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은 돌아가는 일이 아니었다.
나는 한동안 그것을 오해했다.
무언가를 지나오면 언젠가 다시 예전의 얼굴, 예전의 리듬, 예전의 감각으로 복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의 삶은 그런 식으로 복원되지 않았다.
한번 균열이 난 마음은 처음의 결로 돌아가지 않았고, 한번 무너진 사람은 무너지기 이전의 구조로 다시 조립되지 않았다.
대신 금이 간 자리에 새로운 조직이 생겼고, 손상된 부분을 중심으로 다른 감각이 돋아났다.
재생은 복원이 아니라 변형이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원래도 순한 사람이 아니었다.
쉽게 믿고 쉽게 열리고 누구에게나 마음을 내어주는 종류의 인간이 아니었다.
말이 많은 사람도 아니었다.
내게는 처음부터 안쪽으로 버티는 습관이 있었고, 오래 보는 버릇이 있었고,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는 쪽의 기질이 있었다.
원하지 않는 것은 하지 않았다.
애매한 호의에 기대어 나를 흐리게 만드는 일도 잘 하지 못했다.
그러니 그 이후 내게 생긴 변화는 순진함의 파괴라기보다, 원래 있던 결이 더 선명해진 쪽에 가까웠다.
그 증거가 얼굴에 남았다.
어느 날부터 한쪽 앞머리가 희게 세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낯설었다.
그런데 곧 그것이 싫지 않다는 걸 알았다.
나는 그 흰 기색이 마음에 들었다.
이전과는 다른 형태로 살아남았다는 표식 같았기 때문이다.
상처가 사라졌다는 증거가 아니라, 어떤 시간을 통과한 몸이 다른 결을 갖게 되었다는 증거.
나는 그 가느다란 변색을 볼 때마다 복원보다 변형이라는 말을 더 믿게 된다.
되돌아간 것이 아니라 달라진 채 남았다는 것.
재생은 아마 그런 쪽에 가까웠다.
그와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서로를 알고 있었다.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어떤 사람을 오래 알고 지낸다는 사실이 때때로 실제보다 더 큰 신뢰의 그림자를 만든다는 점이다.
우리는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고 아주 먼 사이도 아니었다.
연락이 잦은 관계도 아니었지만, 완전히 끊어진 적도 없었다.
그 애매한 지속 속에서 나는 그가 오랫동안 어떤 감정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역시 내가 그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끝내 말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은 감정은 말하지 않은 사람의 자리로 남는다.
나는 그를 그가 스스로 선택한 거리에서 이해했다.
그 이상을 대신 완성해줄 이유는 내게 없었다.
한 번은 그가 이미 너무 많은 것을 결정해버린 뒤에 나타난 적이 있었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지금 하려는 선택이 사랑인지 회피인지.
그는 끝내 똑바로 답하지 못했다.
나는 서두르지 말라고 말했다.
누군가의 삶을 덮어쓰는 선택이라면 더더욱, 자기 안을 끝까지 들여다보지 않은 채 밀어붙이지 말라고.
그러나 그는 대답 대신 진행을 택했다.
그 이후의 후회는 그러므로 내 몫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랑의 비극이라기보다, 직면하지 못한 마음이 결국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온 결과였다.
아주 늦은 밤, 예고도 없이 걸려온 전화가 있었다.
우리가 그런 시간에 서로를 찾을 사이는 아니었으므로, 벨이 울리는 동안부터 이미 좋지 않은 예감이 있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술기운이 묻어 있었다.
그는 그제야 오래된 감정의 존재를 입 밖에 냈다.
그리고 내가 그것을 알고 있었느냐고 물었다.
나는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왜 모른 척했느냐고 물었다.
나는 생각했다.
말하지 않은 사람의 감정을 왜 상대가 먼저 정리해줘야 하는가.
왜 침묵의 책임이 언제나 듣는 쪽에 돌아와야 하는가.
짧고 마른 대화를 끝내고 전화를 끊은 뒤에도, 그 밤의 공기는 오래 가라앉지 않았다.
너무 늦게 도착한 말은 진실일 수는 있어도 책임은 될 수 없다는 생각만이 또렷하게 남았다.
그 뒤 그는 다른 얼굴을 하고 내 삶 안으로 들어왔다.
명분은 있었고 형식도 그럴듯했다.
