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고속도로와 방음벽
세계사 교과서를 펼쳐 보십시오. 중앙아시아는 몽골 제국 단원에서 잠깐 등장했다가 사라집니다. 코카서스는 이름조차 안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지역이 없었으면 비단이 로마에 도착하지 못했고, 불교가 중국에 전해지지 못했고, 흑사병이 유럽을 덮치지 않았습니다. 동양과 서양을 이어준 것도, 갈라놓은 것도 이 땅입니다.
한반도로 치면 중앙아시아는 충청도 내륙입니다. 바다가 없습니다. 사방이 다른 세력권입니다. 동쪽은 중국, 남쪽은 인도와 이란, 서쪽은 유럽과 중동, 북쪽은 러시아. 어디를 가든 누군가의 영역을 지나야 합니다. 그래서 두 가지 운명 중 하나를 맞았습니다. '지나가는 길'이 되거나, '잊히는 땅'이 되거나.
그런데 '지나가는 길'이 세계사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아는 사람은 의외로 적습니다. 고속도로 자체는 뉴스에 나오지 않습니다. 뉴스에 나오는 건 고속도로 위를 달리는 차들입니다. 중앙아시아가 정확히 그런 존재였습니다. 주인공은 아니었지만, 주인공이 달리는 길이었습니다.
중앙아시아를 이해하려면 스텝(Steppe)부터 알아야 합니다. 끝없이 펼쳐진 초원. 나무가 거의 없습니다. 풀만 자랍니다. 풀은 농사에는 부족하지만, 말과 양을 먹이기에는 충분합니다. 그래서 이 땅의 사람들은 정착하지 않았습니다. 가축을 데리고 풀을 따라 움직였습니다. 유목민입니다.
스텝의 핵심 특성은 평평하다는 겁니다. 장애물이 없습니다. 시력이 기본 2.0 이상인 사람들인 이유가 있죠. (저는 많이 부럽습니다. 다행히 라식의 혜택을 받았지만요.) 말이 달리기에 이보다 좋은 땅은 없습니다. 몽골 초원에서 말을 타고 출발하면, 큰 산맥을 만나지 않고 헝가리 평원까지 달릴 수 있습니다. 유라시아 대륙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초원의 아우토반입니다.
몽골 제국이 유라시아를 정복한 건 칭기즈 칸의 천재성만으로는 설명이 안 됩니다. 스텝이 끊기지 않고 이어져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도로가 있어야 차가 달립니다. 스텝이 있어야 기마 군단이 달립니다. 서울로 치면 강변북로가 끊기지 않고 부산까지, 그리고 부산에서 다시 이스탄불까지 쭉 이어져 있다고 상상하면 됩니다. (신호등도 톨게이트도 없이.)
실크로드(Silk Road)는 하나의 길이 아닙니다. 여러 갈래의 교역로를 묶어서 부르는 이름입니다. 19세기 독일 지리학자 리히트호펜(Ferdinand von Richthofen)이 붙인 이름이고, 실제로는 비단만 오간 게 아닙니다. 향신료, 보석, 유리, 종이, 화약, 종교, 질병이 이 길을 탔습니다.
이 길의 중간 기착지가 중앙아시아였습니다. 사마르칸트(Samarkand, 현재 우즈베키스탄), 부하라(Bukhara), 메르브(Merv, 현재 투르크메니스탄). 이 도시들은 한때 세계에서 가장 국제적인 곳이었습니다. 중국 상인, 페르시아 학자, 인도 승려, 아랍 의사가 같은 시장에서 마주쳤습니다. 지금의 뉴욕이나 런던보다 더 다문화적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마르칸트를 서울에 비유하면 명동입니다. 외부인이 더 많고, 물건이 넘쳐나고, 여러 언어가 뒤섞이는 거리. 다만 명동이 쇼핑 관광객의 거리라면, 사마르칸트는 대륙 간 무역의 허브였습니다. 스케일이 좀 다릅니다.
실크로드가 쇠퇴한 건 바닷길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15세기 이후 유럽인들이 해상 항로를 개척하면서, 낙타보다 배가 빨라졌습니다. 중앙아시아는 '지나가는 길'의 지위를 잃었습니다. 고속도로에 차가 안 다니면 휴게소도 문을 닫습니다. 사마르칸트와 부하라가 세계사의 뒤편으로 밀려난 건 이 때문입니다.
중앙아시아 지도를 보면 '-스탄(-stan)'으로 끝나는 나라가 줄줄이 나옵니다.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도 있습니다. '-스탄'은 페르시아어로 '~의 땅'이라는 뜻입니다. 카자흐스탄은 카자흐인의 땅, 우즈베키스탄은 우즈베크인의 땅입니다. 이름만 알면 구조가 보입니다.
예외가 하나 있습니다. 파키스탄(Pakistan)은 약자입니다. P(펀자브), A(아프가니아, 현 카이버파크툰크와주), K(카슈미르), I(인더스 지역의 I), S(신드), TAN(발루치스탄). 건국자들이 지역 이름의 첫 글자를 조합해서 만들었습니다. 동시에 우르두어로 'pak'이 '깨끗한'이라는 뜻이라 '깨끗한 땅' (Pure Land)이라는 중의적 의미도 담았습니다. 작명 센스가 있네요.
저는 운좋게도 파키스탄 출장을 가본 적이 있는데요. (비자도 어렵게 받았었습니다.) 인도와 결별하면서 ‘순수한’ 무슬림만 사는 땅을 만든다는 의미로 ‘깨끗한 or 순수한’ 땅이라 하지 않았을까 생각했었습니다.
