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님, 저는 그만두겠습니다"

14_아닌 건 아니라고 말하고 행동할, 주체성과 단호함.

by 로지

"교수님, 저는 그만두겠습니다"

14_아닌 건 아니라고 말하고 행동할, 주체성과 단호함. 행동할, 주체성과 단호함.




pexels-ron-lach-10132817.jpg



알맹이가 없는 껍질은 더욱 비틀어질 수밖에 없다.
비틀어진 껍질은, 결국 본래 모습마저 잃고 썩어간다.





배울 것도, 가치도 없는 곳에서

떠날 결심을 하다.




본래 교육이라 하면, 교육자는 가르치고자 하는 목표와 방향이 분명히 알고 실천해야 하며, 학습자의 수준과 상태를 면밀하게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만의 철학과 전문성으로 학습자가 자신만의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조력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기본이다.


특히 심리치료에서 교육이란, "치료자로서의 역량을 개발하기 위해 경험적 학습, 지식의 내면화, 그리고 자기 인식의 확장을 촉진하는 의도적이고 상호작용적인 과정이다." (Skovholt & Rønnestad, 1992; Orlinsky & Rønnestad, 2005)




한국의 심리학, 교육학 대학원.

한국의 교수, 슈퍼바이저, 교육자.


심리치료를 가르치고 있는 수많은 교육 장면에서,

우리는 과연 진정한 '교육'을 경험하고 있는가?



pexels-pixabay-247839.jpg



시간이 흘러, 지도교수 H가 수주한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한 지 몇 달이 지났을 때였다. 그동안에 여러 일이 있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정말 덧없는 나날들이었다. 여전히 떠올려보면, 과연 내가 얻은 것이 있을까? 있다면, 무엇일까? 그것들이 조금의 도움이라도 되었을까?라는 질문 뒤엔, 확실한 답이 따라온다.



"어떠한 배움도, 의미도 없었다."



이 대답엔 일말에 망설임이 없다. 아무리 평정심을 가지고 떠올려봐도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 박사 학생으로서, 연구자로서, 치료자로서 의미 있었던 경험이 없었다. 실제로 그랬다.


그래서 이 허탈함의 자국은 여전히 선명한 걸까.


그나마 경험한 것이 있다면, '아닌 것은 아니라고,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고 행동으로 옮겼다는 나만의 경험'이다. 어떤 박사학생이 지도교수가 제안하고 주관하는 연구 프로젝트에 "그만두겠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있다 해도 해도 된다 해도 실천하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소소한 기억:

교수 H가 연구과제로 따온 주제는 융합이었다. 아무래도 사회과학, 그것도 심리학, 상담심리학과에서 연구 프로젝트가 진행된다는 것 자체가 신기한 일이었다. 상담전공 학생 입장에선 신기한 일이었다. 연구비를 받으면서 연구를 수행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심리학과 연구실에서 진행되는 많은 연구들이 연구비가 없다시피 진행된다. 교수나 학생의 사비로 진행이 되는 경우가 태반이다. 지원금이 아예 없기에 학생들은 열정 페이로 참여한다. 그렇기 때문에 H가 시도한 여러 연구 지원이 진행된다는 것 자체가 교수에게나 학생에게나 긍정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역시나 그 주제를 보면 아무래도 심리치료 실무에 연결되는 주제가 당연히 아니었다. 웰빙, 공감, 교육 등 포괄적인 주제에 VR 등 기술이 접목된 융합 주제였다. 딱 외부에서 있어 보이고 결과를 제시하기에 상대적으로 수월한 그런 주제였다.

여기엔 교내 정치도 같이 맞물리는 게 보였다. 같은 학과/전공에 있는 원로교수 C 입장에게는 학과 차원엔 좋은 일이나 개인적으론 본인이 비교가 될 터이니 경계가 되는 일임엔 틀림없었다. 체면과 위계를 중시하는 C에겐 자신보다 한참 뒤에 임용된 H의 행보가 신경이 쓰였을 것이다. 이런 쓸모도 없고, 알고도 싶지 않은 학과 내 정치는 어쩔 수 없이 느껴지곤 했다. 교수들은 티가 안 날거라 생각하겠지만, 본인들이 모를 수 있게 노력하지도 않는 일을 어떻게 학생들이 모르겠는가. 교수들의 체면싸움, 입지경쟁인 볼 때마다 거북했다. 그들이 만드는 위계적인 분위기의 피해자는 언제나 학생이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학업에 열중해도 부족한 환경에서, 한참 나이도 많고, 경력도 많은 교수들이 밥그릇 경쟁을 하면서 아닌 척 체면을 챙기면서도 학생들이 알아주길 바라며 티를 내는 그 역설적인 광경은 보는 사람이 더 부끄러웠다.

