줌인 - 인터뷰에서 친구가 바라본 자신
2015년, 내가 교환학생을 가서 만났던 지안무가는 누구보다도 개성이 뚜렷한 친구였다. 그의 뛰어난 신체능력과 언어능력은 언제나 그를 무리에서 돋보이게 했다. 유쾌하고도 장난끼 많은 아이였다. 그는 미국 국적의 학생이었지만 한국과 관련된 사회 활동에 많이 소속되어 있었다. 한국학생회에선 회원들을 모아두고 학교 체육관에서 춤연습을 진두지휘했고, 한국교회에선 한국어를 섞어가며 말재간을 부리는 재미난 친구였다. 그의 어린 시절을 들여다보았다.
너의 어린 시절은 어땠어? 지금처럼 개구쟁이였어?
글쎄… 친구들이 보기에 난 학급의 어릿광대(class clown) 같은 타입은 아니었을 거야. 그렇다고 지루한 애도 아니었고. 행동이 먼저고 생각은 나중에 따라가는 스타일이라 종종 말썽을 부리곤 했는데, 그렇다고 문제아는 아니었어. 그냥 평범한 아이였지.
문제를 치긴 했다는 거네 (웃음). 교장실(principal office)에 불려가 본 적 있어?
응, 있지. 누구나 한 번쯤은 가지 않나?
왜 불려갔는데?
아마 말 때문이었을 거야. 내가 좀 날카롭게 대꾸하거나 짖궂은 말을 자주 했거든.
너 원래 새침하게(sassy) 말하곤 하잖아. 말장난도 많이 하고. 네가 그렇게 언어 능력이 뛰어난 건 어릴 때부터였던 거야?
엄마가 자주 얘기해 주시는 게 있어. 내가 유치원 다닐 때 교장 선생님이 엄마한테 그랬대. 또래보다 똑똑하긴 한데, 그만큼 다루기 힘든 아이라고. 보통 유치원 바닥에 알파벳이나 단어가 적힌 매트를 깔아두잖아? 애들은 그냥 앉아 놀기만 하지, 글자를 읽진 않는데, 나는 거기 적힌 “cat”, “dog” 같은 단어를 보면서 스스로 읽고 연결시켰대. 엄마는 내가 한국어를 빨리 익힌 것도 그 기억과 연결해서, “넌 그때부터 언어에 재능이 있었어”라고 말하시지.
다른 언어도 할 줄 알아?
대학 때까진 스페인어 조금 한다고 했을 텐데, 지금은 한국어에 집중하느라 거의 잊어버렸어. 단어를 보면 대충 의미를 짐작할 순 있지만, 이제 ‘나 스페인어 할 줄 알아’라고는 못 해.
그런데 언어를 잘하는 네가 왜 하필 한국어를 택한 거야?
고등학교 때 외국어 선택 과목이 스페인어나 독일어뿐이었어. 난 스페인어를 했는데, 배우다 보니 영어랑 너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냥 영어를 살짝 암호화한 느낌? 진짜 외국어를 배우는 기분이 덜했어. 그래서 ‘완전히 다른 언어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지. 그러다 한국어를 선택했어. 한국어는 단어 순서부터 영어랑 완전히 달라서, 같은 문장을 읽어도 전혀 새로운 세계에 들어온 기분이었어.
그 시절엔 한국 문화가 지금처럼 유명하지도 않았잖아. 혹시 한국인 친구가 있었어? 왜 하필 한국어였어? 일본어나 중국어, 아랍어처럼 구조가 다른 언어도 있잖아.
내가 작은 도시, 뉴멕시코에 살았잖아. 선택지가 많지 않았어. 한국어가 우연히도 먼저 눈길이 간 언어였어. 그리고 한글은 혼자 시작하기에도 부담이 적어서 쉽게 다가갈 수 있었어. 한글은 알파벳 체계라 접근하기 편했거든. 만약 일본어나 중국어를 시작했으면, 한자가 너무 많아서 혼자 소화하기 힘들었을 거야. 그랬으면 그냥 스페인어에 머물렀을지도 몰라. 근데 한국어는 접근성이 좋아서, 시도할 수 있었고 점점 빠져들었지. 고등학교 때 대학 입시 준비하면서도 틈틈이 취미처럼 공부할 수 있었어.
