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_권력을 가진 무력자, 한국의 대학 교수
이제 하나씩 나의 대학원 경험을 펼쳐내기에 앞서, 제일 중요한 주제를 먼저 꺼내보려고 한다. 앞으로도 매번 조금씩 다루긴 하겠지만, 가장 그 핵을 관통하는 이야길 나누는 것이 먼저일 테니.
대학원 하면 빠질 수 없는 대상. 즉 교수에 대한 이야길 하고 넘어가려 한다. 특히 한국 심리학 대학원에 있는 교수들.
이번 주제는 대학원에 있는 동안은 물론, 한국의 수많은 위계 구조를 떠올리게 했다. 이 주제가 대학원에 연결되어 있는 모든 이에게 체념이 아닌, 각성과 성찰의 기회가 되길 간절히 바란다. 그리고 나아가 "나는 여기서 무엇을 선택하고 있고, 무엇을 책임지고 있는가?"를 대답할 수 있었으면 한다.
악어와 악어새
"자연의 포식자 악어. 그 악어가 입을 벌리면, 악어새는 그 입속에 들어가 이빨 사이 고기를 떼어먹는다."
지도교수와 박사 학생(대학원 학생)의 관계를 떠올렸다. 그랬을 때, 이 비유가 번뜩 떠올랐다. 악어와 악어새.
교과서나 동화책에서는 익히 들었던 내용이다. 전혀 안 맞을 것 같은 관계임에도 그럴듯하게 들리기도 하는 그런, 석연치 않은 공생 관계 말이다. 너무 딱이지 않은가? 이보다 더 맞는 비유는 없다.
실제로 현대 동물 행동학자들은 이를 뚜렷하게 관찰한 사례가 거의 없다고 한다. 그럼에도 한 번쯤은 들어봤을 이야기이다. 하지만 실제로 이 “공생”은 상징적이거나 전해 내려온 이야기에 가깝지, 명확히 입증된 생태학적 사실은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말대로 파워 자체는 비교가 안 된다. 악어는 포식자의 최상위에 있고, 악어새는 작은 조류일 뿐이다. 악어새라고 불리는 이집트 물떼새의 생존 자체는 악어에게 전적으로 달려 있지는 않다고 한다. “악어 없으면 못 산다”는 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이 관계는 악어가 없어도 악어새는 살 수 있고(단지 악어 주변에 먹이를 얻는 경우가 있기 때문), 악어에게도 악어새가 있으면 편하다 정도로 보는 게 맞다고 한다.
한국 대학원에서,
교수와 박사 학생,
넓게는 석사 학생까지도,
내가 한국 석사와 박사과정에서 경험한, 지도 교수와 학생의 관계는 그러했다.
속사정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우선 겉에서 볼 땐 노골적으로 비틀어지고 썩어 문들어진 경우도 있었고, 은근하고 목을 죄여오는 경우도 있다. 나의 직접 경험 외에도 심리학 대학원에서 오랫동안 반복되고 또 반복되는, 변하지 않는 학생들의 경험은 차고도 넘치고 다양하다.
어떤 경우는 현대식 노예가 따로 없다고 할 만큼, 교수의 뒷바라지와 '학생이 왜 이런 것까지?'라는 생각이 강하게 치고 들어올 수밖에 없다. 한국 대학원은 절대 '공부만 할 수 없는' 뒤틀린 속박 공간이다.
한국이 유독 심할 수밖에 없는 객관적인 이유가 있다. 관계중심, 체면과 눈치가 깊게 뿌리내린 유교 문화이기 때문이다.
웃어른과 교육자를 공경해야 한다는 예의가 대학원에 들어오면서 더욱 짙어졌다. 그리고 교수, 즉 교육자에게 부여된 한국의 '예의'가 '권위적 숭배'가 된 지는 오래다. 교육자를 향하던 자발적 존경이, 지금은 의무적 희생이 되었다.
더불어, 개인의 가치보단 집단의 가치가 더욱 중요하게 여겨지고 가장 앞에 놓인다. 집단의 조화로움과 관례의 보존이 최우선 된다. 이를 위해서는 학습의 자유, 개인의 자유, 개인의 존엄성, 개인의 가치와 개별성은 밀리거나 짚 밟혀도 된다고 당연하게 여겨진다.
교수는 대학(원)이라는 기관에서 학생에게 절대 권력을 갖는다. 그중에서도 대학원은 그 권력이 가장 깊고 강하게 수직으로 내려 꽂히는 공간이다. 교수의 심기를 조금이라도 건들어서도 안되고, 그의 기분을 원하는 정도와 방식으로 맞추지 못해서도 안되며, 그의 취향을 섬세하게 읽지 못해서도 안되고, 그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그 내면의 것들도 읽어서 행동으로 보여줘야 하는, 그런 공간이다.