그렇게 H는 그 당시 2개 이상의 연구 프로젝트를 수주했고, 거기에 H의 학생들은 전부, C의 학생들 중 일부가 참여하게 된다. 그렇게 3~4개의 팀이 꾸려졌고, 각 팀마다 고유한 연구를 진행하면서 학술지 게재를 목표로 진행이 되었다. 이때부터였다. 학생들의 교육에는 관심 없는 교수, 연구에는 관심 없는 학생들로 구성된, 위계만 있고 체계는 없는 심리학 연구실의 민낯이 드러나게 된 것이.

각 팀에는 박사와 석사 학생들이 배정되었고, 나 역시 그중에 한 팀을 맡게 되었다. 다른 팀에는 다른 박사들이 들어가 있었는데, 얘길 들어보면 석사 학생들에게 상당히 많은 일을 시키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는 전체 미팅에는 석사들이 해온 내용을 교수에게 본인이 한 것처럼 발표하는 그 모습이 더 이상 놀랍지 않았다. 나는 그때도 여전히 목말랐다. 제대로 심리치료 연구를 위한 역량을 키우고 싶었다. 누가 대신해 줄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많은 부분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적극 도맡았다.

그 당시 나의 팀엔 나(상담전공 박사과정)를 포함해서, 상담전공 석사과정 1명, 인지심리학 박사과정 1명, 석사과정 1명, 이렇게 총 4명이었다. 우리는 매주 또는 격주로 회의를 가졌는데 모일 때마다, 인지심리학 박사과정생과 너무 대화가 안 됐다. 말도 어눌해서 뭐라고 하는지 잘 들리지도 않았고, '알았다'고는 하는데 실제로 해오는 결과물을 보면 참담했다. 그들은 프로젝트 자체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다.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긴 했을까.

오히려 그냥 다 내가 하는 게 속편 할 수준이었다. 거기에 최악은, 인지전공 박사생이 말하면 옆에서 어쩔 줄 몰라하며 기합만 잔뜩 들어간 인지전공 석사생이었다. 그는 박사생 대신 답을 하거나 "옙!! 그건 제가 처리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곤 했다. '저 박사생은 입이 없나, 손이 없나..? 왜 다른 사람이 자신의 의견을 대신 수발을 들어야 하지?' 나는 그들을 보며, 정말 인지심리 연구실은 소문대로 위계적이고 곪을 대로 곪았구나 싶었다.

문제는 그들뿐이 아니었다. 나와 같은 전공인 석사 학생은 연구에 '연'자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안내를 해야 했고, 심지어 한번 알려준 것도 주체적으로 고민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가장 최악은 "파일 열어보면 다 나와있어요. 보면 알 거예요. 혹시 모르면 말해요~~"라고 성의 없는 지시만 내리고 무관심한 교수 H였다. 그리고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10여 명의 심리학 학생들은 항상 대답은 "네~"라고 잘만 하고, 뒤돌아서 팀끼리 있을 때면 "저희 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ㅠㅠ"라며 수동적으로 굴며 칭얼댔다.

애초에 상담 전공생들은 연구에 관심이 없고, 졸업장을 위한 조건으로만 여기기에, 연구 경험이 전무한건 물론이고 스스로 찾아서 뭔가를 해보려는 태도가 없었다. 그저 교수 H의 지시대로 샘플 파일의 내용을 글자만 바꿔서 복사 붙여 넣기 수준으로 해오는 경우가 허다했다. 왜 이 과정이 있는지, 왜 이 부분을 수행해야 하는지, 이것이 본 연구에 어떤 부분인지 이해가 없었다.