대학도 원래 희망 전공은 회계였는데, 언어를 하나 더 하고 싶었어. 그래서 한국어 수업이 있는 대학을 찾다가 베일러대를 선택했어. 만약 베일러에 한국어 수업이 없었다면, 아마 그 학교엔 가지 않았을 거야.
와, 그러면 너의 한국어와의 인연은 이미 고등학교 때 시작된 거네? 난 너가 대학 들어가서, 단순히 케이팝이 유행하니까 한국학생회(Korean Student Association)에 들어가고, 그러다 한국어 배운 줄 알았어.
아니야. 베일러에 한국어 수업이 몇 개밖에 없었지만 있었고, 교환학생 프로그램이 연세대랑 연결돼 있었어. 그걸 보고 “그래, 이거다” 싶었지. 수업 몇 개 듣고, 교환학생으로 한국 가는 게 내 목표였어. 그게 가장 빠른 길이라고 생각했거든.
그랬구나, 너는 어렸을 적에 체조도 했잖아. 그 이야기도 궁금해.
그건 아주 어릴 때부터였어. 엄마가 나를 체조 교실에 보냈는데, 본격적으로 대회 나가는 팀이 아니라 그냥 몸을 움직이는 정도였지. 그때는 델라웨어에 살 때였어. 사진도 있어. 철봉 위에 서 있고, 옆에서 선생님이 잡아주고 있는 모습. 그러다 여섯 살쯤 뉴멕시코로 이사했는데, 그때는 내가 이제 좀 더 또렷하게 ‘체조장에 간다’는 걸 인식할 나이였지.
초등학교 2학년 때였어. 학교에서 야구팀 같은 운동부를 모집하고 있었지. 엄마는 또래 친구들이 많이 등록한 야구팀에 보낼까 고민하셨어. 그런데 이걸 어쩐담? 내가 자꾸 소파에서 공중제비를 도는 거야. 그럴 바엔 안전 장비를 갖추고 공중제비를 도는 것이 낫잖아? 그래서 엄마는 나를 야구팀 대신 체조팀에 보냈어. 그때는 체조를 하는 남자애들이 없었어. 남자 체조 기구들은 구석에 먼지 쌓여서 방치돼 있었지. 체육관엔 여자애들뿐이었어. 그래서 나는 여자 종목만 했어. 마루, 도마, 평균대, 이단평행봉. 대회도 나갔는데, 어떤 부모들은 남자인 내가 여자 종목에 출전하는 걸 불편해했어. 근데 난 그냥 ‘체조는 체조지’ 하고 즐겼지.
아이들은 남녀 체격 차이도 크지 않으니까 괜찮았을 텐데.
맞아. 나도 몰랐어. 그냥 체조가 다 그런 줄 알았어. 그러다 사춘기쯤 되니까 제대로 남자 체조를 해야겠다고 해서, 우리 동네엔 그런 체육관이 없으니까 차 타고 다른 도시까지 다녔지. 일주일에 세 번씩. 그렇게 본격적으로 시작했어.
그러면 체조를 얼마나 오래 한 거야?
초등학교 2학년 때 시작해서 고등학교 때까지 했으니까 대략 8년 했어. 4학년 때부터는 남자 종목으로 진지하게 대회도 나갔고, 한 6년 정도는 선수로 뛴 거지.
잘했어?
꽤 잘했어. 코치들이 그러더라. 여자 종목 위주로 기초를 쌓다 보니까, 다른 남자애들보다 기술적으로 단단했다고. 힘은 좀 약했지만 마루랑 도마는 특히 잘했어. 고등학교 1학년일 때까지는 대회도 계속 나갔어.
