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데스와 아마존이 가른 두 세계
중남미를 '한 지역'으로 묶는 건 유럽 전체를 '한 문화권'이라 부르는 것만큼 위험할 수 있습니다. 멕시코의 타코와 아르헨티나의 아사도(asado, 숯불 바비큐)는 같은 음식이 아닙니다. 쿠바의 사회주의와 칠레의 시장경제는 같은 체제가 아닙니다. 카리브해의 산호초 해변과 안데스의 만년설은 같은 풍경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하나로 묶이는 이유가 있습니다.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 가톨릭, 그리고 식민지의 기억. 이 세 가지가 대륙 전체에 하나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습니다.
중남미는 세 덩어리입니다.
중앙아메리카(Central America). 멕시코 남쪽에서 파나마까지의 좁은 육지입니다. 과테말라, 벨리즈, 온두라스, 엘살바도르, 니카라과, 코스타리카, 파나마. 7개국이 이 좁은 지협 위에 나란히 앉아 있습니다. 한반도보다 약간 큰 면적에 7개 나라. 좁아서 작은 나라들이 생겼고, 작아서 강대국 사이에 끼었습니다. 한반도로 치면 경상도와 전라도 사이의 좁은 산간 지대에 작은 나라 일곱 개가 다닥다닥 붙어 있는 구조입니다.
이 지역이 지리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하나입니다.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를 잇는 유일한 육교이기 때문입니다. 10편에서 다뤘던 파나마 지협이 이 다리의 가장 좁은 지점입니다. 다리가 좁으면 통행료를 받기 좋습니다. 파나마 운하가 바로 그 통행료 징수소입니다.
카리브해(Caribbean Sea). 중앙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사이의 바다입니다. 이 바다에 섬들이 흩어져 있습니다. 쿠바, 자메이카, 아이티, 도미니카공화국, 푸에르토리코, 트리니다드토바고. 크고 작은 섬 수백 개. 8편에서 동남아 도서부를 다뤘는데, 카리브해도 비슷한 원리입니다. 섬이 많으면 해적이 번성하고, 무역이 활발하고, 외부 세력이 하나씩 집어먹기 좋습니다.
실제로 카리브해는 해적의 황금시대(17~18세기)의 무대였습니다. 스페인이 남미에서 금과 은을 실어 나르는 항로가 카리브해를 지났습니다. 섬 사이사이에 숨을 곳이 많았습니다.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가 해적을 반쯤 공인하면서 스페인 선박을 털게 했습니다. 국가가 후원하는 해적, 사략선(私掠船, privateer)입니다. 약탈을 사업 모델로 삼은 겁니다.
남아메리카(South America). 본체입니다. 면적 약 1,780만 km². 한반도의 약 80배. 12개 나라가 이 대륙 위에 있습니다. 브라질이 대륙의 거의 절반을 차지합니다. 나머지 11개국이 나머지 절반을 나눕니다. 중국과 주변국의 관계가 떠오른다면 정확합니다. 7편에서 "중국이 크고, 나머지는 그 옆에서 살아남아야 했다"고 했습니다. 남미에서 브라질이 그 역할입니다. 다만 브라질은 중국만큼 주변국에 압도적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이유도 지형에 있습니다. 아마존 열대우림이 내부 통합을 어렵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안데스 산맥(Andes Mountains). 길이 약 7,000km. 베네수엘라에서 칠레 남단까지 남아메리카 서해안을 따라 내려갑니다. 세계에서 가장 긴 산맥입니다. 로키 산맥(4,800km)보다 길고, 히말라야(2,400km)의 세 배입니다. 높이는 최고봉이 아콩카과(Aconcagua)가 6,961m. 히말라야 (최고 8,848m) 를 뺀다면 가장 높은 산입니다.
이 산맥이 남미 서쪽을 전부 장악합니다. 서쪽 해안과 동쪽 내륙이 완전히 다른 세계가 됩니다. 산맥 서쪽은 좁은 해안 평야이고, 동쪽은 드넓은 평원과 밀림입니다. 같은 위도인데 산맥 하나를 사이에 두고 기후, 식생, 문화가 전부 다릅니다.
잉카 제국(Inca Empire)이 이 산맥 위에 세워졌습니다. 해발 3,000~4,000m의 고산 지대에서 문명을 일궜습니다. 수도 쿠스코(Cusco)가 해발 3,400m. 서울(38m)의 약 90배 높이입니다. 이 높이에서 도로를 깔고, 계단식 농경지를 만들고, 제국을 운영했습니다. 바퀴도 말도 없이. 대신 라마(Llama)와 사람의 발이 있었고, 키푸(Quipu)라는 매듭 기록 체계가 문자를 대신했습니다.
한반도로 치면 안데스는 태백산맥이 백두산에서 제주도까지 이어지면서, 높이가 세 배로 솟은 버전입니다. 그 산맥 위에 나라를 세운 겁니다. 땅이 부족하면 산 위에 계단을 깎아서라도 농사를 짓는다는 건, 인간의 집착에 가까운 적응력을 보여줍니다.
