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먼 무대, 가장 마지막 이야기
인류가 마지막으로 발을 디딘 대륙이 두 개 있습니다. 호주와 남극. 하나는 5만 년 전에, 하나는 200년 전에 도착했습니다. 사이에 4만 9,800년의 간격이 있습니다. 이 간격이 말해주는 건 단순합니다. 멀고, 어렵고, 굳이 갈 이유가 없었습니다. 세계사의 무대에 가장 늦게 등장한 곳. 하지만 '늦게'가 '덜 중요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무대 위에서 21세기의 가장 큰 질문들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호주는 모든 것이 극단입니다. 가장 오래된 대륙 지각입니다. 가장 평평합니다. 평균 해발 330m. 대륙 전체가 완만한 접시 모양입니다. 히말라야나 안데스 같은 젊은 산맥이 없습니다. 산이 솟을 만큼의 지질학적 활동이 오래전에 멈췄기 때문입니다. 가장 높은 산이 코시우스코산(Mount Kosciuszko)으로 2,228m. 한라산(1,947m)과 비교할 만한 수준입니다. 대륙의 최고봉이 한국의 섬에 있는 산과 비슷하다는 건, 이 대륙이 얼마나 평평한지를 말해줍니다.
그리고 건조합니다. 대륙 내부의 약 70%가 사막이거나 반건조 지대입니다. 중심부에 거대한 붉은 사막이 펼쳐져 있습니다. 아웃백(Outback)이라 불리는 이 내륙은 거의 사람이 살지 않습니다. 호주 인구 약 2,600만 명의 대부분이 동쪽과 남동쪽 해안에 몰려 있습니다. 시드니, 멜버른, 브리즈번. 전부 해안 도시입니다. 10편에서 캐나다 인구의 90%가 미국 국경 200km 이내에 산다고 했습니다. 호주도 비슷합니다. 대륙의 테두리에만 사람이 삽니다. 가운데는 텅 비어 있습니다.
한반도로 치면 호주는 가장 먼 외곽입니다. 독도보다 먼 곳. 아시아 대륙에서 떨어져 나온 뒤 수천만 년간 홀로 떠 있었습니다. 이 고립이 호주를 호주답게 만들었습니다.
호주가 다른 대륙과 분리된 건 약 4,500만 년 전입니다. 남극·남미와 하나였던 거대 대륙 곤드와나(Gondwana)에서 떨어져 나온 뒤, 홀로 북쪽으로 떠올랐습니다. 이 긴 분리 기간이 지구 어디에도 없는 생태계를 만들었습니다.
캥거루, 코알라, 오리너구리, 웜뱃. 왜 호주 동물은 하나같이 독특할까요. 다른 대륙의 포유류와 경쟁할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유대류(有袋類, marsupial — 캥거루처럼 주머니에서 새끼를 키우는 포유류)가 다른 대륙에서는 태반류에 밀려 사라졌는데, 호주에서는 경쟁자가 없어서 그대로 번성했습니다. 오리너구리는 알을 낳는 포유류입니다. 다른 대륙에서는 진화적으로 도태되었을 존재가 호주라는 격리 병동에서 살아남았습니다.
9편에서 마다가스카르가 아프리카에서 떨어져 나와 독자 생태계를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같은 원리입니다. 떨어져 있으면 독자적으로 진화합니다. 6편에서 히말라야가 인도를 별세계로 만든 것도 같은 논리입니다. 고립은 독자성의 어머니입니다.
호주 원주민(Aboriginal Australians)은 약 5만 년 전에 도착했습니다. 당시 해수면이 지금보다 낮아서 동남아시아에서 호주까지 섬을 건너뛰며 올 수 있었습니다. 완전한 육교는 아니었습니다. 마지막 구간은 바다를 건너야 했습니다. 뗏목이든 카누든, 바다를 건넌 겁니다. 5만 년 전에.
이것은 인류 최초의 해양 이주입니다. 유럽인이 도착하기 4만 8,000년 전부터 이 대륙에서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 지속된 연속 문화입니다. 원주민의 구전 전통 중에는 해수면 상승으로 해안선이 바뀐 사건(약 7,000~1만 년 전)을 묘사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빙하기의 끝을 기억하는 구전. 인류 최장의 메모리입니다.
1788년 영국이 식민지를 세우면서 이 5만 년의 역사가 단절됐습니다. 영국은 이 대륙을 '무주지(terra nullius, 아무도 소유하지 않는 땅)'로 선언했습니다. 5만 년을 살아온 사람들이 있는데 '아무도 없다'고 선언한 겁니다. 이 법적 허구는 1992년 마보 판결(Mabo decision)에서야 뒤집혔습니다. 204년이 걸렸습니다.