당시의 나는 혼자 감당해야 할 일이 지나치게 많았고, 그 사실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약해져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 접근을 막지 못했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누군가가 내 곁을 드나들었다는 사실과 실제로 곁에 있었다는 사실은 전혀 다른 말이었다.
그는 필요한 순간마다 자신을 설명할 수는 있었지만, 정말 필요한 순간마다 내 옆에 있지는 않았다.
부분적인 조력은 있었을지 모르나, 삶의 무게를 함께 진 사람의 자리에까지 간 적은 없었다.
나는 결국 대부분을 혼자 통과했다.
그가 내게 했던 몇몇 말은 오래 남았다.
그중에는 이상할 만큼 유치해서 오히려 잊히지 않는 것들도 있었다.
나를 보지 않고, 자기 내부에서 오래 썩어 있던 열등감과 패배감의 그림자를 내 위에 덧씌우는 말들.
그것은 나에 대한 진술이 아니라 자기 내부의 오래된 적개심이 밖으로 새어 나온 문장에 가까웠다.
실제의 나를 본 것이 아니라, 자기가 감히 참여하지 못했다고 믿는 어떤 세계의 잔상을 내게 포개어 본 것뿐이었다.
그 말을 들으며 나는 오히려 단순한 사고의 구조를 보았다.
인간은 때로 정확해서가 아니라 너무 조악해서 이해된다.
또 다른 말도 있었다.
관계를 어떤 균형표처럼 계산하고, 감정의 비대칭을 견디지 못해 이상한 조건을 만들어내는 말.
겉으로는 평등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불편을 줄일 방식을 찾는 문장.
그 순간 알았다.
그가 원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자기 모순을 덜 불편하게 만들어줄 어떤 배치였다는 것을.
자기만을 향해 있어주고, 자기를 이해해주고, 그러나 현실의 대가는 요구하지 않는 사람.
하지만 나는 아무리 상황이 엉망이어도 그런 허상은 될 수 없었다.
그래서 선을 그었다.
욕망이 원하는 범위가 있다면 거기까지가 전부라고.
그 이상을 사랑이라 부르며 부풀릴 생각도, 누군가의 삶을 뒤집으라고 요구할 생각도 없다고.
그 말은 냉담해서가 아니라 정확해서 나온 것이었다.
나는 원래 말을 분명하게 하는 사람이다.
원하지 않는 것은 하지 않는다.
그는 바로 그 점을 견디지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은 그가 나를 향해 평가의 잣대로 들이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정작 책임져야 할 순간마다 비켜난 사람이, 내 명료함을 문제 삼을 자격은 없다.
그럼에도 그런 종류의 사람들은 종종 상대의 명확성을 공격으로 느낀다.
자기가 흔들 수 없는 중심을 만나면 그것을 차갑다 부르고, 감당할 수 없다고 부르고, 과하다고 부른다.
그것은 판단이 아니라 실패한 통제의 언어에 가깝다.
끝은 놀라울 만큼 진부했다.
대면 대신 가벼운 형식이 선택되었고, 설명 대신 정리가 선택되었고, 마지막에는 뒤집어씌우기가 남았다.
이용했다는 취지의 문장.
나는 그 말을 오래 붙들고 있었다.
상대를 이용한 쪽이 누구인지, 도움의 얼굴로 들어와 욕망을 섞고, 책임의 순간에는 사라지고, 떠나며 상대를 가해자로 만들어야만 자신을 덜 비참하게 느낄 수 있었던 쪽이 누구인지.
시간이 지난 뒤에야 정확히 알았다.
그 문장은 사실을 말한 것이 아니라 투사였다.
주어를 바꿔 끼운 채 도망가는 사람의 마지막 문장이었다.
그때 나는 어떤 상태에 놓여 있었다.
상처라는 말로 쉽게 덮고 싶지 않은 상태.
숨이 가빠지고, 판단이 흐려지고, 방향 감각이 무너지는 상태.
내가 반했던 것은 물 자체가 아니라 그 위에 떠 있던 윤슬이었다.
반짝이는 표면은 거짓이 아니었다.
실제로 아름다웠고, 실제로 나를 끌어당겼다.
그러나 윤슬은 물 전체가 아니었다.
그 아래의 깊이와 온도와 밀도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나는 그 안에서 허우적거렸다.
살려고 몸을 움직일수록 더 깊이 휩쓸리는 느낌.
그 마지막 문장은 내게 모욕 이전에 상태로 도착했다.