학습자의 개별성, 특별함은 중요하지 않다. 그저 교수의 취향에 맞춰져야지만, 비로소 안전함을 보장받는 곳이다. 이는 교수가 주의하고 노력한다고 바뀔 수 없다. 애초에 굳혀진 대학(원)이라는 구조 자체가 이를 수십 년간 보존할 수밖에 없이 만들었다. 교수가 절대 권력을 영원히 누리도록 만들었다. 지금도 여전히 세습되고 있다.
나의 석사 지도교수 S는, 은근하게 착취하는 경우에 속했다. 그의 말투만 들으면 사근사근했고, 그는 학생들과 소소한 일상 대화는 즐겨했다. 그래서, 가끔 주어지는 관심이나 긍정적 피드백은 교수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는 학생들에게 상당한 매력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그는 학생의 생활 처우, 예를 들어 먹고사는 기본적인 환경에 정말 무지했다. "대학원생이 왜 알바를 하죠?"라는 정말 모르겠다는 질문을 하곤 했는데, 그 의미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대학원을 다닐 만큼 재정이 불안정하다는 것을 이해 못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상담전공이 석사를 나오기 전에는 (석사를 졸업해도 처우가 열악한건 마찬가지지만) 얼마나 궁한 생활고에 시달리는지 전혀 관심 없는 태도에서 비롯되었다.
교육적인 측면에선, 그의 답변이나 지도 방식은 기본적으로 한 세월이 걸렸다. 읽고 씹히는 것은 기본 중에 기본이었다. 그리고 주어진 지도나 피드백도 일관적이지 않아서, 분명 며칠 몇 주 전에 줬던 자신의 피드백을 자문하는 경우가 흔했다. "왜 그 방향으로 연구를 결정했죠? 아~ 내가 그러라고 말했다고요??"
그러면서도, 학생의 무료 노동이 필요할 때는 실시간 소통이 가능했다. 피드백은 당연하지 않은 것이 된 지 오래였다. 하나의 답변을 받기 위해서는 몇 개의 과업을 수행해야 했다. 교수의 성취와 명성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것들이었다. 예를 들면, 수많은 번역 일, 교수의 연구 진행과 학회 운영을 위한 끊임없는 소모적인 일.
교수의 기분에 맞춰 연락을 주고받지 못하면 기약 없는 잠수를 인내해야 했다. 일관적이고 구체적인 연구 지도는 기대해서도 안 됐다. 학업을 유지하고 졸업하기 위한 행정 처리에 필요한 답변도 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끝이 보이지 않는 미궁에서 버틴 자만이 졸업이라는 신기루에 닿을 수 있었다.
나의 박사 지도교수 H는 달랐다. 적어도 인간적인 면에서는 그간 봐왔던 권위자, 교육자와 달랐다. 학생들의 처우에 관심을 두곤 했다. 학생들이 금전적 어려움을 겪는 것이라던가, 몇 년째 전해 내려오는 낡은 연구실 의자를 안타까워했다. 그런 면에서 이전에 겪어보지 못한 특이한 유형의 교수였다. 그는 학생들, 특히 석사 학생들에게 안부를 묻는 표현을 이따금씩 건네곤 했다. 기본적으로 그의 말투는 무관심하고 투박했다. 관심은 담겨있지 않은 건조한 표정과 뚝딱이는 제스처였는데, 그마저도 감사하다고 느낄 정도로 그 모습은 박사 학생인 나에게 낯설었다.
제일 장점으로 꼽는 건, 그는 답변이 즉각 오는 사람이었다. 카톡이든 이메일이든 빠를 때는 몇 분에서 몇 시간 내 확인하고 짧은 답변이라도 바로 반응이 왔다. 목놓아 교수의 답을 기다리면서 속을 태우는 고통은 안겨주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그는 학부 학생과 석사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동 대학원 출신이 아닌 나는 직접 보지 못했으나, 친해진 석사 학생들을 통해 전해 듣곤 했다. 학생 전부라고 말할 수 없었으나, 몇몇은 그의 골수팬을 자처하며 무한 긍정으로 따라다니곤 했다.
H의 태도는 기본적으로 겸손했다. 그래서 나 역시 처음엔 그 모습이 신선하게 다가왔고, 긍정적으로 여겨졌다. "교수가 저 정도로 자신을 내세우지 않을 수 있나?"라고 의아할 정도였다. 그것이 내가 H를 만났을 때 느낀 첫인상이었다.
그 인상은 정확히 H의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즉, 본격적인 연구 지도를 받기 시작하면서
악어새의 생존 자체는 악어에게 전적으로 달려 있지는 않다고 한다.
악어에게도 악어새가 있으면 편하다 정도로 보는 게 맞다고 한다.
어느 누구도 악어의 생존을 떠올리면서, 악어새를 떠올리지 않는다.
반대로 악어새의 생존을 떠올릴 땐, 날카롭고 위압감을 주는 악어의 입속에 들어가야만 한다고 여겨지는 악어새를 떠올린다.
하지만, 이 역시 환상이라는 것을 이제 우린 안다. 실제로 악어와 악어새의 관계는 없다. 하지만, 웃프게도 그 형상이 현실에는 존재한다. 기형적인 공생. 바로 교수와 학생이다.
