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세계관과 현대사상
저자 소개 - 제임스 사이어
미국 콜롬비아주 미주리 대학교에서 영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미국 IVP의 편집 자문으로 일한 바 있다. 개혁주의 복음주의 철학자이자 포스트모더니즘을 비롯한 세계관 관련 전문가로서 미국과 유럽 전역의 캠퍼스를 오가며 강의와 세미나를 활발하게 진행했다.
저자의 출신 학교가 반가웠다. 미주리 대학교는 민담 공부할 때 알게 된 학교다. 시작부터 여담이냐... 꿀팁 하나. 미주리 대학교 홈페이지 라이브러리에 가면, 전 세계 민담을 정리한 모티프 인덱스 자료를 무료로 볼 수 있다. 특히 ‘Go here for the full-text of the tales.’를 클릭하면 각 넘버에 해당하는 민담을 아카이브를 통해 읽어볼 수 있어서 아주 유용하다. (인터넷 아카이브에 가입하면 온라인 상 대여(무료)가 가능하다.)
https://libraryguides.missouri.edu/c.php?g=1039894&p=7609090
이제 책 내용으로 들어가 볼까. 세계관이란 ‘이야기 형태로, 혹은 실재의 기본 구성에 대해 우리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일관되게든 비일관되게든) 보유하고 있는 일군의 전제(참이거나 부분적으로 참이거나 전부 거짓인 가정)로 표현되는 것으로서, 우리가 살고 움직이고 몸담을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하는 헌신이요, 마음의 근본 지향이다. (31-32p)’ 물론 이 세계관적 사고가 ‘분명 최근 들어 강하게 비판받고 있음을’ 저자는 ‘인정한다. 합리적 체계를 지나치게 강조한다는 것이 비판의 핵심이다. 이것이 어느 정도는’ 저자가 ‘세계관이 헌신, 마음의 근본 지향임을 강조하는 이유’다.
살면서 ‘우리는 이런 입장이나 저런 입장을 취하게 된다. 어떤 명백한 세계관을 취하기를 거부하는 것도 결국 그 자체가 하나의 세계관이거나 적어도 하나의 철학적 입장이 된다. 간단히 말해, 우리는 이미 휘말려 있다. 우리가 살아있는 한, 우리는 검토된 삶이나 검토되지 않은 삶을 산다. 검토된 삶이 더 낫다는 게 이 책에서 취하는 가정이다. (38p)’ 나 또한 이 가정에 동의한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세계관은 크게 유신론(기독교, 이신론, 이슬람)과 무신론(자연주의, 동양 범신론적 일원론, 뉴에이지,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나뉘어 진다. 허무주의와 실존주의도 꽤 비중 있게 다루며, 애니미즘, 쾌락주의와 유미주의에 대한 내용도 짧게 언급돼 있다.
여덟 가지 세계관 질문(최고의 실재, 외부 실재, 인간, 죽음 이후, 지식, 도덕성, 역사, 핵심 헌신)을 통해 위에 제시된 일곱 개 세계관 각각의 특성과 한계를 밝히는데, 역사적 흐름에 따라 시대정신의 변천 과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근대 이성, 과학을 앞세운 인간 중심 시대가 열리면서 자연주의자들은 신을 거부했고, 그 결과 허무주의라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다. 실존주의는 허무주의에 맞서기 위해 분투했으나 자아의 한계를 이겨내지 못했고, 동양 범신론에 희망을 걸었지만 딱히 해답을 찾지 못했다. 이윽고 동양 범신론에 서양 자연주의, 원시 애니미즘을 섞어 소중한 자아를 신의 자리까지 추앙시켜도 보았지만(뉴에이지) 이 역시 만족스럽지 못하자, 포스트모더니즘에 이르러 하나님과 진리는 물론, 인간의 이성과 자아까지 죽여 버린다. 결국 대 혼돈 속에서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옳을 수 없다고 빼액거리는 주둥이(언어)만 남게 되었다. 포스트모던의 논리에 의하면 심지어 그렇게 말하는 주둥이조차 옳지 못한 게 된다.