나는 그 안에서 방향을 잃었다.
그 또한 나의 선택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이 일을 전부 타인의 탓으로 돌리고 싶지 않다.
후회하느냐고 누가 묻는다면, 후회하지 않는다고 답할 것이다.
두려움은 분명히 있었다.
아니, 두려움이 더 컸다.
그런데도 나는 반했다.
윤슬에 반했다.
그 반짝임에 내가 실제로 설렜다는 사실은 거짓이 아니었다.
나는 그 진실을 지우고 싶지 않다.
어쩌면 그것이 내 사랑의 힘이었는지도 모른다.
두려움을 모르고 내디딘 것이 아니라, 두려움을 품은 채 끝내 마음이 움직였다는 것.
안전을 다 확인한 뒤에야 시작되는 감정만이 사랑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나는 이 이야기를 경멸로만 정리하고 싶지 않다.
상대를 낮추고 싶은 마음이 처음에도 없었고, 중간에도 없었고, 끝내도 없다.
그의 비겁함과 잔인함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너무 잘 안다.
그럼에도 그것을 전부 멸시로만 정리할 수는 없다.
행복했던 기억이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날씨가 유난히 좋던 날들이 있었고, 비가 조용히 내리던 시간들도 있었다.
우리는 때때로 아무 말 없이 한 풍경 앞에 함께 서 있었다.
혼자 보아도 충분히 아름다웠을 장면인데, 그는 그것을 내게 보여주고 싶어 했다.
좋은 것을 함께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의 마음이 거기에는 있었고, 그런 순간들 속에서 나는 분명 사랑받는다는 감각을 느꼈다.
그러니 없었다고만은 말할 수 없다.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지만, 분명 존재했던 무언가가 있었다.
아마 너무 긴 시간이 바탕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낯선 사람에게 휩쓸린 것이 아니라, 오래 알고 지낸 얼굴이 하고 있는 말과 몸짓 앞에서 방심한 것이다.
시간은 종종 신뢰의 근거가 아니라 착시의 배경이 된다.
나는 그것을 뒤늦게 알았다.
오래된 기류와 오래된 시선, 말로 다 확인하지 않아도 남아 있던 정서의 잔향이 물의 표면을 너무 오래 반짝이게 했다.
그래서 나는 결국 들어가고 말았다.
수영을 알지 못하면서도.
지금 생각하면, 사랑은 언제나 헤엄칠 수 있는 사람에게만 오는 것이 아니었다.
어떤 사람은 끝내 건너는 법을 배우지 못한 채, 다만 빛에 이끌려 물의 성질을 잊는다.
나는 아마 그런 쪽의 사람이었을 것이다.
이제 와 돌아보면 재생은 그 물에서 완전히 빠져나온 뒤에 시작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물의 깊이를 인정하는 순간부터, 내가 왜 거기에 발을 들였는지 부정하지 않는 순간부터, 이미 조금씩 시작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이 일을 단순히 어리석음이라고만 부르고 싶지 않다.
그 오래된 시간의 바탕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다시는 같은 방식으로 물에 들어가지 않으리라는 것도 안다.
그것은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내 몸이 이미 다른 조직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희게 센 한쪽 머리칼처럼, 내 안에는 이제 이전과는 다른 감각이 자라 있다.
전과 같은 사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낯선 사람도 아니다.
원래부터 있던 침묵은 더 단단해졌고, 경계는 더 정확해졌고, 사랑에 대한 내 감각은 더 늦고 더 신중한 형태로 바뀌었다.
나는 복원되지 않았다.
복원될 수도 없었다.
대신 망가진 자리에 다른 기관이 돋았다.
전과 같은 마음은 아니지만, 이 마음도 분명 살아 있는 쪽에 속한다.
재생은 그래서 희망의 문장이라기보다 인정의 문장에 가깝다.
되돌아가지 못한다는 것, 되돌아가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다는 것, 이전과는 다른 얼굴로도 오늘을 견딜 수 있다는 것.
나는 이제 그것을 안다.
사랑은 때때로 사람을 구하지 못하고, 오히려 더 깊은 쪽으로 밀어 넣기도 한다.
그럼에도 한 번 빛을 지나온 물은, 이전과 같은 물로 돌아가지 않는다.
나 또한 이제, 그 반짝임의 상처까지 품은 채 다른 결의 빛으로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