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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월 Sep 28. 2023

특산물: 안개

소설 「무진기행」 원작, 고전 영화 <안개(1967)>

 소설 원작 영화는 얼마나 원작을 충실히 따랐는지, 얼마나 다르게 각색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러한 관점에서 <안개>는 「무진기행」을 충실히 각색한 것으로 보인다. 소설을 영화로 각색할 때면 내러티브가 변화하기도 한다. <안개>도 원작의 플롯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지만, 세세한 부분에서는 차이가 있다. 소설의 경우, 주인공 윤희중은 과거의 아픔이 남아 있는 고향이자 현실이 아닌 듯한 공간인 무진(霧津)으로 간다. 그곳에서 음악 선생 하인숙을 만나 일탈을 벌이나, 결국은 아내의 전보에 서울로 다시 돌아간다. 이러한 내러티브가 영화에서는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 살펴보자.


 플롯의 전체적인 전개 양상은 소설과 유사하지만, 영화 디테일과 핵심을 위해 내용을 더하거나 뺀 부분이 있다. 먼저 내용을 추가한 경우다. 영화의 주인공 윤기준이 무진으로 내려가기 전 제약 회사에서 일하는 장면을 삽입하여 그가 고향으로 내려가야 할 당위성을 더한다. 특히 개미가 보이는 환상과 흡연에 대한 갈등 끝에 담배를 무는 장면은 그가 무진에서 쉴 필요가 있음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하인숙에 관한 장면도 추가되었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하인숙을 훔쳐보는 윤기준 장면, 윤기준에게 영화의 주제가이기도 한 ‘안개’를 불러주는 하인숙 장면 등은 윤기중과 하인숙의 교감을 더욱 극화했다. 한편, 축약되거나 생략된 장면 역시 존재한다. 개구리울음소리를 통해 별을 연상하는 장면은 윤기준의 대사로 축약됐다. 죽은 술집 여인을 보며 지난밤 잠 못 들었던 이유(그녀의 임종을 지키기 위함)와 그로 인해 느꼈던 감정(여자를 자신 일부처럼 느낌)에 관한 장면은 생략됐다. 위 두 부분은 화자의 심리를 잘 보여주었지만, 서사의 지연을 일으키는 장면이었기 때문에 영화화 시 제외한 것으로 보인다.


 주제의 경우, 영화와 소설의 큰 차이는 없다. 하지만 영화는 소설에서 상대적으로 옅었던 무진의 속성을 강조했다. ‘탈일상적 공간’이라는 속성보다는 ‘아픔이 남아 있는 공간’이라는 속성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이곳에서 소설과 영화의 차이점은 또 한 번 생겨난다. 소설에서 회상 한 번으로 끝났던 ‘골방 속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윤기준 장면은 연상기법을 통해 여러 번에 걸쳐 회상된다. 물속에서 과거의 자신을 보는 윤기중 장면과 무진을 벗어나려 하던 자신의 옛 모습을 하인숙에게서 겹쳐 보는 윤기준 장면도 추가되었다. 아내 덕에 무진을 떠날 수 있었던 과거를 떠올리는 윤기준 장면도 영화에만 삽입되어 있다. 이 장면들 모두는 앞서 말한 강조점 변화의 근거가 된다.


 본 영화는 플롯과 주제를 효과적으로 장면화하여 관객에게 보여준다. 화자의 심리가 서술을 통해 풍부하게 드러나는 소설이었기에, 그것을 어떻게 시각화해야 할지 많이 고민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대부분은 해설과 적절한 배경 장면을 통해 연출되었지만, 영화 기법이 동원되어 내면의 외면화를 진행한 부분도 있다. 윤기준이 하인숙과의 대화 중 아내와의 결혼을 합리화하는 장면을, 영화에서는 ‘나’와 ‘또 다른 나’의 대화로 연출했다. 대화의 말미, ‘또 다른 나’가 침을 뱉음으로써 윤기준의 불편한 심리를 효과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또한 하인숙과 함께 서울로 가야 할지 말지 고뇌하는 장면에서, 해설과 함께 여러 회상 장면을 몽타주 했다. 결국 홀로 무진을 떠나는 버스 안에서는 선택을 합리화하는 해설과 함께 손을 깨무는 행동, 공허한 눈동자로 부끄러움을 표현했다. 위의 연출들은 영화만의 기법을 효과적으로 사용한 것들이다.


 한편, <안개>는 2022년 개봉한 박찬욱 감독의 영화 <헤어질 결심>과 많이 닮아있다. ‘안개’가 자욱한 한 두 지역, 무진과 이포가 주 배경이 된다는 점, 두 서사 모두 불륜을 소재로 다루고 있다는 점, 남자 주인공의 심리적 갈등과 여자 주인공의 욕망이 잘 드러난다는 점이 그렇다. 이러한 유사점은 각각 영화의 주제와 분위기를 강조한다. 그렇기 때문일까, <안개>가 <헤어질 결심>의 원형 같다고 느껴진다. 어쩌면 <헤어질 결심>은 <안개>와 「무진기행」의 현대식 변주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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