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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피아톤의 영화

출판 프로젝트 수상작 <비디오 키드의 생애>를 읽고

터키와 아리랑


브런치북 <비디오 키드의 생애>를 쓰신 존치즈버거님 만큼은 아니지만, 나 역시 후천적인 영화광이다. 20대 후반까지만 해도 영화라 하면 블록버스터, 그리고 그밖에 나머지만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세상엔 와인 라벨만큼이나 다양한 영화가 있었다. 그것을 알려준 계기가 바로 2015년 아리랑 시네센터에서 열린 서울터키영화페스티벌이었다.


영화를 보기 전부터 놀라운 지점이 한 두 개가 아니었다. 나열하자면,


1. CGV도 메가박스도 아니고 아리랑 시네센터라는 곳이 있다고?

2. 전 영화가 무료라고?

3. 터키에도 영화가 개봉되어 나온다고? (그때의 나는 무지했다.)

4. 이런 영화도 보러 오는 사람이 있다고?


아리랑 + 터키. 단어 조합부터 된장과 요구르트의 조합처럼 생소했다. 영화모임이 아니었으면 있는지도 몰랐을 영화관이었다. 요상한 기분으로 관람한 첫 영화는 <침묵의 밤>이라는 영화였다.



뻥뻥 터지는 액션 영화도, 두근거리는 로맨스 영화도 아니었다. 단지 60을 넘긴 남자와 고작 14세의 신부가 첫날밤을 치러야 하는 조혼 풍습을 비판하는 진지한 영화였던 것. 거의 모든 촬영이 5평 남짓한 방 안에서 일어나고, 두 사람의 옥신각신 실랑이하는 대화가 전부인 단조로운 영화였다. 어떤 화려한 배우진이나 스케일 큰 연출도, 흥미로운 플롯도 없는 적막한 영화가 나를 매료시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나뿐만이 아니었다. 영화관을 나오자 모임원들 입에서 방언 터지듯 소감이 쏟아졌다. 자신이 알고 있는 악습의 사례와 마지막 엔딩 장면에 대해 열을 올리며 토론했다. 이 영화는 질문지였다. '조혼 풍습 맞아?'라며 묻는 영상으로 된 질문. 갈증이 났다. 이렇게 질문하는 영화를 더 보고 싶다는 갈증이.



세피아톤이네요


 이후로 나의 관심사는 흔히 예술영화라 불리는 것들을 찾아보고 이야기 나누는 조금은 진지한(?) 활동이 되었다. 이제야 내가 본 영화를 초등학생 때 본 씨네필 모임원도 있었다. (청소년 관람불가였는데..) 때문에 늦은 만학도의 심정으로 정말 열심히 봤다. 감상평도 꾸준히 기록했다. 지금은 명실상부 왓챠에서 인정한 (시청시간이 도합 100일이 된다 하여) 웅녀급 영화인이다.



문제는 영화는 딱 킬링타임 용도 뿐인 친구들을 만날 때였다. 내가 열변을 토하며 엄지를 치켜드는 영화들은 대부분 상업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마블 같은(물론 마블도 좋아한다) 대중영화 외에는 이야기하기가 힘들었다. 그 말은,

<타인의 삶>의 마지막 대사가 주는 감동이라던가, <도그빌>의 소름 끼치는 반전, <마스터>의 호아킨 피닉스의 광기나 <다우트>의 유명한 메릴 스트립 X 필립 셰이모어 호프만의 기싸움 장면 같은 (내 딴에) 쿨한 대화를 나눌 수가 없단 것을 의미했다.


어쩌다 봤다고 해도 지인의 반응은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볼 언저리를 긁적이며 종종 이렇게 말하곤 하는 것이었다.




네가 추천한 영화들은.. 뭔가 톤이 좀 다운되어 있어. 말하자면.. 세피아톤이랄까? 전반적으로 우중충하고 어두운 느낌?



그때마다 억울했다. 아니라고! <미스 리틀 선샤인>이 어디가 어떻게 어둡냐. <대학살의 신>이 얼마나 웃긴 블랙 코미디인데? 타란티노 작품들 만큼 섹시하게 미친 핏빛깔을 봤어? 어떻게 이렇게 다채롭고 다양한 색을 띠는 예술 영화들을 세피아 색조 하나로 뭉개버릴 수가 있는 건지. 표정은 태연해도 내적으로는 언제나 길길이 날뛰었지만.. 나도 알고 있다. 내 취향은 비주류라는 걸. 하지만 지금도 억울하긴 마찬가지다. '나는 영화라는 매체가 지닌 넓은 스펙트럼, 그 다양성에 반한 건데. 세피아 톤만 있는 게 아니야!'라고.

세피아 of 세피아


나의 관심사를 사랑해


 <비디오 키드의 생애>를 읽다 보니 나와 비슷한 애정을 가진 분이 있었다는 것에 반가움부터 느꼈다. 이 브런치북은 작가의 어린 시절을 책임져 주었고 추억을 떠올리게 해주는 비디오(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구애의 시에 가깝다. 영화에 대한 리뷰글이 아닌, 작가 개인의 유년시절을 술술 풀어내기에 잘 읽힌다. 오디오북으로 듣는다 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은 흐름이다.


작가의 서랍에 담긴 영화 '리뷰'글이 몇 있어 다시 꺼내봤다. 어떤 강박 같은 게 느껴졌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얼마나 대단하고 볼만한 지에 대해 너무나 대놓고 '영업'하고 있었다. 나부터가 반감 들어 안 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디오 키도의 생애> 어떤 억지스러운 전달 같은 것이 없다. 그냥  자신이 좋아했던, 친구와 같이 보고, 친구처럼 함께 있었던 비디오(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애정이 다였다. 덕후의 순애보 같은 포근한 레트로, 그것이었다. 그게 도리어 영업이  것만 같았다. 영화를 아껴 못지않는 작가의 진심이 오히려 독자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질 것이므로. 영업을 그렇게 하는 거였다. 영화에 진심인 글이 심사위원을 영입했고, 통했다. 진심은 언제나 통하는구나.




이제는 '세피아가 아니야!'라는 항변글을 쓰기보다는, 애정을 담아 표현하는 글들을 쓰고 싶다. 장점을 부각하기보다는 그 시절 내가 어땠는지, 왜 이런 생각을 했는지. 콘텐츠에 담긴 무엇이 나의 진심을 어떻게 건드렸기에 눈물 쏟고, 힘껏 웃고, 안도하며, 가슴 떨려했는지를. 그것을 쓰면 될 것 같고, 그렇게 쓰고 싶다.  



세피아라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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