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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만 켜면 손이 굳는 전업작가입니다

웹툰 대본만 쓰던 스토리 작가의 브런치 입성기

<전업작가와 고양이>


# 혜화의 작업실/ 낮/ 백준, 파치(고양이)

아이패드 화면의 브런치 어플 아이콘. 중지로 브런치 어플을 (클릭) 한다.


백준    (대사만) 잘 봐봐. 


브런치 어플이 켜짐과 동시에 양 손이 (쩌적 쩌적)대며 돌로 변한다. 한숨쉬는 백준의 얼굴. 


책상 위에 앉은 파치가 대사. 돌로 변한 양 손을 들어보이는 백준. 


파치    흥미롭군.

백준    매번 이렇다니까. 이 어플만 켜면 이렇게 돼. 

파치    문제군, 문제야. 

백준    그렇지? 이렇게 돌처럼 굳어버리면 글을 쓸 수가, 


돌로 변한 양손 위에 가지런히 엎드리는 파치. 불만족스러운듯 꼬리를 바닥에 (탕탕) 내리친다. 

어이없다는 듯 내려보는 백준의 뒤통수.


파치    감촉이 거지같네. 

          장수돌침대 같을 줄 알았는데. - (손글씨로)

백준    ....내려와.  

파치    2분만. - (손글씨로)


돌로 변한 양손을 바라보며 백준이 나직히 대사한다. 손에서 몸을 일으켜 물러난 파치의 풍성한 꼬리만 보임.


백준   글 하나를 써서 인증을 해야 손이 다시 풀려.  

         저번에는 음성 자동완성으로 어찌어찌 했지만..

         큰일이라고. 앞으로도 손이 굳어 버린다면..


책상 아래로 (훌쩍) 뛰어내리는 파치. 돌로 변한 양손으로 머리를 움켜쥐고 항의하는 백준. 


파치    그럼 켜지마.  

백준    무슨 해결책이 그래?! 난 전업작가라고! 

파치    글 같은 거 안쓰면 되잖아. 잘됐네.

            매번 쓰기 싫어했잖아? 

백준    야, 그게 다 우리의 성장과 네 노후를 위해서..


기지개를 늘어지게 켜는 파치의 모습 뒤로 위압적으로 서있는 백준. 

뭔가를 꾸미는 듯 백준의 주위로 어두운 아우라가 흉흉히 피어오른다. 


파치    그 손으로도 해우소 모래는 퍼올릴 수 있지? 

           준비해. 60초 뒤에 큰 걸 봐야겠으니까.    

 

뭔가 커피믹스 스틱 같은 걸 (슥) 들어올리는 백준의 음영. 그걸 보는 파치.


해맑은 표정으로 츄르를 돌손으로 들고 말하는 백준. 츄르를 보는 파치의 망부석 같은 뒤통수. 


백준    이 손으론 츄르 봉지도 못 뜯는데?


- 장면 전환 - 백준의 자리에 앉아있는 안경 낀 파치. 날카롭게 세운 발톱으로 블루투스 키보드 자판을 (타닥 타닥) 서투르게 친다. 옆에서 백준이 앉아서 교정 중.


파치    브..런치만 켜면, 소니 굽ㄴㅡㄴ.. 

백준    니은은 받침으로 붙여야지. 모음 옆에 이응 넣고. 

파치    이렇게? - (손글씨로)

백준    옳지. - (손글씨로)




브런치 글 느낌 아니까


그래서 파치가 발톱으로 한 땀 한 땀 적어준... 글은 아니고, 첫 시작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 가장 편한 형식(대본)으로 적어 보았다. 읽었을 때 그림이 그려져야 하는 글, 대본. 무명시절까지 도합 6년을 대본만 적어왔더니 웹소설, 감상이 섞인 에세이, 가사 등 새로운 글을 쓰는 시도는 번번히 어려웠다. 브런치 글도 마찬가지다. 물론 지금처럼 가벼운 블로그성 글은 작성이 가능하지만... 


