방식을 조용히 변조한다. 그 부재조차 하나의 실재였음을, 나라는 사람이 증명한다.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오래 남아 있다는 사실, 끝난 뒤에도 끝나지 못한 채 내적 리듬을 바꾸어 놓았다는 사실, 그것이 증거다.


나는 한때 사랑이 사람을 구원한다고 믿은 적이 있다. 적어도 잠시 동안은, 누군가의 존재가 나를 더 선명하게 만들고 더 나은 자리로 이끌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지나고 보니 사랑은 늘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람을 더 깊이 자기 내부로 밀어 넣고, 자신이 무엇 앞에서 붕괴하는지를 끝내 보게 만드는 경우가 더 많았다. 사랑이 끝난 뒤 남는 것은 상대에 대한 기억만이 아니었다. 내가 어디까지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인지, 무엇 앞에서 무너지는 사람인지, 어떤 침묵 앞에서 끝내 돌아서지 못하는 사람인지가 함께 남았다. 나는 그 잔혹한 자기인식을 사랑의 파산이라 여겼지만,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내가 그 시간을 실제로 통과했다는 가장 분명한 증거였는지도 모른다.


사람은 사라진 것에 의해서도 변한다. 아니, 때로는 사라진 것에 의해서만 변한다. 곁에 있던 동안에는 미처 식별하지 못했던 것이, 떠난 뒤에야 비로소 제 본색을 드러내기도 한다. 함께 웃던 시간보다 홀로 견딘 시간이 더 정확할 때가 있고, 손을 잡고 있던 순간보다 놓쳐버린 뒤의 공백이 더 많은 것을 가르칠 때가 있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부재를 단순한 없음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부재는 끝난 뒤에야 비로소 작동하는 힘이기도 하다. 없기 때문에 더 오래 남고, 닿지 않기 때문에 더 깊이 스며드는 것. 그것은 내게 사랑의 다른 이름은 아니었지만, 분명 하나의 시간이었다. 한 사람의 내부를 서서히 점유하고, 그 이전과 이후를 가르는 시간.


아마 그래서 나는 이 연재를 쓰게 되었을 것이다. 누군가를 다시 불러오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라진 것의 작용을 끝까지 따라가 보기 위해서. 내가 어디서부터 잘못 믿었는지, 어디서부터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했는지, 어디서부터 이미 부재를 사랑이라고 오해하고 있었는지, 그것을 차례로 더듬어 보기 위해서. 그러나 그렇게 써 내려오며 내가 확인한 것은 실패의 목록만이 아니었다. 상실의 해부 끝에 남는 것이 반드시 공허만은 아니라는 것, 사람은 자기를 파괴한 시간조차 언어로 봉합하고 봉인함으로써 비로소 감내할 수 있게 된다는 것, 나는 그것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 쓰는 동안 나는 과거를 복원한 것이 아니라, 과거가 내 안에 남긴 균열의 형상을 더듬어 본 셈이었다.


시간은 모든 것을 지나가게 만든다고들 말하지만, 내게 시간은 지나가는 것이라기보다 스며드는 것이었다. 어떤 일은 끝나도 끝나지 않는다. 표면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종료되었는데, 내부에서는 여전히 지연된 형태로 진행된다. 잊었다고 생각한 문장이 어느 날 문득 되돌아오고, 사소한 빛의 각도나 냄새 하나가 한 시절 전체를 순식간에 열어젖히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안다. 지나간 시간이란 소멸한 시간이 아니라 다른 형식으로 저장된 시간이라는 것을. 나는 그것을 지울 수 없었고, 부정할 수도 없었다. 할 수 있는 일은 다만 그것이 내 안에서 어떤 얼굴로 남아 있는지, 그 남아 있음이 나를 어디까지 바꾸어 놓았는지를 조용히 인정하는 것뿐이었다.


사랑은 결국 무엇이었을까. 지금도 나는 그것을 쉽게 정의할 수 없다. 사랑이었다고 말하면 너무 많은 허위가 섞이고, 사랑이 아니었다고 말하면 너무 많은 흔적이 설명되지 않는다. 아마 그것은 끝내 사랑이 되지 못한 어떤 것이었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오래 사랑처럼 남은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 틈에서 오래 살았다. 아닌 것과 있었던 것 사이, 끝난 것과 끝나지 않은 것 사이, 잊었다고 말하는 마음과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감각 사이에서. 그 모호함은 나를 소진시켰고, 동시에 여기까지 데려왔다. 사람은 명료한 진실만으로 살아지지 않는다. 때로는 끝내 분류되지 않는 경험 하나가 한 생의 문장을 더 오래 붙든다.


