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_심리학 일반대학원에서, 박사과정 첫 학기에 마주한 현실
석사 과정도, 박사과정도.
외국이라 해도, 한국이라고 해도.
지금 이렇게 글을 적으면서 5년 동안의 박사 과정을 돌아보면, 언제나 갈림길 같은 선택의 순간이었다. 어느 한 번도 '나 자신'을 잊지 않았다. 무엇이 가장 나답고, 어떤 방식이 나를 충만하게 하는지, 지금 여기의 가치와 의미를 스스로 되물었다.
그 덕분이다. 내가 이렇게 그 과정을 돌아보고 그 경험을 글로 정리하는 이 순간 또 한 번 깨닫는다. 나는 정말 할 수 있는 것을 했고, 그 과정에서 내가 추구하는 가치를 놓지 않고 마음속에 간직한 채 수많은 순간을 지나왔구나.
그래서 지금은, 나의 발걸음엔 힘이 들어가고, 즐거움과 가뿐한 기운이 감돈다. 그 덕분에 내가 또 다른 선택과 고민을 마주했을 땐, 덜 고민하고 덜 망설이며, 더 자신 있고 더 확신을 가지고 마주할 것임을 안다.
나는, 지금의 내 모습을 가장 사랑하며 즐기는 중이다.
박사 과정은 석사 때와 당연히 달라야 할 것이라 다짐했다.
실제로 달랐기에 이는 어려운 달성 과제는 아니었다. 다만, 어떻게 다른가에 방점을 두었다. 그리고 나는 연구를 통한 심리치료 전문성을 함양하기 위해 박사과정에 들어왔다. 그렇기에 연구에 대한 고민을 정말 많이 했다.
석사 때는 뭣도 모르고, 심리학도 이제 막 시작했던 때였기에 채워가는 것만으로도 숨이 찼다. '진정 내가 추구하는 전문성'을 지금 만큼 떠올리기엔 한계가 컸다. 상황도 시간도 마음도 어느 하나 여유 공간이 없었다. 그 부분이 이후 내 마음 한편에 움푹 들어간 아쉬움과 허전함을 느끼게 했다.
박사 과정을 시작하면서, 연구계획서를 정말 많이 다듬고 찾아보았다. 지금 그 연구계획서를 열어보면 미소가 지어질 정도로, 열정과 에너지만큼은 지금보다도 넘쳤구나! 이 글을 작성하며 입학 당시 제출했던 연구 계획서(학업계획서)를 열어보았는데, 정말 놀랐다. 아래 그 몇 자를 나눠보고자 한다.
자기소개 제목 :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가장자리를 넓혀가는 사람"
(중략) 제가 목표하는 상담심리학 전문가는 이론과 실제를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이론과 실제가 통합되면서 균형을 이뤄가는 사람입니다. 상담자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실제경험도 중요하지만, 연구를 통한 이론적 전문성을 더 견고하게 쌓을 필요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상담심리학 이론과 실제 각각은 그만의 치유기제와 과정이 다르고 세부적이며 이에 대한 선행이론과 현재의 적용이 실제 상담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깊게 느꼈기 때문입니다.
연구 관련 내용 중 :
(중략) 정서는 그 특성상 모호하기도 하며 정서표현이 쉽지 않은 한국문화에서는 특히 쉽지 않은 부분인 만큼 연구적 가치가 있습니다. 심리치료와 심리상담 분야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변화요인이자 치료요인이기 때문에 다양한 접근의 연구가 필요합니다.
연구 설계 관련 내용 중 :
(중략) 정서중심치료의 전문성을 위해서 실제 적용의 안목을 가진 연구를 진행하고 싶습니다. (중략) 정서중심치료의 관계적 맥락에서 특정 과정개입(process tasks)의 통합적 치료변인에 따른 효과를 각각 살펴보는 (중략) 정서기반 단계별 개입의 효과, 그리고 서양의 연구결과와 비교하여 다문화적인 관점에서 의의를 가집니다. 해외학술지 게재도 목표 중 하나입니다.
지금 이렇게 내가 스스로 놀란 이유는 그 내용과 마음에 있다. 나는 그때 적어 내려갔던 마음에서 깊어지고 넓어졌으면 그랬지, 변한 건 하나도 없다. 오히려 시작의 그때보다 더욱 견고해지고 구체적인 나만의 여정을 그렸고, 그때보다 많은 것을 성취했다. 정말 '계획서'였던 것이다.
"나는 나만의 가치를 꾸준히 실천해 왔구나"하는, 그 사실이 놀랍고 스스로 대견하다.
이때는 연구를 실행하기에 가장 중요한 연구의 필요성, 대상과 연구방법, 기반 이론의 연결 등은 그저 상상 속에 있었다. 실제로 연구를 진행하면서 마주하는 현실적인 여건은 고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연구자가 자신이 탐구하고 싶은 현상(심리치료에선 치료과정)과 이를 어떻게 진행하고 데이터를 수집할 것인지, 그리고 그 결과를 분석하고 해석하는 과정에서 많은 한계를 마주한다. 그러면서 처음 계획했던 것에서 틀어지거나 수정을 거치면서 처음에 기대했던 것과는 달라지는 것이 상당하다.
나 역시 그 과정을 박사과정 내내 경험했다.
실제로 한 분야의 전문성을 쌓아가는 과정, 연구를 진행하는 과정은 한 가지 길이 아니다. 수많은 갈림길의 순간의 여정이다. 그래서 내가 무엇을 선택하느냐가 변곡점을 만들고, 그 선택이 누적되어 내가 어디에 서있는지를 결정한다.