코카서스(Caucasus) 산맥은 흑해(Black Sea)와 카스피해(Caspian Sea) 사이를 가로막는 벽입니다. 최고봉 엘브루스(Elbrus)가 5,642m. 알프스 최고봉 몽블랑(4,808m)보다 높습니다. 이 산맥을 기준으로 남쪽에 세 나라가 있습니다. 조지아(Georgia), 아르메니아(Armenia), 아제르바이잔(Azerbaijan).
이 세 나라가 유럽인지 아시아인지는 아직도 논쟁 중입니다. UEFA(유럽축구연맹)에는 가입되어 있습니다. 유럽 지도에 포함될 때도 있고 빠질 때도 있습니다. 본인들은 대체로 유럽 쪽에 끼고 싶어합니다. 소속이 모호한 건 이 지역의 숙명입니다. 서울로 치면 마포와 영등포 사이, 한강 위의 노들섬 같은 위치입니다. 강북이냐 강남이냐, 대답하기 곤란합니다.
코카서스 산맥이 만든 가장 놀라운 현상은 언어의 폭발입니다. 좁은 지역에 50개 이상의 언어가 공존합니다. 골짜기 하나를 넘으면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산이 높으면 사람이 섞이지 않고, 사람이 섞이지 않으면 언어가 갈라집니다. 아랍의 지리학자들은 이곳을 '언어의 산(Mountain of Languages)'이라 불렀습니다.
참고로 백인을 뜻하는 영어단어 '코카시언(Caucasian)'은 과거 인류학자들이 코카서스 지역을 인류의 발상지이자 가장 '아름다운 언어와 외모'를 가진 기원이라 믿어 붙여진 이름입니다. (미드를 보면 의료 차트에서 백인을 코카시언이라고 하는 경우가 많이 보입니다.)
카스피해(Caspian Sea) — 바다인가 호수인가. 세계 최대의 내륙 수역입니다. '해(Sea)'라는 이름이 붙어 있지만 사방이 육지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이게 왜 중요하냐면, '바다'이면 해양법이 적용돼서 주변국 모두에게 자유 항행권이 생기고, '호수'이면 자원을 연안국끼리 균등 분배해야 합니다. 바닥에 석유와 천연가스가 잠들어 있으니, 이름 하나에 수천억 달러가 걸려 있습니다. 2018년에 주변 5개국이 타협안을 만들었습니다. "바다도 아니고 호수도 아닌 특수한 수역"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이름을 못 정하면 새 이름을 만드는 것도 방법이긴 합니다.
아프가니스탄 — 제국의 무덤. 이 별명은 과장이 아닙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고전했습니다. 영국이 세 번 전쟁하고 물러났습니다. 소련이 10년 싸우고 철수했습니다. 미국이 20년 주둔하다 떠났습니다. 이유는 지형입니다. 국토의 75%가 산악 지대입니다. 힌두쿠시 산맥(Hindu Kush)은 페르시아어로 '힌두를 죽이는 산'이라는 뜻인데요. 가장 널리 알려진 설은 14세기 여행가 이븐 바투타의 기록입니다. 당시 중앙아시아의 침략자들이 인도에서 잡아온 힌두교도 노예들을 데리고 이 산맥을 넘었는데, 해발 7,000m에 달하는 혹독한 추위와 눈보라 때문에 수많은 노예가 산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를 보고 '힌두를 죽이는 곳'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험난한 힌두쿠시 산맥이 이 나라를 관통합니다. 골짜기마다 다른 부족이 살고, 중앙 정부의 통제가 골짜기 너머로 넘어가지 않습니다. 평지를 점령하는 건 쉽습니다. 산속의 모든 골짜기를 통제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파미르 고원(Pamir Plateau) — 세계의 지붕. 중앙아시아의 동쪽 끝, 타지키스탄과 중국·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이 만나는 지점에 있습니다. 평균 해발 4,000m 이상. 히말라야, 카라코람, 힌두쿠시, 톈산 산맥이 여기서 만납니다. 지구에서 산맥들이 가장 밀집된 곳입니다. 이 매듭 지점이 동양과 서양을 물리적으로 갈라놓았습니다. 실크로드의 상인들은 이 고원을 넘어야 했습니다. 산소가 부족한 고도에서 짐을 실은 낙타를 끌고 고개를 넘는 일. 아마존 당일배송에 익숙한 현대인에게는 상상하기 어려운 물류 시스템이었습니다.
몽골 — 스텝의 심장. 인구 밀도가 세계 최저 수준입니다. 한반도의 약 7배 면적에 약 340만 명이 삽니다. 서울 강남구 인구보다 적습니다. 울란바토르에 전체 인구의 절반이 모여 삽니다. 나머지 절반은 말 그대로 초원에 흩어져 있습니다. 13세기에 이 인구 희박한 땅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제국이 탄생했다는 건, 생각할수록 경이로운 일입니다. 땅의 크기가 아니라 땅의 성격이 제국을 만들었습니다.
중앙아시아와 코카서스는 세계사의 보이지 않는 인프라입니다.
길이 열리면 문명이 섞이고, 길이 닫히면 세계가 갈라집니다. 실크로드가 활발했던 시대에는 동서양이 하나였습니다. 해상 무역이 실크로드를 대체한 뒤, 이 지역은 잊혀졌고 동양과 서양은 별개의 세계가 됐습니다. 지금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 Belt and Road Initiative)가 이 길을 다시 열려고 합니다. 고속도로가 다시 놓이면, 휴게소도 다시 열립니다. 사마르칸트의 시대가 돌아올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