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러닝타임을 찰나로 만드는 것은 완벽한 인물일까, 완벽한 감독일까.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 세상을 구하기 위해 세상을 파괴할 지도 모르는 선택을 해야 하는 천재 과학자의 핵개발 프로젝트.
출처 : 네이버
어떠한 기대를 품고 있건, 늘 언제나 그 이상을 보여주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작품입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인 오펜하이머를 다룬 작품으로, 비록 원자폭탄의 아버지라는 수식어 외에는 아는 것이 없지만, 그럼에도 충분히 몰입할 수 있고 즐길 수 있는, 오락영화는 아니지만 그보다 더한 강렬함이 있는 작품입니다.
영화를 감상하기에 앞서 몇 가지 우려되는 사항들이 존재했습니다. 세 시간이라는 러닝타임은 자칫 집중력이 떨어지거나, 어둡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극장의 특성상 졸음이 찾아오진 않을까 싶었습니다. 또한 상영 도중 화장실이 급해져서 중요한 장면을 놓칠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천체물리학이나 상대성이론에 비해 양자역학은 지식 습득도 부족했고, 더욱이 그 인물이 그저 이 학문을 다뤘을 뿐, 본격적인 내용은 핵물리학이나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였기에 몰입이나 이해도가 부족할 것도 같았습니다. 거기다가 오펜하이머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원자폭탄의 아버지'라는 수식어만 알고 있었고, 그가 행했던 프로젝트나 배경지식, 그의 전기적 내용들은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걱정들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습니다. 처음부터 압도적인 배경음들이 연신 울려 퍼졌고, 이따금 더 큰 볼륨으로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이 때문에 그 소리만으로도 영화를 볼 수 있었고, 졸음이라는 말은 애초부터 전혀 허락되지 않는 듯 보였습니다.
이러한 음악을 선보인 음악 감독은 전 작품인 테넷부터 함께했으며, 그보다 더 오래 작업한 한스 짐머의 음악과 유사한 분위기가 느껴지긴 했으나 환상적인 호흡을 보여줌으로써 영화의 가치를 더욱 끌어올렸습니다. 전 작품에서 어렴풋하게 보이던 어색함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은 듯했고, 영화와 완전하게 어우러지는 분위기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음악소리가 거대하고 가끔씩 과도하게 느껴질 정도로 커지기도 했습니다. 이 때문에 그 외의 모든 소리가 묻혀버리는 현상도 있었습니다. 물론 그것마저 영화가 온전히 압도하려는 거대한 힘을 활용하는 시도로 느껴졌지만, 누군가는 불만족스러웠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영화 전반부부터 너무나 많은 인물들이 나와 복잡하기도 합니다. 모두가 주요인물이면서, 주인공과 깊이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 비슷한 수준의 분량으로 묘사됐습니다. 그래서 한 번에 모든 인물을 인지하는 것이 어렵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한차례의 상영으로는 절대로 파악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연기 호흡은 완벽에 가까웠습니다.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보완하면서 완급을 조절했고, 그 인물들 그 자체가 된 것 같은 행동이나 표정 등을 보여주었습니다. 일부는 놀라운 연기 변신을 하기도 했습니다. 특히나 우리에겐 아이언맨으로 익숙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외형부터 완벽하게 변화되어 인지하기까지 다소 시간이 걸릴 정도였으며, 극적인 감정 변화를 소름 돋을 만큼 완벽하게 표현했습니다.
또한 본으로 익숙한 맷 데이먼도 그랬습니다. 이전과는 완전히 다르게 모습과 목소리, 연기들을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어쩐지 이제는 고인이 된 필립 시모어 호프먼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질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으며, 단편적으로 떠오른 그 생각은 이내 사라졌습니다.
이런 완벽한 연기는 다소 복잡한 서사를 제대로 몰입할 수 있는 큰 힘이 됐습니다. 사실 극적인 사건이나 완급조절이 또렷하게 보일 만큼 등락이 뚜렷한 흐름도 아니었으며, 전체적으로 평이하게 사건들이 전개됐습니다. 그러면서 과거와 현재, 오펜하이머의 시선과 상상력, 타인들의 모습 등을 이래저래 뒤섞어 담아낸 듯 보였습니다.
때로는 흑백으로 때로는 색을 갖춘 채 전개된 이야기들은 어딘지 일반적인 오락, 액션 영화나 흔히 할리우드 영화라고 부르는 다른 작품들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이는 감독의 이전 작품들보다 훨씬 더 깊숙하게 내면의 목소리를, 심리상태를 파고들고, 더 많이 표현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것들을 통해 극적인 사건보다 더 강력하고 충격적인, 시선을 끄는 무엇인가를 담아냈으며, 잔잔한 호수에 커다란 바위를 집어던지듯 큰 파문을 일으키는듯했습니다. 때로는 빛의 움직임이나 예술작품 등을 환상적으로 엮고 노출시킴으로써 눈앞에 다가온 그의 정신을 온전하게 느끼게 했습니다.
이와 함께 그의 심리 상태를 때로는 표정으로만, 또는 목소리와 함께, 그리고 온몸을 이용해 표현하는 배우의 연기가 더해졌습니다. 어느 순간 같은 감정을 느끼기도 했으며, 그가 느꼈던 무기력감이나 불안함, 또다시 찾은 활기 등을 온전하게 체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인간이 담아낼 수 있는 온갖 감정들을 제대로 보여주고 표현한 것 같으며, 특히나 자신에게 등을 돌린 동료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표정은 말로는 다 표현 못 할 어떤 감정들을 제대로 보여주었습니다. 그 장면에서는 절로 감탄사를 내뱉을 수밖에 없었으며, 그가 얼마나 대단한 배우인지 온몸으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분명 감독은 역사에 존재하는 핵 실험과 핵 투하라는 거대한 사건을 집중적으로 조명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전적으로 오펜하이머라는 인물의 심리에 초점을 맞추었고, 이는 뒤틀린 시간 속에 섞여들어 난해함을 느끼게도 했습니다.