뉴질랜드(New Zealand)는 호주에서 약 2,000km 떨어져 있습니다. 서울에서 상하이까지의 거리보다 멉니다. 호주와 같은 오세아니아로 묶이지만, 지질학적으로는 전혀 다릅니다. 호주가 평평하고 오래된 대륙이라면, 뉴질랜드는 불의 고리 위에 있는 젊고 험한 섬입니다. 화산, 지진, 온천, 빙하가 공존합니다. 남섬의 서던알프스(Southern Alps) 최고봉 아오라키/마운트쿡(Aoraki/Mount Cook)이 3,724m입니다.
마오리(Māori)족이 약 700년 전(13세기경)에 폴리네시아에서 카누를 타고 도착했습니다. 남극을 제외하면, 인류가 정착한 가장 마지막 대규모 땅입니다. 700년 전이면 유럽에서는 중세 후기입니다. 그 시점에 처음 사람이 발을 디딘 땅이 있었다는 게 놀랍습니다. 지구는 생각보다 넓었습니다.
마오리족의 항해 능력은 경이적입니다. 나침반도, 해도도 없이 별과 파도와 바람과 새의 비행 패턴을 읽으며 수천 km의 태평양을 건넜습니다. 이 이야기는 태평양 전체로 확장됩니다.
여기서부터는 조금 더 깊은 이야기입니다.
태평양은 지구 표면의 3분의 1을 덮습니다. 1편에서 대륙 전부를 합쳐도 태평양 하나보다 작다고 했습니다. 이 거대한 바다에 섬들이 흩어져 있습니다. 세 개의 이름으로 나뉩니다.
멜라네시아(Melanesia). '검은 섬들'이라는 뜻의 그리스어입니다. 파푸아뉴기니, 피지, 솔로몬 제도, 바누아투. 비교적 큰 섬들이 호주 북동쪽에 모여 있습니다. 파푸아뉴기니 하나에만 800개 이상의 언어가 있습니다. 세계에서 언어 다양성이 가장 높은 나라입니다. 5편에서 코카서스의 50개 언어를 다뤘는데, 파푸아뉴기니는 그 16배입니다. 산과 밀림이 마을을 고립시키면 언어가 갈라진다는 원리의 극단적 사례입니다.
미크로네시아(Micronesia). '작은 섬들'이라는 뜻입니다. 마셜 제도, 팔라우, 괌, 나우루. 이름 그대로 아주 작은 섬들입니다. 산호초로 이루어진 섬(환초, atoll)이 대부분이라 해수면이 조금만 올라가도 존재가 위협받습니다. 6편에서 다뤘던 몰디브의 태평양 버전입니다.
폴리네시아(Polynesia). '많은 섬들'이라는 뜻입니다. 하와이, 사모아, 통가, 이스터 섬(라파누이, Rapa Nui), 뉴질랜드. 태평양에 삼각형 모양으로 넓게 퍼져 있습니다. 이 삼각형의 꼭짓점이 하와이(북), 뉴질랜드(남서), 이스터 섬(남동)입니다. 세 꼭짓점 사이의 거리가 수천 km입니다.
폴리네시아인들은 이 거대한 삼각형을 카누로 채웠습니다. 약 3,000~1,000년 전 사이에, 별을 보고, 파도의 패턴을 읽고, 철새의 이동 경로를 따라 항해했습니다. 나침반이 발명되기 천 년 전에 태평양을 횡단한 겁니다. 유럽인이 대서양을 본격적으로 건너기 시작한 게 15세기 말입니다. 폴리네시아인은 그보다 수백 년에서 수천 년 전에 태평양을 건넜습니다. 대서양보다 태평양이 훨씬 넓습니다. 규모로 보면 인류 역사상 가장 과소평가된 항해입니다.
남극(Antarctica). 대륙입니다. 땅이 있습니다. 면적 약 1,400만 km². 유럽보다 큽니다. 그런데 그 땅 위에 평균 두께 2.16km의 얼음이 덮여 있습니다. 이 빙상(氷床, ice sheet)에 지구 전체 담수의 약 70%가 얼어 있습니다. 전부 녹으면 해수면이 약 58m 상승합니다. 서울 대부분이 물에 잠깁니다.
남극은 아무 나라 것도 아닙니다. 1959년 남극조약(Antarctic Treaty)으로 영유권 주장이 동결됐습니다. 과학 연구 목적으로만 사용합니다. 군사 활동 금지, 핵실험 금지. 인류가 만든 국제 협약 중 가장 이상주의적인 것 중 하나입니다. 물론 얼음 아래 자원이 발견되면 이 합의가 얼마나 오래 갈지는 미지수입니다.
