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RO. 인문학, 왜 지리부터 시작하는가

by 한창훈

역사책을 펼치면 첫 페이지에 인물이 나옵니다. 누가 무엇을 했고, 누가 누구를 이겼는지. 우리는 역사를 사람의 이야기로 배웁니다. 그런데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면, 그 사람이 어디에 서 있었는지가 보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서 있던 자리가 결과를 설명해줍니다. 나폴레옹은 천재였습니다. 그런데 러시아 원정에서 졌습니다. 왜? 러시아가 넓어서입니다. 몽골은 유라시아를 정복했습니다. 왜? 스텝이 끊기지 않고 이어져 있어서입니다. 영국이 세계를 지배했습니다. 왜? 34km의 바다가 본토를 지켜줘서입니다.

결국 땅이 먼저입니다.


지리 시리즈의 목표

이 시리즈는 역사가 아닌 역사의 무대를 다룹니다. 연극을 보기 전에 무대 배치도를 한번 훑어보는 겁니다. 조명이 어디에 있고, 출입구가 몇 개이고, 관객석에서 사각지대가 어디인지를 알면, 배우들의 동선이 이해됩니다.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산맥이 어디에 있고, 해협이 얼마나 좁고, 사막이 얼마나 넓은지를 알면, 전쟁과 교역과 문명의 동선이 이해됩니다. (특히 전쟁사를 읽으면 기막히게 재밌어 집니다.)


다만 세계지도를 펼치면 막막합니다. 대륙이 일곱 개, 바다가 다섯 개. 이름은 낯설고 크기 감각은 안 잡힙니다. 그래서 이 시리즈는 하나의 도구를 씁니다. 한국입니다. 지구를 한반도 위에 올려놓고, 서울 지하철로 바다를 읽고, 북한산으로 히말라야를 느낍니다. 멀고 추상적인 세계를, 우리가 매일 밟고 다니는 땅 위에 번역할 예정입니다.


12편의 여정 미리보기


1편에서 지구를 한반도 위에 올려놓습니다. 크기로 보면 아시아가 서울~대전을 먹고, 유럽은 충청도 하나에 불과하고, 아프리카는 지도에서 실제보다 작게 그려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산맥은 가르고, 강은 모으고, 바다는 잇고, 사막은 막는다." 이 네 동사가 시리즈 전체의 문법이 됩니다.


2편에서 그 문법의 단어들을 배웁니다. 해협, 반도, 삼각주, 스텝, 고원. 학교 시험이 끝나면 잊어버린 용어들인데, 하나하나가 전쟁의 원인이었고 제국의 기초였습니다. 보스포루스 해협 하나를 쥐고 콘스탄티노플이 천 년을 버텼다는 걸 알면, "좁은 것이 넓은 것보다 비싸다"는 원리가 몸에 들어옵니다.


3편, 유럽으로 갑니다. 세계사 교과서에서는 주인공인데, 실제 면적은 호주와 비슷합니다. 자기가 주인공인 줄 아는 충청도. 그런데 이 작은 반도가 500년간 세계를 지배한 비결이 해안선의 들쭉날쭉함에 있었다는 걸 발견합니다. 산맥과 바다가 유럽을 쪼개놓았기 때문에 통일이 불가능했고, 통일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경쟁했고, 경쟁했기 때문에 강해졌습니다.


4편, 중동. 이름부터가 문제입니다. '중간 동쪽'이라는 뜻인데, 런던 기준입니다. 정작 이 지역 사람들은 자기 동네를 '중간'이라 부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위치가 진짜 중간입니다.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의 교차점. 서울의 종로처럼 어디를 가든 반드시 거쳐야 하는 자리. 그래서 돈이 몰렸고, 군대도 몰렸고, 한 번도 조용했던 적이 없습니다.


5편, 세계사 교과서에서 가장 적게 등장하는 지역. 중앙아시아. 그런데 이 지역이 없었으면 비단이 로마에 도착하지 못했고, 흑사병이 유럽을 덮치지 못했습니다. 고속도로 자체는 뉴스에 안 나오지만, 그 위를 달리는 모든 것이 뉴스입니다. 바닷길이 열리자 이 고속도로는 잊혀졌습니다. 휴게소(사마르칸트)도 문을 닫았습니다.