특히 심리상담, 심리치료 분야는 더욱 그렇다. 많은 전공자들이 상담을 졸업하면 어느 정도 정해진 길에서 적당한 처우로 시작해서 커리어를 쌓아갈 거라 기대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래서 상담 전공에 들어와서 좌절하는 사람들을 너무도 많이 봤고, 자신의 길을 찾는 분투를 하다가 소진이 오고 떠나간 사람도 많이 봤다. 가장 많은 경우는 그래도 다들 간다고 하는 길을 큰 고민 없이 선택해서 걸어가는 경우인데, 그 경우에 어느 순간 막다른 길을 마주한다.
나 역시 그 갈림길을 수도 없이 지나왔다. 그러면서 고민이 깊어지기도,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해서 쉬어가기도 했다.
*소소한 기억:
사회심리학 세미나를 들으며, 내가 원하는 주제의 연구를 진행하는 데 있어서 고려할 것들이 더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망설임이 커졌다. 그 당시에도 나는 '잘하고' 싶었다. '잘'이라고 하는 그 기준은 명확하지 않았지만 뭔가 충분하지 않다는 기분을 떨쳐내기 어려웠다. 그래서 첫 학기부터 내가 추구하는 연구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 선행연구를 도서관 DB에서 계속 찾아보고 고민하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정확하게는 "내가 정말 하고 싶은 EFT Emotion-Focused Therapy 연구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갇혀버렸다. 우선은 '정말 하고 싶은'이라는 정의를 내리는 것이 중요했고, 다음으로 '현재까지 진행된 EFT 연구는 무엇이 있는가?'였다. 그 당시에도 한국에서 진행된 EFT는 전무했고, 모든 연구는 해외 연구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국외 연구를 접하고 논문을 읽으면서 점점 작아졌다. "와 이런 규모의 연구구나.. 내가 이런 연구, 혹은 이에 준하는 연구를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가득했다. 왜냐하면 선행연구는 대부분 10여 명이 참여하는 연구팀에 의해 이뤄지고, 그 안엔 저명한 교수와 트레이너 급 전문가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대상자를 큰 규모로 모집해서, 몇 달에서 몇 년에 걸친 데이터 분석이 들어간 작품이었다. 그런 논문을 수십 수백 건을 읽고 있으니 나의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다.
그래서 첫 학기부터 수많은 고민을 거쳤고, 그 당시 나의 선택은 '일단 연구적 역량을 더 함양하고 결정하자'였다. 그 당시엔 상담 경험과 경력이 적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엄청 많다고도 할 수 없는 애매한 상태였다. (이 역시, 돌아보면 내 안의 self-critic이었다.) 누가 뭐라 하지 않았지만, 나는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에 한몫 더한 것은 대학원 수업과 교육, 그리고 배우는 것들이었다. 한국 심리학 대학원, 특히 일반대학원은 연구를 가장 중심으로 한다. 하지만 말만 연구 중심이라는 것을 깨닫는데 3개월도 걸리지 않았다. 연구를 위한 학습은 학생이 알아서 적당히 하는 구조였다. 대학원 어디에도 이를 알려주는 교육자는 없었으며, 체계적으로 가르쳐주거나, 그에 대해 학생이 주체적으로 고찰하거나 실천할 수 있는, 학생에게 꼭 필요한 교육은 없었다.
*소소한 기억: 박사 과정에선 매 학기 '연구 학점'이라는 것을 등록하는데, 어디에도 그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없었다. 대학원 공지사항은 물론, 교수도, 다른 학생을 통해서도 들을 수가 없었다. 이후 지도교수에게 물어봐서 알게 되었는데, 그냥 말뿐인 학점이라는 거였다. "아~ 그거요. 별거 없고, 그냥 매 학기 하나씩 신청하면 될 거예요"
지도 교수 H는 언제나 말투가 시큰둥했는데, 그의 말투와 내용이 합쳐지면서 들을 때마다 더욱 기운이 빠졌다. 지도 교수는 별거 아니라는 느낌으로 학구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무관심하고 시큰둥했다.
박사 졸업을 위해 연구학점을 최소 9학점을 채워야 하고 4학기(2년 과정) 박사과정에선 매 학기 3학점씩 들어야 했다. 그 학점을 등록한 학기라고, 연구적으로 뭘 더 배우거나 어떤 기회가 더 생기는 게 아니라, 그냥 학교에서 구색 좋게 만들어놓고, 교수도 아무 생각 없고, 학생은 더더 생각 없는 끼워 넣는 '빈 껍데기 학점'이었다.
이런 열악하고 구멍 투성인 교육체계이니, 연구에 진심이고 배우고 싶은, 나 같은 학생은 그저 한국 대학원에서 독특하고 괴짜 같은 '누가 연구를 하고 싶어 해?'라는 상담전공에 만연한 관례를 자극하는 아웃사이더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내가 하고 싶은 주제로, 원하는 시기에, 누구의 도움이나 지원도 없이 자비로, 심도 있고 심리치료 실무에 꼭 필요한 연구는 더욱 하기가 어렵다고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저 신기루 같은 환상을 품고 있다고 느끼게 하는 좌절감과 무력감을 안겨주었다.
연구를 하기 위해 필요한 학습은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정말 혼자서 모든 것을 다 만들고 실천해야 하는 이곳에서 나는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무엇을 결정할 수 있을까?
...to be continue.
*이 글에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가명이며, 사용된 이니셜 또한 실명을 기반으로 하지 않습니다. 특정 인물을 지목하거나 폄하하려는 의도는 없습니다. 본 글은 개인적 경험을 토대로 한 구조적 성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