남극 빙상 아래에는 산맥도 있고, 호수도 있습니다. 보스토크 호(Lake Vostok)는 빙상 아래 3,700m 깊이에 있는 거대한 지하 호수입니다. 수백만 년간 외부와 단절되어 있었습니다. 이 호수에 어떤 생명체가 있을지, 과학자들이 탐사 중입니다.
북극(Arctic). 남극과 결정적으로 다릅니다. 대륙이 아니라 바다입니다. 얼어붙은 바다. 북극해(Arctic Ocean) 위에 얼음이 떠 있는 겁니다. 땅이 없으니 남극처럼 영유권을 동결할 수도 없습니다. 러시아, 캐나다, 미국(알래스카), 노르웨이, 덴마크(그린란드)가 북극해 연안국입니다. 해저 자원과 새 항로를 놓고 경쟁이 시작됐습니다.
기후변화로 북극 해빙(海氷)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여름철 북극해가 열리면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가는 새 항로(북극항로, Northern Sea Route)가 가능해집니다. 수에즈 운하(4편)를 거치지 않아도 됩니다. 러시아가 이 항로에 전략적으로 투자하고 있습니다. 빙하가 녹는 건 재앙이지만, 동시에 새 도로가 열리는 겁니다. 1편에서 "바다는 장벽이 아니라 도로였다"고 했습니다. 얼어붙은 바다가 녹으면, 새 도로가 됩니다. 축복인지 저주인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그린란드(Greenland) — 역사상 가장 성공한 부동산 사기. 세계 최대의 섬입니다. 면적 약 216만 km². 한반도의 약 10배. 덴마크 자치령인데, 면적은 덴마크의 50배입니다. 이름은 '녹색 땅'인데, 국토의 80%가 빙상으로 덮여 있습니다. 녹색이라곤 남서쪽 해안의 이끼밖에 없습니다.
이 이름을 붙인 건 10세기 바이킹 에이리크 라우디(Erik the Red, '붉은 에이리크')입니다. 아이슬란드에서 추방당한 뒤 이 섬을 발견하고, 이주민을 모집하기 위해 '녹색 땅'이라 이름 붙였습니다. 실제로는 얼음 땅입니다. 천 년 전의 부동산 마케팅 사기입니다. 그런데 성공했습니다. 사람들이 이름만 듣고 왔습니다. 5편에서 '-스탄'의 이름들을 다뤘고, 11편에서 '희망봉'의 이름 변경을 다뤘습니다. 이름 짓기가 역사를 바꾸는 세 번째 사례입니다.
이 시리즈 전체를 관통하는 원리가 있습니다. 땅의 모양이 역사를 정한다. 그런데 그 땅의 모양이 바뀌고 있습니다. 해수면이 상승하면 해안선이 바뀝니다. 해안선이 바뀌면 항구가 바뀝니다. 항구가 바뀌면 도시가 바뀝니다. 도시가 바뀌면 역사가 바뀝니다.
1편에서 "1만 2천 년 전에는 한반도와 일본이 육지로 연결되어 있었다"고 했습니다. 해수면이 바뀌면 세계가 바뀝니다. 남극의 얼음이 녹는 속도, 북극 항로의 개통 가능성, 태평양 섬나라들의 생존. 이 모든 것이 지리의 현재진행형입니다.
12편에 걸쳐 다뤄온 산맥, 강, 해협, 사막, 평원. 이것들이 역사의 무대였습니다. 그 무대가 지금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바뀌고 있습니다.
오세아니아와 극지의 핵심은 이겁니다.
가장 먼 곳이 가장 먼저 변하고 있습니다. 세계사의 마지막 무대였던 이곳이 기후변화의 최전선이 됐습니다. 투발루와 마셜 제도는 가라앉고 있고, 북극 해빙은 줄어들고 있고, 남극 빙상은 갈라지고 있습니다. 가장 늦게 역사에 등장한 곳이, 가장 먼저 21세기의 대가를 치르고 있습니다.
12편에 걸쳐 지구를 한 바퀴 돌았습니다. 1편에서 세운 대전제를 다시 꺼냅니다.
산맥은 가르고, 강은 모으고, 바다는 잇고, 사막은 막습니다.
이 네 동사가 세계사의 기본 문법이었습니다. 이제 문법을 배웠으니, 문장을 읽을 차례입니다. 다음 시리즈에서는 이 무대 위에서 실제로 벌어진 일들 — 문명의 탄생, 제국의 충돌, 혁명과 전쟁 — 을 다룹니다. 무대를 알면, 배우들의 행동이 이해됩니다. 역사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제 다음 시리즈로, 지리 위에서 펼쳐지는 인간들의 '역사'를 살펴 보겠습니다.
[지금까지의 시리즈는 제가 Claude와 계속 대화하며 정리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