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편. 중동, 세계의 교차로이자 화약고

by 한창훈


중동(Middle East)이라는 이름부터 문제입니다. '중간에서 조금 동쪽'이라는 뜻인데, 누구 기준일까요. 런던입니다. 영국이 맘대로 자기 위치에서 동쪽을 세 등분했습니다. 가까운 동쪽(Near East, 근동), 중간 동쪽(Middle East, 중동), 먼 동쪽(Far East, 극동). 한국은 '먼 동쪽'입니다. 정작 이 지역 사람들은 자기 동네를 '중간'이라 부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름이 굳어버렸습니다. 이름을 붙이는 자가 세계를 정의합니다.


이름이 여러 개인 지역

이 지역을 부르는 이름은 시대와 화자에 따라 다릅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중동(Middle East). 영국이 20세기 초에 붙인 이름. 현재 가장 널리 쓰입니다. 서남아시아(Southwest Asia). 지리학에서 선호하는 중립적 표현. 유럽 중심주의를 피하려는 시도입니다. 근동(Near East). 19세기 유럽 외교 용어. 오스만 제국 영토를 가리켰습니다. 지금은 고고학에서 주로 씁니다. MENA. Middle East and North Africa의 약자. 북아프리카까지 포함할 때 씁니다.

같은 땅인데 이름이 넷입니다. 이름이 많다는 건, 그만큼 많은 세력이 이 땅을 정의하려고 다투었다는 뜻입니다.


그림12.gif


세계의 종로 — 어디를 가든 여기를 지나야 합니다

한국으로 치면 중동은 서울의 종로입니다. (사통팔달이라 하죠.) 동서남북 어디를 가든 반드시 거쳐야 하는 자리. 아시아와 유럽과 아프리카가 만나는 교차점입니다. 세계 지도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정확히 그렇습니다.

이 위치 때문에 축복과 저주가 동시에 내렸습니다. 교역로의 중심이니 돈이 몰렸습니다. 돈이 몰리니 군대도 몰렸습니다. 역사상 이 지역을 놔둔 강대국은 없습니다. 페르시아, 알렉산드로스, 로마, 이슬람 제국, 십자군, 몽골, 오스만, 영국, 미국. 전부 이 교차로를 차지하려 했습니다. 종로 상권 싸움이 제국 단위로 벌어진 겁니다. (야인시대가 생각나는군요. 훗)


비옥한 초승달 — 문명이 시작된 곳

네, 세계사 시간에 자주 회자되던 단어죠? 비옥한 초승달 지대(Fertile Crescent). 이름이 아름답습니다. 모양도 아름답습니다. 페르시아만 끝자락에서 시작해 티그리스강·유프라테스강(Tigris·Euphrates)을 따라 올라간 뒤, 지중해 해안을 따라 내려오는 초승달 모양의 띠입니다.


그림11.png

여기서 인류가 처음 밀을 심었습니다. 처음 양을 길렀습니다. 처음 도시를 세웠습니다. 처음 문자를 만들었습니다. 수메르, 바빌로니아, 아시리아. 교과서에 나오는 고대 문명의 거의 전부가 이 초승달 안에 있습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두 강이 흙을 날라다 주었고, 그 흙이 비옥했습니다. 나일강의 이집트와 같은 원리입니다. 강이 문명을 만들었습니다.

서울로 치면 한강 주변의 평야입니다. 땅이 기름지니 사람이 모이고, 사람이 모이니 도시가 됩니다. 다만 스케일이 다릅니다. 여의도 크기가 아니라 한반도 전체 크기의 농경지가 펼쳐진 거니까요.


다섯 개의 지형이 만든 다섯 개의 운명

중동은 다섯 개의 지형이 다섯 개의 역사를 만들었습니다.


아라비아 반도(Arabian Peninsula). 세계 최대의 반도입니다. 대부분이 사막입니다. 그래서 수천 년간 주변부였습니다. 유목민 베두인이 낙타를 끌고 다니는 변방. 그러다 두 가지가 이 반도의 운명을 뒤집었습니다. 7세기에 이슬람이 탄생했고, 20세기에 석유가 발견됐습니다. 사막 아래 잠자던 검은 액체가 세계 경제의 혈관이 되었습니다. 한반도로 치면 아라비아 반도는 남쪽 끝 해안가. 오래 변방이었다가 갑자기 핵심이 된 땅입니다.

레반트(Levant). 지중해 동쪽 해안. 현재의 시리아, 레바논,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요르단 일대입니다. '레반트'는 이탈리아어로 '해가 뜨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좁은 해안 평야와 내륙 산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좁은 땅이 세 대륙의 길목입니다. 이집트에서 메소포타미아로, 아프리카에서 유럽으로 가려면 반드시 레반트를 밟아야 합니다. 그래서 평화로운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제국이 바뀔 때마다 이 좁은 통로 위에서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소아시아(Asia Minor, 현재의 튀르키예(Türkiye) 아나톨리아(Anatolia) 반도). '작은 아시아'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역사적 비중은 전혀 작지 않습니다. 삼면이 바다(흑해, 에게해, 지중해)이고 내륙은 고원입니다. 반도 형태라 방어에 유리합니다. 히타이트, 리디아, 비잔틴 제국, 오스만 제국이 이 땅 위에 서 있었습니다.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선인 보스포루스 해협이 이 반도의 서쪽 끝에 있습니다. 2편에서 다뤘던 그 해협입니다. 폭 700m. 이 하나를 쥐고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이 천 년을 버텼습니다.