트랙 레코드에 대해 자랑 좀 해봐,
정확한 기록이나 숫자는 세지 않았어. 그렇지만 금메달도 많이 땄어. 종목별 메달도 있고, 종합 메달도 있거든. 근데 순위보다는 기억에 남는 게 있어. 내가 다니던 체육관이랑 가까운 자매 체육관에서 매년 대회를 열었는데, 정식 종목 끝나고 나면 항상 특별 이벤트로 ‘핸드스탠드 대회’를 했어. 누가 손을 대고 오래 버티나 보는 건데 어느 해에는 내가 제일 오래 버텨서 1등을 했어. 그때 내가 너무 안정적으로 버티니까, 사회자가 더 어려운 동작들을 시켜본 거야. 두 손으로 서 있다가 다리 벌리고, 나중에는 한 손으로도 해보고. 아예 서커스처럼 기술을 시도하게 했지. 그때가 정말 짜릿했어. 금메달 따는 것보다 훨씬 더 기억에 남아.
너무 자랑스러운 순간인데?
그런데 나는 일상생활에 괴리가 있었어. 체조 친구들은 학교에서 같이 지내지 않았고, 학교 친구들은 체조에 대해 전혀 몰랐어. 게다가 우리 도시에서는 체조를 인정해주지도 않았어. 주말에 대회에서 상을 타도, 월요일에 학교 가면 “체조해? 게이 아냐?” 이런 말을 듣는 거야. 그래서 1등 했다는 사실이 크게 자부심으로 이어지진 않았어. 내가 잘했다는 건 알지만, 양가 감정이 남는기억이야.
네가 게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내가 글에 그대로 써도 괜찮아? 아웃팅 위험이 있어서. 아니면 좀 다른 표현으로 바꿀까?
그대로 써도 돼. 왜냐면 그 시절 내가 받았던 놀림이나 차별의 핵심 단어가 바로 ‘게이’였거든. 그걸 빼면 맥락이 안 살아. 나 이미 커밍아웃을 해서 괜찮아.
알겠어, 그러면 체조는 어떻게 그만두게 된 거야?
체조는 나이에 민감한 스포츠라 오래 못 해. 나는 이미 주 3번씩 왕복 세 시간 거리를 다니며 훈련했어. 차 안에서 숙제하고 밥 먹고… 그런 생활을 하다 보니 결국 고등학교 2학년 때 엄마에게 말했어. “나 이제 체조 안 할래. 그냥 평범해지고 싶어.” 그래서 접었지.
학교 생활과 행진 밴드(marching band) 활동에 집중했어. 그런데 우리 동네에 ‘쇼타임’이라는 치어리딩팀이 있었거든. 코치가 사실 내가 어릴 때부터 날 눈여겨봤대. 체조할 때 보고 “얘 우리 팀 오면 좋겠다” 생각했대. 스카우트된 셈이지. 근데 나는 이미 말투나 행동 때문에 “게이 같다”는 소리로 많이 괴롭힘을 받고 있었거든. 만약 치어리딩까지 했으면 더 심했을 거야. 그래서 체조를 접고 1년쯤은 아무것도 안했어. 그러다 그 팀이 나중에 댄스팀으로 바뀌었어. 코치가 다시 권유했을 때엔 응했지. 춤은 치어리딩보다 덜 게이 같아 보였거든. 그래서 좀 더 편했어.
그렇게 체조에서 춤으로 관심사가 넘어간 거구나.
맞아. 체조에서 쌓은 기술을 춤에 녹여내니까, 애들이 처음으로 “와, 멋있다”라고 해줬거든. 고등학교 때 날 구원해 준 게 바로 춤이었어.
그때 내가 당하던 괴롭힘은 항상 “게이 같다”는 말 때문이었어. 체조로는 그걸 바꿀 수 없었어. 아무리 대회에서 잘해도, 학교로 돌아오면 애들이 보는 건 내 말투와 행동이었거든. 그런데 춤은 달랐어. 댄스팀 공연은 또래 친구들 앞에서 했으니까. 농구 경기 하프타임 같은 데서. 그때 내가 기술을 보여주자 애들이 갑자기 “어? 쟤 멋있는데?”라는 반응을 한 거야.
그게 건강한 결론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고등학교 때의 나는 춤이 날 살려줬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대학 가서도 그 마음을 이어갔던 것 같아.
그래서 대학 들어가서 한국학생회 회원들에게 춤을 가르치게 된 거야?