6편, 남아시아. 인도는 원래 아프리카 옆에 있었습니다. 떨어져 나와 아시아와 충돌한 흔적이 히말라야입니다. 이 8,000m짜리 벽이 인도를 별세계로 만들었습니다. 외부의 영향이 들어올 수 있는 문은 하나. 카이버 고개. 폭 15m. 한 차선 반짜리 좁은 길을 통해서만 역사가 들어왔기 때문에, 인도는 모든 것을 자기 방식으로 소화할 시간이 있었습니다.


7편, 동아시아. 비유가 필요 없는 유일한 편입니다. 한반도는 한반도니까요. 핵심 공식은 단순합니다. 중국이 크고, 나머지는 그 옆에서 살아남아야 했습니다. 일본은 200km의 바다를 해자(堀) 삼아 안전하게 골라 배웠고, 한반도는 대륙과 해양이 충돌하는 정확한 교차점에서 버텼습니다.


8편, 동남아시아. 한 지역으로 묶기엔 너무 다양합니다. 그런데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해협 하나가 세계 무역의 40%를 쥐고 있습니다. 말라카 해협, 폭 2.8km. 한강 폭의 세 배를 세계 경제가 지나갑니다. 네덜란드가 육두구 독점을 위해 영국에 맨해튼을 넘긴 건 이 바다 위에서 벌어진 거래였습니다. 당시에는 양념이 부동산보다 비쌌습니다.


9편, 아프리카. 중국, 미국, 인도, 유럽을 전부 넣어도 자리가 남는 대륙. 그런데 세계지도에서는 그린란드와 비슷해 보입니다. 실제로는 14배 큽니다. 가장 큰 대륙이 가장 작게 그려졌고, 가장 오래된 역사가 가장 늦게 알려졌습니다. 인류가 처음 두 발로 선 곳이 이 대륙인데, 베를린 사무실에서 자로 그은 직선이 이 대륙의 현대사를 결정했습니다.


10편, 북아메리카. 미국이 초강대국이 된 이유를 부동산으로 요약합니다. 양면 오션뷰, 뒤뜰 무한대, 이웃 조용함. 이런 매물은 지구에 하나입니다. 러시아가 알래스카를 720만 달러에 팔았을 때 '슈어드의 어리석음'이라 불렸는데, 지금 그 값이면 서울 아파트 한 채입니다. 역사상 최고의 부동산 거래였습니다.


11편, 중남미. 안데스 위에서 잉카가 하늘에 닿는 문명을 세웠고, 아마존 안에서는 숲이 모든 것을 삼켰고, 카리브해를 통해 유럽의 배와 질병과 언어가 밀려들었습니다. 감자와 토마토가 유럽에 건너가고, 천연두가 아메리카에 들어왔습니다. 콜럼버스 교환. 생물학적 대교환에서 한쪽이 치른 대가는 문명의 소멸이었습니다.


12편, 가장 먼 무대. 호주에 5만 년 전 도착한 사람들, 나침반 없이 태평양을 건넌 폴리네시아인, 얼음 섬을 '녹색 땅'이라 부른 바이킹의 마케팅 사기. 그리고 가장 먼 곳이 가장 먼저 변하고 있다는 사실. 가라앉는 섬나라들, 녹는 빙하, 열리는 북극 항로. 무대가 바뀌고 있습니다.


한 가지만 기억한다면


이 12편을 관통하는 문장은 하나입니다.


"무대가 배우를 만든다."


강이 있으면 문명이 생기고, 산이 있으면 문화가 갈리고, 해협이 좁으면 전쟁이 나고, 사막이 넓으면 세계가 쪼개집니다. 사람은 위대하지만, 사람이 서 있는 땅이 먼저입니다. 역사를 읽기 전에 지도를 펼치십시오. 배우들이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무대가 알려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