교수에게 학생은 있으면 도움은 되지만, 교수의 부와 명예에 그리 필수적인 존재가 아니다. 있으면 부려먹기 좋고, 노동력을 착취하기 좋으나, 굳이 큰 책임을 지진 않아도 되는 존재이다. 여차 하면, 악어는 그냥 입을 닫으면 그만이다. 악어새는 차고 넘치니 말이다.
대학원 학생에게 교수는 어떨까? 행정적 절차에서 교수는 빠질 수 없다. 앞서 언급한 대로 대학(원)이라는 고등 학문기관에서는 수백 수십 년 동안 교육자에게 막대한 권력과 권한을 부여해오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학생은 그 권한에서, 그 권력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그럼 조금 비틀어서 생각해 보자. 만약 행정적 절차를 배제하고 순수하게 학문적이고 학구적인 관점에서 교수는 학생에게 어떤 존재인가?
이 역시 100% 완전히 배제하고 평가할 수 없지만, 극과 극이라고 생각한다. 개인 역량이 출중하고, 거기다가 가르치는 능력까지 갖춘 희귀한 인재라면, 그 교수는 학생에게 의미 있는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기본을 갖추고도 남는다.
더불어, 학생의 학습과 이를 통한 성장까지 고려하는 교수라면? 자연스럽게 존재만으로도 학생에게 깊고 넓은 영향력을 끼치는 교육자일 것이다. 그런 영향은 학생에게만 머물지 않는다. 그가 속한 학계와 분야에 그 자체로 가치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존재는 이상에만 존재한다.
앞서 언급한 역량과 인성을 갖춘 교육자,
하지만 그런 교수가 아니라면?
무력하고도 영향력 없는, 그저 대학 기관의 한 구성원일 뿐이다. 그들은 학습자에게 어떠한 영감이나 귀감을 줄 수 없다. 상담 역량이 출중하다면, 적어도 능력 있는 치료자일 것이고, 연구 역량이 출중하다면 적어도 유능한 연구자일 것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애매하거나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면? 학생입장에선 그런 교육자는 어떠한 영향력도 없는 교원이다. 그저 대학에서 부여받은 권한만 잔뜩 가지고 부리는, 고립된 무력자일뿐이다.
학문적 소양과 전문성을 쌓기 위해 대학원에 들어온 학습자에게, 그런 교수들은 어떤한 도움도 주지 못한다. 악어새에게 악어가 생존에 필수가 아닌 것처럼, 실은 그런 교육자는 학습자에게 오히려 독이 되면 되었지, 득이 될 것은 없다.
진정한 교육, 학습자의 성장에 관심이 없는 교수.
학습자의 동기와 노력은 무시하고, 본인이 원하는 것만 주입하고 통제하는,
학습자를 원하고 필요할 때 쉽게 부리는 무한 노동력으로 보는.
그건 교육자가 아니다.
박사 학생에게 필요한 건, 특히 연구 역량과 전문성을 향상하고자 막대한 돈과 시간을 들여 대학원에 들어온, 학문과 실천에 진심인 학생에게 필요한 건, 복지사가 아니다. 그랬으면 복지센터에 들어갔을 것이다.
박사 학생에게 필요한 건, 학문적으로 영감을 주고, 학습 동기를 일깨워주는, 나아갈 시야를 넓어줄 수 있는 교육자다. 단순히 수업을 채워 넣는 사람이 아니라, 새로운 연구 질문을 던져 주고, 기존의 이론을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게 하며, 현장의 문제를 학문적으로 연결하는 다리를 놓아주는 사람이다. 학계의 흐름을 짚어주어 학생이 ‘내 연구가 왜 필요한가’를 스스로 느낄 수 있도록 이끄는 사람이다. 그런 교육자다.
자신에게 의존하고 복종하게 만들어서, 원하는 대로 주무르는 꼭두각시를 만들어내는 것은 교수의 역할이 아니다. 의존적인 학생이라면, 그 안에 아직 깨어나지 않은 주도성을 일깨워 줘야 할 것이다. 아직 모르고 연습할 과정이 필요한 학생이라면, 안전하게 경험하고 습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할 것이다. 학생이 추구하는 목표에 진심으로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며, 그들이 놓치고 있는 것이 있다면 학생의 입장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교육이자, 교육자의 모습이 아닐까.
한국 심리학 대학원의 교수들은 왜, 도대체 왜
그런 모습을 갖추지 못하는 걸까.
어디서부터 뒤틀린 걸까.
나는 지금껏 권력을 부리기만 하는,
교육자가 아닌, 영향력 없는 무력자를 수도 없이 보고 겪었다.
... 나의 박사 과정 역시, 여기서 한치도 빗나가지 않았다.
...to be continue.
*이 글에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가명이며, 사용된 이니셜 또한 실명을 기반으로 하지 않습니다. 특정 인물을 지목하거나 폄하하려는 의도는 없습니다. 본 글은 개인적 경험을 토대로 한 구조적 성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