응, 그때 한창 한국학생회 회원을 모집하던 차였거든. 나한테 춤은 환영받는 느낌을 준 경험이었어. 그러니까 나도 춤으로 사람들을 환영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그리고 K팝이라는 매개가 있으니까, 자연스럽게 춤과 한국이란 소재를 연결시킬 수 있었지. 난 음악 편집도 할 줄 아니까 더 수월했고.
처음 한국학생회에서 선보인 곡은 뭐였어?
학교 아시아 축제에서 처음 무대를 올렸어. 빅뱅 노래랑 신인 그룹 노래를 섞은 믹스였어. 2분 조금 넘는 길이였는데, 끝나고 사람들이 “조금 더 길었으면 좋았겠다”라고 했던 기억이 나. 그때 10명이 같이 춤췄는데, 절반은 한국학생회 임원들이었어. 규모가 작아서 다들 필수로 참여해야 했거든.
반응은 어땠어?
너무 좋았어. 사실 그게 고등학교 때랑 똑같은 상황이었어. 원래 한국학생회는 평판이 별로였거든. “우리 학교에 한국학생회가 있어?” 이런 반응이 대부분이었어. 근데 공연을 하고 나니까, 학생들이랑 교수님들이 직접 찾아와서 “이게 뭐야? 너무 좋은데?”라고 한 거야. 다음 모임에는 교수님들까지 와서 “한국학생회가 뭐냐, 우리가 어떻게 도울 수 있냐”라고 물어봤어.
와, 거의 한국학생회의 구세주네.
(웃음) 나 혼자 한 건 아니고, 임원들이 다 같이 열정적으로 움직였어. 그 해 회장이 나를 신임해준 것도 컸어. 사실 한국인 당사자가 아니면 코리아부(Korea boo)라고 의심을 받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거든. 근데 다행히 내 열정을 진짜라고 받아들여 준 것 같아. 덕분에 내가 하고 싶었던 걸 쉽게 실행할 수 있었어.
그렇게 한국학생회가 점점 성장한 거구나.
응, 내가 처음 시작했을 땐 댄스팀이 10명, 2년 차에는 15명, 3년 차엔 30명 정도 됐어. 당연히 댄스가 한국학생회 활동의 전부는 아니지만, 최소한 “K-POP 댄스팀을 하고 싶다 → 한국학생회에 가입해야 한다”라는 연결고리는 만들어졌지.
맞다, 네가 그렇게 댄스팀 친구들을 데리고 뮤직비디오를 찍어서 페이스북에 올렸던 것도 기억나. 그때 어떤 마음으로 찍은 거야?
그게 아마 연세대 교환학생 다녀온 뒤였을 거야. 졸업 앞두고 “앞으로 뭘 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때였거든. 봄 학기엔 원래 활동이 거의 없는데, 내가 이메일을 보내서 “뮤직비디오 한번 찍어볼까 하는데, 같이 할래?” 하니까 다들 오케이 했어.
사실 내 마음속에선 파일럿 프로젝트 같은 거였어. 한국에서 느낀 걸 여기서 시도해보고 싶었거든. 한국어에 대한 관심과 춤에 대한 애착을 벤다이어그램처럼 교집합으로 보고 뭔가 만들어보자 싶었어. 내 기획력을 시험해보고 싶기도 했고. 그래서 카메라 있는 친구의 친구를 섭외하고, 댄스팀 스케줄 맞추고, 장소 정하고, 카메라맨과 콘셉트랑 앵글 논의하고, 같이 편집까지 했어. 그걸 한국학생회 연말 갈라에서 상영했지. 그때는 네가 베일러에 없을 때였을 거야.
인터뷰를 하면서 놀란 건, 지금의 지안무가를 만든 경험들이 생각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연속적으로 이어져 왔다는 사실이었다. 그의 꿈, 춤에 대한 열정. 그 시작이 어린 시절 게이스럽다는 이유로 겪었던 차별 속에 있었다는 것을 누가 상상했겠는가. 그때 지안무가를 괴롭히던 이들은 알까? 그들의 괴롭힘이 오히려 그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외면받았던 경험과, 이후 환영받았던 경험을 모두 품은 그는 이제 다른 이들을 환영하는 사람이 되었다. 지안무가는 그렇게도 단단하고 따뜻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