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편. 유럽, 반도의 반도의 반도

by 한창훈

유럽은 대륙이 아닙니다. 정확히 말하면, 유라시아라는 거대한 대륙 서쪽 끝에 붙은 반도입니다. 면적은 호주와 비슷합니다. 한반도의 약 45배. 숫자만 보면 그리 대단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반도가 500년간 세계를 지배했습니다. 비결이 뭘까요. 답은 땅의 모양에 있습니다.


작은데 왜 강했나 — 들쭉날쭉한 해안선의 마법

유럽 지도를 보면 해안선이 심하게 들쭉날쭉합니다. 반도에서 반도가 튀어나오고, 그 반도에서 또 반도가 튀어나옵니다. 스칸디나비아 반도(북유럽), 이베리아 반도(스페인), 이탈리아 반도, 발칸 반도. 유럽은 반도의 반도의 반도입니다.

그림7.png 스칸디나비아, 이베이아, 이탈리아, 발칸 반도

이 복잡한 해안선이 핵심입니다. 해안선이 길면 항구가 많습니다. 항구가 많으면 무역이 활발합니다. 무역이 활발하면 돈이 돕니다. 돈이 돌면 경쟁이 생깁니다. 경쟁이 생기면 기술이 발전합니다.

아프리카 대륙은 유럽보다 세 배 넓지만, 해안선 길이는 비슷합니다. 아프리카는 둥글고 유럽은 찢어져 있으니까요. 해안선의 형태 하나가 대륙의 역사적 운명을 갈랐습니다.

서울로 치면 이렇습니다. 강남은 반듯하게 정리된 격자형 도시입니다. 종로·을지로·충무로 일대는 골목이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어디에 작은 가게가 더 많이 생길까요. 골목이 복잡한 쪽입니다. 유럽의 해안선이 그런 골목입니다. 구석구석 장사할 자리가 있었습니다.


6e09f8f0442af6d26923da182baf146c.jpg


네 개의 유럽 — 산맥과 바다가 만든 구분

유럽은 하나가 아닙니다. 지형이 최소 네 개로 쪼개놓았습니다.


서유럽. 대서양을 마주 보는 해안 지대입니다.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영국. 멕시코 만류(Gulf Stream)가 따뜻한 물을 끌어와서 위도에 비해 기후가 온화합니다. 런던과 서울의 위도는 비슷한데, 런던의 겨울이 서울보다 따뜻한 이유입니다. (대신 비가 매일 옵니다. 공짜는 없습니다.) 이 온화한 기후가 일찍 농업 생산성을 끌어올렸고, 일찍 부유해진 이유가 됐습니다. 한반도로 치면 서해안 평야 지대. 땅이 넓진 않지만 기름지고, 바다로 나가기 쉬운 자리입니다.


남유럽. 지중해를 둘러싼 세 개의 반도입니다. 이베리아(스페인·포르투갈), 이탈리아, 발칸(그리스·세르비아·크로아티아 등). 지중해는 "문명의 수영장"이었습니다. 파도가 잔잔하고 섬이 많아서, 고대인들이 눈에 보이는 다음 섬까지 건너뛰며 항해를 배웠습니다. 그리스 문명, 로마 제국, 르네상스가 전부 이 바다 주변에서 피어났습니다. 서울로 치면 종로·을지로 같은 구도심입니다. 역사의 첫 장이 쓰인 곳. 지금은 중심이 서쪽(대서양 쪽)으로 옮겨갔지만, 유럽 문명의 뿌리는 여전히 여기입니다.


북유럽. 스칸디나비아 반도(노르웨이·스웨덴)와 덴마크, 핀란드, 아이슬란드. 피오르(fjord, 빙하가 깎아 만든 좁고 깊은 만)로 유명합니다. 땅이 척박합니다. 농사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바다로 나갔습니다. 바이킹이 탄생한 이유가 이겁니다. 먹고살려고 배를 탔더니 영국을 습격하고, 아이슬란드에 정착하고, 콜럼버스보다 500년 먼저 북아메리카에 도착했습니다. 척박한 땅이 모험가를 만들었습니다.


동유럽. 여기가 문제입니다. 산맥이 없습니다. 우랄 산맥에서 프랑스 국경까지 거대한 평원이 펼쳐져 있습니다. 방어벽이 없습니다. 그래서 역사가 요동쳤습니다. 몽골이 말을 타고 들어왔고, 나폴레옹이 행군했고, 히틀러가 진격했습니다. 전부 이 평원을 따라서. 폴란드가 역사에서 세 번이나 지도에서 사라진 건, 폴란드의 잘못이 아닙니다. 서쪽(독일)과 동쪽(러시아) 사이에 산 하나 없이 끼어 있는 지리의 저주입니다. 서울로 치면 김포평야 한가운데 성벽 없이 서 있는 마을입니다.