만약 이러한 특정 사건에 초점을 맞춘 영화를 기대했다면, 그저 지루하고 복잡한 작품으로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특히나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그의 심리 상태를 표현하는 묘사들은 그 흐름에 편승하지 못한다면, 흥미 자체가 생기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제나 영화를 통해 심리적 묘사를 많이 담아냈고, 그 캐릭터의 감정이나 생각들이 잘 전달되면서 자연스럽게 그의 입장에서 생각하게 하고 같은 고민을 유도했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은 흐름에 편승할 것 같습니다. 단지 오락성 요소가 조금 더 있느냐와 없느냐의 차이를 보였던 흐름에서 오락적 요소가 조금 더 배제되어 있을 뿐이었습니다.
굳이 비교를 하자면, 해당 작품은 다크나이트 시리즈나 인셉션과는 다른 분위기를 갖고 있으며, 어둡고 칙칙하면서 약간은 무거운 느낌을 줍니다. 또한 전체적으로 죽음이 직결될 수 없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표현들이나 묘사들이 조금은 잔혹하게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는 메멘토나 덩케르크에 더 가까워 보이기도 했습니다.
오히려 그들보다 더욱 잔혹성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특정 죽음을 묘사할 때, 추가적인 잔혹성이 느껴지는 모습들을 함께 담아냈고, 생각했던 것보다 노출이나 수위가 강한 편이었습니다. 물론 작품을 보는데 꼭 필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이라 납득은 됐지만 어느 정도 당혹감을 느꼈다는 것을 부정할 순 없을 것 같습니다.
분명 어느 정도는 장점과 단점이 극명하게 드러나기도 하며, 거부감이 들거나 당혹감을 느낄 수 있는 장면들이 혼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흑백으로 연출됐던 상황이 색을 갖춘 채 다시 모습을 보일 때, 시간의 흐름이 점차 일반적으로, 정상이라고 부르는 궤도에 오르고 있음을 인지하게 됐을 때, 온전히 모든 시간이 하나로 합쳐짐을 알게 됐을 때 느끼는 희열은 이 작품을 몇 번이고 다시 보더라도 전혀 아깝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오락적 요소가 완전히 배제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유머를 품고 있었으며, 핵실험 때의 효과는 어느 정도 전형적인 슬로 모션과 함께 할리우드 식의 연출을 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갑자기 나타난 정적과 시야를 감싸는 섬광, 그리고 이어지는 커다란 소리와 분진, 바람 등은 전혀 다른 표현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느끼고 보았을 상황들을 더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이런 모든 모습들이 누군가에게는 복잡하고 난해함만이 남았을 지도 모릅니다. 또한 엄청난 기대를 갖고 있고, 예상했던 것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을 깨버리고, 전혀 다른 전개를 보여줌으로써 실망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부정적인 부분을 모두 뛰어넘는 모습을 보여준 것 같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긴 러닝타임이 찰나의 시간으로 느껴졌던 것 같고, 완벽하게 집중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역사적 실존 인물을 다루는 전기 영화를 선호한다면.
자극적인 사건이나 액션 영화보다는 이야기에 집중하는 영화를 선호한다면.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다른 작품들을 좋아했다면.
완벽한 연기력을 보여주는 배우들과 그들의 호흡을 보고 싶다면.
오펜하이머라는 인물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어떠한 선택이 일으켰을 딜레마를 비주얼적으로 표현해낸 모습을 보고 싶다면.
한자리에 오랜 시간 앉아 있는 것을 힘들어한다면.
영화를 보면서 커피나, 물 등 액체류를 즐겨 마신다면.
특정 사건에 특히나 집중하여 펼쳐지는 전개 방식을 선호한다면.
어떤 인간이 가졌을 고뇌와 딜레마에 관심이 없다면.
복잡한 전개를 갖추고 있는 내용에 반감이 있다면.
너무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는 것에 피로도를 쉽게 느낀다면.
오펜하이머라는 역사적 인물을 통해 표현하는 심리적인 묘사들이 중점을 이루는 이번 작품은 이전보다 더욱 깊게 한 사람을 파고들었고, 그것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담아냈습니다. 때로는 너무 많은 인물들과 시간순의 전개가 아닌 여러 모습들과 색상으로 펼쳐지는 이야기가 어렵고 복잡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 색들이 하나로 합쳐질 때 느낄 수 있는 희열이 영화를 온전하게 즐기고 있었음을 깨닫게 합니다. 또한 긴 러닝타임이 찰나의 시간이라고 느낄 만큼 몰입도가 높으며, 그 모든 것들을 뒷받침하는 배우들의 명연기와 완벽하게 어우러지는 음악이 최고의 하모니를 선보였습니다. 결국 또다시 신선함과 완벽함을 동시에 느끼는 경험을 선사해 주었습니다.
★ 5개 만점
★★★★☆(스토리 9 연출 10 비주얼 9 오락성 8 재관람 9 음악 9 연기 9 평균 9)
오펜하이머의 심리 기반 일생을 완벽하게 연주한 어떤 음악을 들을 준비가 끝났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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