내 세계관은 당연히 기독교 유신론일 거라고 예상했지만, 검토 결과 작년까지만 해도 따뜻한 이신론에 가까웠고, 동양의 범신론, 심지어 애니미즘과 뉴에이지 세계관도 조금씩 섞여 있었다. 처음엔 분명 기독교 유신론에서 시작했다. 모태신앙이었으니까. 그래서 당연히 그 세계 속에 살고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아주 사소한 통로를 통해서 내 세계가 조금씩 변형되고 있었다. 무서운 건, 그 변화를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사실. 이게 과연 나만의 문제일까? (스티브 윌킨스의 ‘은밀한 세계관’을 읽어보면 더 소름 끼칠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서 저자는 적절한 세계관이 되기 위한 네 가지 시험(요건)을 제시한다.
1. 내적 일관성
2. 적절한 자료 취급
3. 설명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설명할 능력
4. 주관적 만족성 제공
찬찬히 살펴보면 저 네 가지 시험을 모두 통과하는 세계관이 많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무신론은 유신론에 비해 인간의 지적 능력과 죽음의 한계 때문에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이 더 많았다. 물론 그렇다고 유신론이 완벽한 것은 아니다. 모든 세계관에는 구멍이 있다. 저자는 ‘우리의 인간성이 어떻든, 인간으로서의 유한성 때문에 세계관을 파악하고 표현하는 방법에서 전적인 정확성을 기하지 못하고 온전함과 철저함도 기하지 못할 것이다. 실재에 대한 몇몇 진리는 우리의 매우 촘촘한 지적 망 사이로 미끄러져 나갈 것이다. 그 망에는 심지어 우리가 알아채지도 못하는 구멍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겸손이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437p)’고 말한다.
유신론과 무신론 모두 ‘신이 실제로 존재하는가?’에 대해 확실히 증명할 수 없다. 세계관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질문 같은데, 정답이 없다니... 세계관은 결국 마음, 믿음의 문제인가 보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개인의 선택에 달린 걸까? 그런데 문제는 선택이 믿음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신을 믿기로 선택한다고 해서 진정 믿어지는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존재를, 타인은커녕 스스로에게조차 증명해 보일 수 없는 존재를, 어떻게 단순히 선택함으로써 뿅[!] 하고 믿게 되냔 말이다.
여기에서 나는 기독교 유신론의 적절성을 발견했다. 성경에는 ‘3. 설명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설명할 능력’이 담겨 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 2:8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다. 그럼 그 선물을 어떻게 얻지?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마 7:7
아멘.
물론 신이 있는 세계는 이슬람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슬람의 신이 만든 우주는, 인간에게 그 어떤 선택의 자유도 허락하지 않는 닫힌 우주요, 무조건적인 복종을 강조하며 엄청난 수고에 의해 구원을 얻을 수 있되, 그마저도 신이 원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 되지만 모든 것은 신의 뜻일 뿐이다. 청개구리+도마+요나인 나는 확신의 지옥행... 후덜덜
이제 내가 해야 할 바가 분명해 졌다. 내 세계에 대해 고민하고 의심하고 번뇌할 시간에(이제 그것들이 아무 소용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므로) 기도로 믿음을 구하고, 성경 묵상과 예배를 통해 그 믿음을 유지하는 것. 그리고 내가 믿는 세계관-기독교 유신론의 교리에 따라 성실히 헌신하며 살아가는 것. 내게는 이 세계가 가장 탁월하며, 만족스러우니까.
세계관에 관한 ‘여러 선택지를 제시하여 설명하고 비판’하는 ‘검토 과정에서 독자가 자신의 세계관을 발견하거나 수정하거나 더 명확히 갖추(38p)’기를 바란다는 저자의 집필 의도가 이렇게 성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