줌인 - 인터뷰에서 친구가 바라본 자신
이전 글에서 ‘반성’을 이야기했었다. 나부터 반성하고 싶다. 이 글은 시선을 조금 옮겨 지안무가와 나, 우리에 관한 이야기다. 어쩌면 결국 나 자신에 대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지안무가는 내 무지를 끊임없이 일깨워주는 사람이다. 한강에서 어느 날, 우리 대화가 격해진 적이 있었다. 지안무가가 인종주의와 관련된 경험을 털어놓았는데, 나는 낯설다는 이유로 질문을 이어갔던 것이다. 그 과정은 지안무가에게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자신이 겪는 차별적인 상황을 이해시키고 증명하고 해명해야 하니까. 나는 여전히 무지하다. 아마 계속 그럴 것이다. 그렇기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대화하고, 배우고, 돌아보고, 반성하며, 고쳐 나가는 것뿐이다.
혹시 나에 대해서도, 일종의 배신감을 느낀 적이 있었어?
개인적으로 너에게 배신감을 느꼈다고는 말 못하겠어.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라 그냥 한국 사회 전체가 다 그렇다는 거야. 나는 8년 동안 한국 친구들에게 그런 실망을 꽤 많이 느꼈어. 물론 여전히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하고, 필요하다면 사실관계는 바로잡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가 날 실망시켰다”라는 식의 엄청난 원망을 품는 건 아니야. 나는 네가 어떤 맥락에서 그렇게 말했는지 알아. 왜 그렇게 말해도 된다고 생각했는지도 이해해. 하지만 내가 여기서 말해주고 싶은 건, 그 말은 괜찮지 않았다는 거야. 특히 너의 경우는 더 흥미로운 게, 네가 일하는 분야가 다양성과 다문화랑 연결돼 있잖아. 그러니까 이런 억압이나 구조적 문제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이 아니잖아. 이런 대화에 익숙한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네가 포인트를 놓치고 있을 때 더 다르게 다가오는 거야. 단순히 모르는 게 아니라, 네가 잘 알면서도 놓치는 것 같을 때, 그게 나한테는 다른 식으로 불편하게 느껴지거든.
그때 한강에서의 대화가 특히 그랬지? 문화 전유에 대한 문제였어.
맞아. 내가 너한테 내 이야기를 이해시키려고 얼마나 길게, 얼마나 자세히 얘기해야 하는지가 충격적이었어. 특히 그 대화에서 제일 씁쓸했던 건, 네가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니까, 만약 네가 그 대화를 토론처럼 몰고 가버리면, 나는 완전히 밀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네가 가지고 있는 데이터, 논리, 기술을 이용하면 나를 논리적으로 깔아뭉개는 것도 가능했을 테니까. 하지만 그 대화는 내겐 개인적인 얘기였잖아. 단순한 토론 모임이 아니고, 친구로서 “나를 좀 봐달라”는 대화였으니까. 내가 말하는 개인적이고 감정적인 일화도 하나의 데이터잖아. 그런데 너는 또 다른 데이터로 나를 반박할 수도 있지. 그래서 그때 내가 엄청 긴장했던 거야. 네가 혹시 개인적으로 공격받는다고 느끼거나, “이 대화에서 이겨야겠다”라는 태도로 나올까 봐. 네가 가진 훈련된 논리적 기술로 날 누를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그 대화가 굉장히 힘들고, 실망스럽게 느껴졌어. 만약 내가 제대로 내 의사를 그때 표현하지 못했다면, ‘너랑은 다시는 못 얘기할 수도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왜냐면, 그건 단순히 내가 하고 싶은 얘기가 아니라, 내 삶과 연결된 이야기였으니까.
그랬구나. 나는 너와의 대화를 토론처럼 생각해본 적이 절대 없어. 내가 이해가 안 가거나 완전히 납득이 안 되면 계속 질문을 던지는 성향이 있거든. 그게 상대방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 같아.
응, 질문 자체는 괜찮아. 지금도 질문하고 있잖아. 질문 뒤에는 항상 어떤 ‘수사’가 있거든. 호기심에서 묻는 건지, 아니면 답변하는 사람을 궁지로 몰려고 묻는 건지. 그게 토론에서 쓰는 전형적인 기술이기도 하니까.
그런데 의도하진 않았어. 내 성격 때문에 아마 그렇게 보였을 거야.
응, 알지. 근데 의도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게 대화에 미치는 ‘영향’이 더 크단 말이야. 나는 인간적인 이유 때문에 대화가 중요한 순간이었는데, 만약 너한텐 그게 단순히 ‘논쟁’처럼 느껴진다면 그 불일치 때문에 대화가 엇갈리는 거지. 네 어조나 질문 방식이 그렇게 들리면, 나는 그렇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거야.