이제 와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처음의 내가 부재라고 썼던 그 시간이 결국 한 사람의 생을 변형시키기에 충분했다는 것. 실제로는 없었을지라도 실재로는 남았다는 것. 나는 더 이상 그 시간을 구원하려 하지 않는다. 그것이 아름다웠다고 과장하지도 않겠다.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지도 않겠다. 다만 그것이 내 안에 남긴 변형만은 더는 부정하지 않으려 한다. 이전보다 더 늦게 믿게 되었고, 더 오래 망설이게 되었고, 더 조용히 상처 입게 되었지만, 동시에 나는 보이지 않는 것이 사람을 어떻게 바꾸는지 아는 사람이 되었다. 사라진 것이 어떻게 끝까지 잔존하는지, 없음이 어떻게 한 사람의 생에 눌러앉는지 아는 사람이 되었다. 그것이 내가 치른 값이라면, 나는 그 값을 헛되다고만은 말하지 않겠다.


그러므로 이 글은 회복의 선언이 아니다. 완전한 종결도 아니다. 오히려 나는 이제서야 안다. 어떤 것은 끝내 끝나지 않는 방식으로만 끝난다는 것을. 봉인된다는 것은 사라진다는 뜻이 아니라, 더 이상 함부로 열어젖히지 않겠다는 뜻에 가깝다. 더는 그 시간 앞에서 나를 증명하려 애쓰지 않고, 더는 그 사람을 이해함으로써 내 고통을 정당화하려 들지 않고, 다만 그 시간이 내 안에 실재했다는 사실을 하나의 형식으로 남겨 두는 것. 오늘의 나는 그 정도의 거리에서만 과거를 바라볼 수 있다. 그 거리가 없었다면 나는 여전히 그 안에서 허우적거렸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안다. 기억을 지우지 않아도, 그것에 잠식되지 않는 법이 있다는 것을.


유령은 사라지지 않아서 유령이 된다. 끝났는데도 끝나지 않고, 실체가 없는데도 작용을 멈추지 않으며, 떠나갔는데도 몸 안 어딘가에 기척처럼 남아 계속 살아 움직인다. 내가 오래 견딘 것은 어쩌면 한 사람 자체가 아니라, 그 사람이 떠난 뒤에도 내 안에서 배회하던 유령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것을 지우려 했고, 몰아내려 했고, 부정하려 했다. 그러나 끝내 실패했다. 어떤 유령은 추방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붙잡혀 제 자리를 부여받을 때에만 비로소 떠돌기를 멈춘다.


그래서 이제 나는 그 유령을 붙잡아 내 몸 안에 봉인한다. 쫓아내지 못해서가 아니라, 더 이상 떠돌게 두지 않기 위해서. 나를 해치던 무정형의 기척을, 끝없이 회귀하던 시간을, 설명할 수 없으나 분명히 작동하던 부재를, 마침내 하나의 형체로 붙잡아 내 안에 눕혀 두기 위해서. 그 순간 부재는 공백이 아니라 형체를 얻고, 떠도는 시간은 비로소 정지한다. 봉인된 것은 사라진 것이 아니다. 다만 더 이상 나를 휩쓸지 못하는 자리에 놓인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처음의 문장을 다시 가져온다. 사랑은 없었다. 그러나 그 부재조차 하나의 실재였음을, 나라는 사람이 증명한다. 이 문장은 모순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삶은 종종 그 모순으로만 설명된다. 없었기 때문에 더 오래 남는 것, 끝났기 때문에 비로소 시작되는 것, 닿지 못했기 때문에 더 깊이 각인되는 것. 나는 그 역설을 통과해 여기까지 왔다. 그리고 이제는 그 사실을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내가 봉인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시간이다. 정확히는, 사랑이라고 믿었던 어떤 부재가 내 안에서 오랫동안 작동하던 시간이다. 그것은 나를 붕괴시키기도 했고, 나를 변형시키기도 했으며, 끝내 지금의 나를 형성해 놓았다. 그러니 나는 이제 더는 따지지 않겠다. 그것이 진짜였는지 아니었는지, 사랑이었는지 아니었는지. 대신 이렇게만 남기겠다. 그것은 한때 내 생을 흔들었고, 그 흔들림은 지금도 나라는 형태 안에 잔존한다. 그 정도라면 충분하다. 그 정도라면, 그것은 하나의 실재였다.


이제 나는 그 시간을 닫는다. 없었던 것으로 지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있었던 것으로 남겨 두기 위해서. 내 안에 오래 머물렀으나 더는 나를 지배하지는 못하게 하기 위해서. 한때는 그것이 나를 끝없이 흔들었지만, 이제는 문장으로 남아 내 곁에 조용히 놓여 있기를 바라면서. 내가 붙잡아 봉인한 유령은 더 이상 나를 떠돌며 해치지 못한다. 그것은 마침내 내 몸 안에서 제 자리를 얻었고, 나 역시 마침내 그 시간이 있어야 할 자리를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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