이란 고원(Iranian Plateau). 한때 출장을 다녔었는데 같이 간 사람이 공항 도착하자마자 코피를 흘리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고원지대여서 그랬답니다. 서쪽에 자그로스 산맥(Zagros Mountains), 동쪽에 힌두쿠시 산맥, 북쪽에 엘부르즈 산맥(Alborz Mountains). 삼면이 산입니다. 이 산들이 만든 천연 요새 안에서 페르시아 문명이 독자적으로 자랐습니다. 아랍도 아니고 튀르크도 아닌, 페르시아라는 별개의 세계. 이란인들의 자존심은 이 산맥에서 나옵니다. 외부 세력이 산을 넘어 들어오기 어려웠기 때문에 정복당한 적은 있어도, 정체성을 잃은 적은 없습니다.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 '두 강 사이의 땅'이라는 뜻입니다.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 현재의 이라크 대부분입니다. 세계 최초의 문명이 여기서 시작됐습니다. 최초의 법전(함무라비 법전), 최초의 문자(쐐기문자, cuneiform), 최초의 도시(우르, Ur). '최초'라는 타이틀의 상당수가 이 두 강 사이에 묻혀 있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조금 더 깊은 이야기입니다

페르시아만(Persian Gulf)과 호르무즈 해협(Strait of Hormuz). 페르시아만은 아랍어권에서 아라비아만(Arabian Gulf)이라 부릅니다. 이름을 뭐라 부르느냐로 외교적 입장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국제회의에서 실수로 잘못 부르면 분위기가 얼어붙습니다.) 이 만의 입구가 호르무즈 해협입니다. 폭 54km. 서울에서 인천공항까지의 직선거리와 비슷합니다. 세계 석유 수송의 약 20%가 이 물길을 지나갑니다. 여기가 막히면 유가가 폭등합니다. 경제가 흔들립니다. 54km의 바닷물이 세계 경제의 숨통입니다. 이 숨통을 트럼프가 건드렸죠.

수에즈 운하(Suez Canal). 지중해와 홍해를 잇는 인공 수로입니다. 1869년 개통. 이것이 없던 시절에는 유럽에서 아시아로 가려면 아프리카를 빙 돌아야 했습니다. 희망봉을 지나는 항로가 수개월 걸렸습니다. 수에즈 운하가 열리자 거리가 절반으로 줄었습니다. 영국이 이 운하를 목숨 걸고 지킨 이유입니다. 인도로 가는 지름길이었으니까요. 2021년에 에버기븐(Ever Given)호가 이 운하에 끼었을 때, 세계 무역의 12%가 일주일간 멈췄습니다. 폭 205m의 수로에 세계 경제의 상당 부분이 인질로 잡힌 셈이었습니다.

직선 국경의 비극. 중동 지도를 보면 국경선이 이상합니다. 사막 한가운데를 자로 그은 듯한 직선이 여기저기 보입니다. 이라크·요르단·사우디아라비아·시리아의 국경 상당 부분이 이렇습니다. 1916년 사이크스-피코 협정(Sykes-Picot Agreement). 영국의 마크 사이크스와 프랑스의 프랑수아 조르주 피코가 런던과 파리의 사무실에서 지도 위에 자를 대고 그었습니다. 현지 사정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같은 부족이 두 나라로 갈라지고, 적대적인 집단이 한 나라 안에 묶였습니다. 구글맵은커녕 현장 답사도 없이 만든 국경선의 결과를 이 지역은 지금도 치르고 있습니다.

세 종교의 지리. 예루살렘(Jerusalem)이라는 도시가 있습니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 세 종교 모두의 성지입니다. 세 성지가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모여 있습니다. 통곡의 벽, 성묘교회, 알아크사 모스크. 이 좁은 공간에 인류 역사에서 가장 뜨거운 긴장이 압축되어 있습니다. 종로3가에 세 개의 본사가 나란히 있는데, 세 회사가 수천 년째 같은 건물 소유권을 다투고 있다고 상상하면 됩니다. 다만 여기서의 분쟁은 법정이 아니라 전장에서 벌어졌습니다.


한 가지만 기억한다면

중동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위치가 너무 좋은 것도 재앙입니다. 교차로에 서 있으면 모든 방향에서 손님이 옵니다. 그 손님이 상인일 수도 있고 군대일 수도 있습니다. 중동은 인류 문명이 시작된 곳이고, 세계 종교가 탄생한 곳이고, 석유가 잠든 곳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한 번도 조용했던 적이 없는 곳입니다.


이전 04화3편. 유럽, 반도의 반도의 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