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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터캣 Jul 30. 2022

#9 어느 봄날

북카페 피터캣, 8년의 기록

#9 어느 봄날 


그러다 햇살에 뒤이어 갑자기 빗줄기가 떨어졌다. 빗줄기는 온 수평선에 줄무늬를 그리면서 사과나무 행렬을 그 잿빛 망 속에 조였다. 하지만 사과나무는 쏟아지는 소나기 아래 차가워진 바람을 맞으면서도 활짝 핀 분홍빛 꽃의 아름다움을 계속해서 쳐들고 있었다. 어느 봄날이었다.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마르셀 프루스트 7권 중에서  


유니폼을 입은 두 여자 손님이 들어온 것은 어느 봄날이었다.  


굳이 언어로 표현하고 싶지 않은 불안감과 우주의 기운이 지금쯤 지하철역에 막 도착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교차하던 겨울이 끝나가고 있었다. 얼어 죽더라도 패딩은 더이상 입지 못하겠다는 단호한 결심의 사람들이 아직까지도 발목까지 내려오는 두툼한 패딩 차림을 고집하고 있던 이들을 조금씩 금밖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점심 시간이면 좁은 골목에도 직장인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두 세명 혹은 네다섯명이 무거운 유리 문을 열고 들어와 음료를 주문하고는 인원수만큼의 카드를 내밀곤 했다. 일종의 식후 게임이었는데, 내가 뽑은 카드의 주인이 그날 음료를 사는 것이었다. 생각없이 아무 카드나 뽑아 들면 잠깐동안 가게 안이 큰 웃음소리와 한 사람의 비명소리로 채워졌다. 마치 겨울 동안 꽁꽁 얼어붙었던 호수의 얼음이 계절의 변화를 이기지 못하고 조금씩 갈라지기 시작하는 것처럼. 


점심시간마다 열명 혹은 스무 명씩 찾기 시작하니 비로소 가게가 가게 같아 보였다. 짧은 휴식 시간만큼은 모두가 즐거운 얼굴이었고, 덩달아 내 마음도 부풀어 올랐다.  


유니폼을 입은 두 여자 손님이 들어온 것도 그 무렵이었다. 대형 건물들이 있는 대로변이라면 그래도 꽤 걸어야 하는 거리인데, 아마도 식후 긴 산책을 즐기는 이들인가 싶었다. 처음에는 골목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복장이나 사용하는 원두 종류에 대해 자세하게 질문했던 내용들 때문에 인상에 남았는데, 그때는 앞으로 1년 동안 같은 복장을 한 사람들 수십명을 매일 만나게 될 거라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다음날부터 점심시간이면 가게는 유명 밴드 콘서트장 입구를 방불케 했다. 객관적인 기준이 아니라 혼자 일하는 연약한 주인 입장에서 그랬다는 얘기다. 주문 받으면서 카드 꽂아 놓고, POS가 카드사와 통신하는 사이에 추출된 커피를 컵에 붓고, 각각 커피와 카드 돌려 주고, 다음 손님이 메뉴 고민하는 동안 컵에 얼음 가득 담으면서 ‘고르시면 말씀해 주세요’를 외쳤다. 실수는 인정되지 않았다. 스텝이 꼬이는 순간 모든 걸 내려놓고 가게 밖을 나서는 내 모습을 발견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집중해야 했다. 머리 속에 메모장 열어 놓고,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는 동안 손과 발은 기계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게다가 입 또한 놀아서는 안된다. 그 와중에도 손님들과 끊임없이 수다를 떨고, 깔깔대고, 그러면서도 실수가 없었다는 사실이, 내 얘기이긴 하지만 가끔 무서울 때가있다.  


손님은 손님을 부르게 마련이다. 점심시간마다 손님들이 몰리는 커피숍이라면 그 가게를 생각 없이 지나칠 사람은 없을 것이다. 1차 폭발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점심시간은 물론이고 하루 종일 가게문이 쉴 새 없이 열리고 닫히는 날들이 찾아왔다. 점심 러시를 목격한 사람들이 바쁜 시간을 피해 가게를 찾기시작한 것이다. 그때 친해진 손님들이 꽤 많았는데, 그들이 했던 말을 종합해보면 별것 없이 술집만 많은 오래된 골목에 질 좋은 원두를 사용하는 핫한 카페가 등장했다는 소문이 들불처럼 번져 나가고 있다는 얘기였다. 이윽고 찾아온 봄의 새싹들이 들불처럼 언덕으로 번져 나갔다는 표현은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에서 가장 좋아하는 문장이기도 하다.  


몸은 비록 피곤했지만 머리 속 손익계산서 파일에는 온갖 핑크 빛 수식들이 작성되던 시기였다. 백 잔과 이백 잔, 삼백 잔의 경우의 수들이 번갈아 입력될때마다 미래에 대한 기대 값의 색깔도  함께 선명해져갔다. 어쩌면 바쁜 시간에 열심히 일하고, 남는 시간에는 실컷 책을 보거나, 또는 책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대화하는 작지만 실현하기는 결코 쉽지 않은 꿈이 실제로 이뤄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 만으로도 설레는 시간들이었다. 


물론 가장 뼈아픈 가능성을 놓치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지금 피터캣을 가득 채우고 있는 사람들이 어제까지는 다른 가게를 찾았던 사람들이었고, 지금쯤 그 카페의 주인은 겉으로 내색도 못한 채 씁쓸한 감정을 삼키고 있을 것이고, 내게도 그런 시간이 찾아올 수 있다는 가능성. 당연히 그 가능성은 실현될 것이고, 피터캣 주인은 운명의 점프대마다 기름을 잔뜩 칠해 놓은 어떤 존재에 대해 생각하게 될 것이었다. 


몇 년 사이에 커다란 기대와 깊은 실망이 번갈아 찾아왔지만 지금은 그 모든 시간들을 감사하게 간직하고 있다. 아쉽지만 북카페 피터캣이 가야 할 길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고, 게다가 책방 답지 않은 다양한 메뉴와 맛의 수준, 그리고 가끔씩 손님이 몰릴 때 등장하는 체계적이면서도 현란한 몸동작은 그 시절이 아니었으면 영원히 갖지 못했을 소중한 자산이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바쁜 시간에 매일 다양한 메뉴로 당황하게 했던 손님 한명이 지금도 친한 친구처럼 남았다. 그사이 결혼을 했고, 어느새 아이 엄마가 되었지만 지금도 가끔씩 찾아와서 수다를 떨곤 한다. 지금은 가게도 이전했고, 또 분위기도 완전히 달라졌지만 둘이서 대화를 나누다 보면 어느새 가게는 유난히 낮은 목소리로 아이스 아메리카노 색깔의 칵테일을 주문하던 손님과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이던 주인이 있던 2015년의 봄으로 돌아가 있다.






경의선 책거리 문학 카페/책방 피터캣의  8년을 기록합니다

업데이트는 비정기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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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서대문구 신촌로21 2F 피터캣 (070-4106-3467, 12:00~20:00, 월요일 휴무) 

인스타그램 : @petercat1212 

유튜브 : 채널 피터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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