그리고 역시 교수 H는 그 결과물을 가져가서, 자신이 모두 다 수정해서 완전 다른 결과물을 가져오곤 했다. 학생들에게 어떠한 피드백도, 상세한 지시도, 교육을 위한 지침도 없었다. 때때로 H 역시 본인의 여력이 안될 때는 별로인 결과물을 그대로 통과시키곤 했다. 이는 주먹구구식 연구로 이어지고, 이후에 IRB 등 관련 이슈들이 터지게 되었다. 항상 뭔가가 터지면 그제야 급급하게 대처하는 게 전부였다. 이는 예견된 일이었다. 목적도, 방향도, 체계도 없는 교육자와 연구실이 끌어안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pexels-didsss-2675047.jpg



누군가는 그렇게 말할 수 있겠다.

겉으로 볼 때는 멀쩡해 보일 수 있겠다.

멀리서 보면 연구 경험과 역량이 쌓여간다고 포장될 수도 있겠다.



실제로 이때 참여했던 학생들 중, 프로젝트 참여 명단에 이름만 있으면 매달 몇 십만 원씩 돈이 나오니 그걸로 만족하고 미화하는 경우도 꽤 있었다. "그래도 이런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게 어디겠어?" "교수님께 감사해!"


하지만 돌이켜보면 학생들의 피드백엔 "정말 의미 있는 것을 배웠어. 정말 많이 성장했어"라는 말은 어디에도 없었다. 오히려 "이 주제로 연구가 진행되는 것이 맞을까? 주제와 방향 자체가 좀 납득이 안 가는데.."라는 피드백은 종종 들렸다.





교육과 학습이 가능하려면, 교육자뿐 아니라 학습자도 태도가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실제로 나의 박사과정 5년 동안, 봤던 석사 및 박사 과정 학생들(약 50~70명) 중에 연구와 임상 실무에 진중한 태도로 학습하는 사람은 한 손에 꼽는다. 약 4% 수준이다.



동기도 생각도 없는 학습자와 무관심하고 형식적인 결과중심 교육자가 함께 만든 결과. 그 결과가 열악할 거라는 건 이미 정해져 있는 사실이었다. 속은 곪고 진물과 고름으로 가득했다. 누구 하나 해당 연구를 하면서 연구 역량, 상담 실무 능력이 쌓였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인지부조화는 진작에 왔고, 총괄 지도자인 교수가, 어떤 부분을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 어떻게 진척되어가고 있을지를 짚어줘야 하는데, H는 언제나처럼 전체적인 틀만 주고 "보면 알 거예요. 그렇죠? 혹시 모르면 물어보세요"식이었다. 그리고 그저 형식과 결과만 중시했다. 정해진 기한까지 뭐라도 나오면 H는 별말 없이 넘어갔다. 배움도 학습도 없었다.


이런 환경에선 학생들의 역량이 늘래야 늘 수가 없다. 심리학, 거기서도 상담심리학 전공 학생들은 애초에 연구에 대한 동기가 매우 낮다. 어떤 학생도 자신의 연구도 아니었기에, 관심도 없는 주제에, 돈은 준다고 하니 참여했다. 그러니 그냥 하라는 것만 잘 따르고 돈만 받고 졸업만 하면 된 거지라는 식이었다.


이는 H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나에게 사석에서 진지하게 말했을 정도였다.


진정으로 학생들을 위하는 교육자라면 H는 달라야 했다. 연구 프로젝트가 학생들의 주머니만 채워주는 게 아니라, 머리와 가슴도 채워줄 수 있도록 노력했어야 했다. 실천했어야 했다.





고민을 많이 했다. 나 역시 쉽지 않았다.

교수와 학생의 위계가 공고한, 한국의 대학원.

지도교수의 연구에서 나오겠다는 말을 하는 것이.



지도교수 H가 항상 달고 다니는 말이 있었다. "싫으면 말해요. 안 해도 돼요." 그는 항상 이 말을 매번 뭔가를 제안할 때마다 덧붙이곤 했다. 항상 했던 말이기에 정말 믿었다. 솔직하게 표현해도 된다고, 그럼에도 그로 인한 부수적인 차별이나 피해는 없을 것이라고.