그렇지만 브런치는 그런 곳이 아니잖느냔 말이다. 이곳의 작가들은 교양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 느낌의 정돈된 문체를 쓰고, 차분하면서도 바디감 있는 문장을 선호한다. 진라면 마냥 진한 글들이 모여있는 뼈대있는 플랫폼. 그것이 브런치 아닌가? 때문에 난 언제나 이 사이트로부터 한 발 물러났었다. 브런치 글 느낌 아니까. 대체로 가볍고, 때론 필요 이상으로 무거우며, 먹구름처럼 우울하다가도, 정보서처럼 건조하게 가변하는 나의 변덕스런 글은 이곳에 어울리진 않을 거란 생각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한 마디로 톤앤매너 따위는 없는 애가 바로 나이기 때문에. 줏대 없고, 귀 얇고, 뒤죽박죽인 잡가 = 백준 



적응력 만렙


이전에 다른 곳에서도 밝힌 바 있지만, 내가 두루뭉술한 잡가인 데는 이유가 있다. 예고지망 - 외고 - 생물학과 - 방송작가 - 웹툰 작가로 커리어라곤 없는 똥망 테크트리를 지금껏 쌓아왔기에 그렇다. 예쁜 사금파리 모으듯 조각조각난 경력을 살아온 사람이 나다. 때문에 나만의 색깔, 나만의 스타일 등 '나만의~' 류를 찾기는 언제나 힘이 들었다. 


다만, 그렇게 역마살이 있다보니 길러진 게 있긴 한데.. 바로 적응력. 낯 가리고, 까탈스럽고, 예민보스처럼 보이는 나는 사실 적응의 귀재다. 바뀐 환경에 수긍만 한다면, 적응하기란 대체로 수월했다. 글쓰기에서도 그 성질은 유효했다. 한 예로 방송작가를 그만두고 야심차게 준비한 웹툰 시나리오를 프로덕션 대표에게 내밀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글이 너무 동적인데? 만화는 정지된 장면들의 연속이 연출하는 예술이야." 


한 마디로 영상 언어 말고 만화 언어로 표현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 후로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긴 했지만, 지금은 만화 언어를 어느정도 익혀서 연재를 하고 있으니, 적응에 성공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조금 거슬러 올라가자면 고교시절 역시 마찬가지의 적응력을 보였다. 문과와는 친하지 않은 성정의 나였으나, 그곳에서도 이과반은 있었기에 기어 들어갔다. 그래놓고 어이없게 수리 영역 점수는 형편없는 수준이었으나, 수능을 보지 않아도 되는 수시 1학기라는 축복받은 제도 덕에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다. 중딩시절 배워놨던 피아노는 군입대 시절 군종병의 예배 반주병으로 간택된 덕에 요긴하게 쓰였다. 생물학과 재학 시절 배웠던 이과 감성은 데뷔작 <애니멀 히어로 : 닥터 슈바이처>를 연재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미친 스케줄의 방송작가 시절을 거친 덕에 밤 새서 웹툰 대본을 작성하는 걸 견딜 수 있었다. 영상 언어에 대한 감각 역시 훗날 어떠한 형태로든 도움이 될 것이다. 작품이 영화나 드라마화 될 수도 있는 거니까? (꿈은 꿀 수 있잖아요) 치열했던, 느슨했건. 지나온 시간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며 다져왔다. 




We will find a way. We always have.
우린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 영화 <인터스텔라> 중



내 안에 있는 어떤 재료가 브런치의 정착을 도울지 나는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일정히 글을 써내면서 확인되는 나만의 스킬트리가 분명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조금은 변덕스러운 글이라도 일단 시작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어쩌겠는가? 한달어스 플랫폼에 이미 등록을 해버린 탓에 발 빼기도 뭐하니까. 시작된 것은 반드시 어떠한 형태로든 결과값이 있기 마련이다. 일단 반응이 시작된 생화학 반응식이 그렇고, 가편집본에 따라오는 높으신 분의 피드백이 그러하며, 웹툰 연재 후엔 언제나 완결이 있듯이. 늘 그랬다. 브런치 역시 다른 형태의 시작일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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