알프스 — 유럽의 척추

알프스 산맥은 유럽을 남북으로 가릅니다. 이 산맥 위(북쪽)와 아래(남쪽)는 기후가 다르고, 음식이 다르고, 기질이 다릅니다. 북쪽은 맥주, 남쪽은 와인. 북쪽은 감자, 남쪽은 올리브. 북쪽은 근면한 프로테스탄트, 남쪽은 느긋한 가톨릭. 물론 이건 과도한 단순화입니다만, 과도한 단순화에도 일말의 진실이 있습니다.

한니발은 코끼리를 끌고 이 산맥을 넘었습니다. 나폴레옹도 넘었습니다. 산을 넘으면 영웅이 되고, 못 넘으면 역사에서 사라집니다. 알프스는 그런 산입니다.


두 개의 강이 그은 선 — 라인강과 도나우강

라인강(Rhine)은 북해로 흘러들어가고, 도나우강(Danube, 독일어로 Donau)은 흑해로 흘러들어갑니다. 이 두 강이 로마 제국의 북쪽 국경선이었습니다. 로마는 이 강 남쪽을 '문명'이라 불렀고, 북쪽을 '야만'이라 불렀습니다. 지금도 이 선을 기준으로 와인 산지와 맥주 산지가 나뉩니다. 로마의 유산은 강을 따라 아직 흐르고 있습니다.

그림8.png 라인 강, 도나우 강

라인강은 이후 산업혁명의 고속도로가 됩니다. 루르 공업지대(독일), 로테르담 항구(네덜란드)가 이 강줄기에 달려 있습니다. 도나우강은 빈, 부다페스트, 베오그라드를 관통합니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동맥이었습니다. 유럽의 역사를 읽으려면, 산맥보다 강을 따라가는 편이 빠릅니다.


34km의 기적 — 영국해협

도버 해협(Strait of Dover, 프랑스어로는 칼레 해협 Pas de Calais).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바다입니다. 가장 좁은 곳이 34km. 서울에서 수원까지의 직선거리와 비슷합니다. 이 34km가 영국의 운명을 바꿨습니다.

1066년 노르만 정복 이후, 이 해협을 건너 영국 본토를 침공한 세력은 없습니다. 스페인 무적함대도 실패했습니다. 나폴레옹도 포기했습니다. 히틀러도 못 건넜습니다. 34km의 바다가 천 년간의 본토 방어를 보장했습니다.

이 안전감이 영국을 독특하게 만들었습니다. 대륙의 전쟁에 끌려 들어갈 걱정이 적으니, 해군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해군이 강하니 식민지를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식민지가 있으니 원자재가 들어왔습니다. 산업혁명의 토양이 이렇게 만들어졌습니다. 34km의 물이 제국의 기초입니다. 그런데도 영국인들은 "우리는 유럽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브렉시트(Brexit)까지 했습니다.


유럽이 쪼개져 있었기 때문에 강해졌다

결국 유럽의 비밀은 이겁니다. 통일되지 못한 것이 축복이었습니다.

중국은 진시황 이후 통일 제국의 전통을 가졌습니다. 황제 한 명이 나쁜 결정을 내리면 대륙 전체가 흔들립니다. 명나라가 해금 정책을 펴자 중국 전체의 바다가 닫혔습니다.

유럽은 달랐습니다. 산맥과 바다가 땅을 쪼개놓아서 통일 제국이 불가능했습니다. 로마 이후 누구도 유럽 전체를 먹지 못했습니다. 대신 수십 개의 나라가 끊임없이 경쟁했습니다. 스페인이 탐험을 포기하면 포르투갈이 나갔습니다. 포르투갈이 주춤하면 네덜란드가 치고 올라왔습니다. 경쟁이 혁신을 낳았고, 혁신이 팽창을 낳았습니다.

지형이 경쟁을 만들었고, 경쟁이 유럽을 만들었습니다. 충청도 하나 크기의 반도가 세계를 지배한 비결은 화려하지 않습니다. 그냥 해안선이 들쭉날쭉했을 뿐입니다.


keyword
이전 03화2편. 해협 하나가 제국을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