우리가 한강에서 나눴던 주제에 대해, 내가 무지했고 그래서 미안하게 생각해. 네가 힘들어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 이야기를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걸렸던 것 같아. 또 묻고 싶은 부분이 있어. 너는 그때만 나에게 실망했던 걸까? 요즘 나는 우리가 대화하는 방식을 돌아봤어. 내가 네 얘기를 들을 때마다 자꾸 즉각적으로 해결책부터 떠올리려 했던 것 같아. 그 점이 미안해.
응. 사실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조언은 괜찮아. 근데, 네가 억압이나 구조적 문제를 다루는 일을 하는 사람이잖아. 그래서 우리는 보통 구조적 차원에서 얘기를 하지, 개인 차원에서만 보지 않아. 근데 네 조언이 늘 “그래서 지금 뭘 할 수 있지?”로 흘러가면, 시스템의 문제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어. 결국 “네가 충분히 안 해서 그런 거다”라는 식으로 들릴 수 있거든. 그렇게 되면 오히려 힘든 일을 털어놓은 사람이 다시 책임을 떠안게 되는 거지.
맞아, 너의 말에 깊게 공감해. 사실 나이가 들면서 나의 대화 방식이 좀 바뀐 것 같아. 대학 시절에는 이런 구조적 문제에 대해 토론하고 논쟁하고, 이해를 못하는 사람들을 설득하는 일을 했어. 졸업 후에는 오히려 그런 얘기를 너무 많이 해서 지쳐버린 것도 있고.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해결책’부터 찾으려는 습관이 생겼던 것 같아. 아마 일 때문이기도 한 것 같아. 직장에서 항상 구조적 문제를 프로그램이나 이니셔티브 같은 해결책 중심으로 풀어내야 하니까. 그러다 보니 친구와 얘기할 때도 그런 방식이 묻어나왔던 것 같아. 변명하려는 건 아니고, 그냥 내가 깨달은 패턴이야. 고치고 싶어. 그래서 일종의 고백이야.
알겠어. 사실 나도 내 문제에 대해 해결책을 만들 수 있어. 너가 비자 문제를 도와주긴 했지만 다른 문제들은 늘 내가 스스로 해결책을 찾아왔어. 춤 문제든 뭐든, 내가 직접 풀어가야 했으니까. 그래서 너가 도와주려는 것은 고맙지만 때로는 그게 내가 원했던 대화는 아니었던 거야. 예를 들어 우리가 여성혐오 얘기를 하는데, 여성들에게 “이렇게 행동해야 돼”라고만 말한다면 어색하잖아. 네가 버스에서 성추행을 당했다고 말했는데, 내가 “그럼 이번 주말에 보수적인 옷 사러 가자”라고 하면, 그건 해결책일 수는 있어도 기분 나쁘잖아. 근본 원인은 다른 데 있는데. 마찬가지로 내가 겪은 얘기를 하는데 바로 해결책만 제시하면, 그게 오히려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거야.
맞아, 너무 공감해. 그래서 이 주제를 꼭 다루고 싶었어. 네 실망감이 나한테 언젠가부터 전해졌거든. 내가 널 신경쓰는(care) 방식이 오히려 상처를 줬던 것 같아. 미안하고, 사과하고 싶었어.
고마워, 그렇게 말해줘서. 그리고 괜찮아. 그래서 내가 너에게 이런 얘기를 하는 거야. 그래야 우린 계속 친구로 남을 수 있으니까. 이건 “안 그러면 친구 안 해”라는 위협이 아니라, 진짜 오래 가고 싶으니까 하는 말이야. 한강에서의 대화가 나한텐 정말 힘들었지만, 그래도 감당하고 너에게 얘기한 이유는, 우리가 친구로 남고 싶었기 때문이야.
응. 네가 얘기해줘서 정말 고마워.
나도 네가 들어줘서 고마워.
가까운 사람일수록 이론이 적용되지 않는 것 같다. 힘들어하는 친구를 마주하면 사회적 담론보다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앞선다. 하지만 그 마음이 얼마나 큰 오만일까. 친구는 이미 나보다 더 많은 것을 스스로 헤쳐 나왔고,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맥락에 대해 훨씬 더 섬세한 감각을 가지고 있는데 말이다. 그 오만을 지적하고 일깨워주는 지안무가에게 고맙다. 실망감을 준 상대와 다시 대화를 이어가려는 태도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지안무가는 타인에게 그 노력을 기꺼이 쏟아주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