실제로 석사 학생들에겐 최대한 편의를 봐주고, 그들의 사정을 살피는 교수였고, 학생들이 자신의 의견을 내면 적극 듣고 들어주려는 모습을 보곤 했다. 그래서 나도 그때는 그의 그 말을 진심이고, 학생의 의견을 자신의 기분과 별개로 존중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간 고민했던 마음을 안고, 비장한 마음으로 H에게 메일을 보냈다. 메일에 담은 내용은 그랬다.


"교수님, 제가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한 가장 큰 이유는 뭔가를 배우고 싶고, 여전히 성장하고 싶어서입니다. 더불어 교수님의 연구이기도 하기에 참여함으로써 힘을 보태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본 연구 과제에 참여하는 동안에 지금보다는 더 자세하고 다양한 것을 제대로 배우고 싶습니다. 교수님은 항상 모르는 것이 있으면 물어보시라고 말하시지만, 학생 입장에선 무엇을 질문해야 할지 조차 몰라서 질문을 못할 때가 많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마음도 매우 조심스럽습니다. 하지만 꼭 말씀드리고 싶은 부분이라 이렇게 어렵게 말씀드립니다. 그렇기에 가능하다면, 교수님께서 조금 더 자세한 가이드를 주신다면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메일을 보내놓고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모른다. 이때 교수는 답장이 바로 오진 않았다. 보통 그의 패턴대로라면 답장은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며칠 뒤 답장이 왔다.


"지금 순서대로 일을 처리하고 있습니다. 피드백도 그에 맞춰서 줄 예정입니다. 그리고 저(교수)를 위해 참여하는 것이라면 그러지 마세요. 그만두어도 됩니다."






교수의 답장을 받은 심정은 참담했다. 뭔가 거대한 벽을 바라보고 말하는 느낌이었다. 아마 그도 생각한 바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전해지지 않았으니 나는 앞으로도 알 수는 없을 것이다.


내가 받은 느낌은 "내 방식을 따를 수 없고, 네가 싫으면 그만둬. 나는 나대로하고 있는데 그게 마음에 안 들면 네가 그만두면 돼"였다. 학생 입장에서 조금 더 자세히 배우고 싶다는 마음이 가장 컸던 것임에도, 가장 그 영향력이 큰, 지도교수는 정작 방어적이고, 형식적인 답변으로 대응했다.


학생으로서 교육자에게 필요한 부분을 요청했음에도, 교육자는 자신이 하고 있는 업무 순서에 대해서만 알려주었을 뿐, 학생이 어려워하거나 필요로 하는 부분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교수는 왜 자신이 그렇게 하고 있는지 설명하거나, 학생 입장에서 아쉬운 부분을 이해해 보려는 시도 따윈 없었다.


오히려 형식으로 회피하고 모른척하는 그의 방어적인 태도에 크게 실망했다. 그 역시 사람이었겠지, 자신의 취약점을 건드려진 거구나. 그러니 저런 반응이겠구나. 모든 교육자가 인성적으로 성숙할 순 없는 것이겠지. 그게 내가 느낀 점이었다.


그 이후에 그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연구 진행에 필요한 파일의 형식을 수정한 피드백이 담긴 문서를 보내주었다. 나는 그것을 교수의 답으로 받아들였다.



교수는 정작 방어적이고, 형식적인 답변으로 대응했다.
거기에는 더 이상 교육자는 없었다.




나는 결정을 내려야 했고, 선택했다. 이 대학원에선 나 말고 나의 학습과 성장에 관심과 열의를 다할 사람은 없었다. 그렇다면 나라도 나를 지켜내야 했다. 내가 필요로 하는 배움과 성장을 찾아 나서야 했다.



"교수님, 저는 연구 프로젝트를 그만두겠습니다.

그리고 제 박사 졸업 연구에 정진하도록 하겠습니다."



pexels-astreyas-photo-9944449.jpg


...to be continue.


*이 글에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가명이며, 사용된 이니셜 또한 실명을 기반으로 하지 않습니다. 특정 인물을 지목하거나 폄하하려는 의도는 없습니다. 본 글은 개인적 경험을 토대로 한 구조적 성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