아마존 열대우림(Amazon Rainforest). 세계 최대의 열대우림입니다. 면적 약 550만 km². 한반도의 약 25배. 서유럽 전체보다 넓습니다. 지구 전체 열대우림의 절반 이상이 여기 있습니다. 지구 산소 생산의 상당 부분을 담당해서 '지구의 허파'라 불립니다.
아마존강(Amazon River)이 이 숲을 관통합니다. 유량 기준 세계 1위. 미시시피강의 약 10배 물이 흐릅니다. 하구의 폭이 약 300km입니다. 서울에서 대전까지의 거리가 강 입구의 너비입니다. 이쯤 되면 강이 아니라 움직이는 바다입니다.
그런데 이 거대한 숲과 강이 남미 내부 통합의 최대 장벽이기도 했습니다. 밀림을 뚫고 도로를 내기가 극도로 어렵습니다. 내면 곧 다시 숲이 삼킵니다. 브라질 해안 도시들과 내륙 아마존 지역은 같은 나라인데 다른 세계입니다. 9편에서 콩고 분지가 중앙아프리카를 고립시킨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거대한 숲은 보호막이면서 동시에 감옥입니다.
남미에는 세계적 규모의 강이 셋 있습니다. 각각이 다른 세계를 만들었습니다.
아마존강 — 밀림의 동맥. 위에서 다뤘습니다. 세계 최대 유량. 열대우림을 관통합니다. 이 강 유역은 인구 밀도가 낮습니다. 숲이 너무 빽빽하고 습해서 대규모 정착이 어렵습니다.
라플라타강(Río de la Plata) — 팜파스의 출구. '은의 강'이라는 뜻입니다. 스페인 탐험가들이 이 강을 따라 올라가면 은이 나올 거라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기대는 빗나갔습니다.) 파라나강(Paraná)과 우루과이강(Uruguay)이 합류하는 하구입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Buenos Aires)와 몬테비데오(Montevideo)가 이 하구 양쪽에 마주 보고 있습니다.
이 강의 배후지가 팜파스(Pampas)입니다. 아르헨티나의 대평원. 10편에서 미국의 대평원을 다뤘는데, 팜파스는 남미판 대평원입니다. 끝없이 평평하고 비옥합니다. 소가 풀을 뜯고 밀이 자랍니다. 아르헨티나가 한때 세계 최부국 중 하나였던 이유가 이 평원의 생산력입니다. 19세기 말~20세기 초, 아르헨티나의 1인당 소득은 프랑스나 독일과 비슷했습니다. 땅이 부를 보장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오리노코강(Orinoco River) — 잊힌 강. 베네수엘라와 콜롬비아를 흐르는 큰 강인데, 아마존과 라플라타에 가려 존재감이 약합니다. 이 강 유역의 야노스(Llanos) 평원은 우기에 반쯤 물에 잠기는 초원입니다. 카우보이(야노스에서는 야네로(llanero)라 부릅니다)가 소를 몰던 땅입니다. 미국의 카우보이, 아르헨티나의 가우초(Gaucho), 베네수엘라의 야네로. 대평원과 목축이 만나면 어디서든 비슷한 문화가 생깁니다.
아타카마 사막(Atacama Desert) — 가장 건조한 곳. 칠레 북부, 안데스 서쪽의 해안 사막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건조합니다. (사막 마라톤으로 유명해지기도 했죠.) 일부 지역은 유의미한 강수 기록이 수백 년간 없습니다. 비가 한 번도 안 온 겁니다. 이유가 독특합니다. 서쪽의 차가운 훔볼트 해류(Humboldt Current)가 수분 증발을 억제하고, 동쪽의 안데스 산맥이 대서양의 습기를 차단합니다. 양쪽에서 비를 빼앗긴 땅입니다.
그런데 이 극한의 건조함이 자원이 되기도 합니다. 구름이 없어서 세계 최고의 천문 관측지입니다. 유럽남방천문대(ESO)의 초거대 망원경들이 아타카마에 있습니다. 또한 리튬(Lithium) 매장량이 세계 최대급입니다. 전기차 배터리의 핵심 원료. 사막이 21세기의 금광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재앙이 자원이 되는 아이러니는 이 시리즈에서 반복적으로 만나는 패턴입니다.
파타고니아(Patagonia) — 바람의 끝. 남미 남단, 아르헨티나와 칠레에 걸친 황야입니다. (파타고니아 창업자가 여기를 탐험하고 이름이 유명해졌죠.) 바람이 끊이지 않습니다. 나무가 바람 방향으로 한쪽만 자랍니다. 인구 밀도가 극도로 낮습니다. 마젤란(Ferdinand Magellan)이 1520년 이 지역을 지나면서 원주민을 보고 '큰 발의 사람들'이라는 뜻의 '파타곤(Patagón)'이라 불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세계의 끝이라는 감각이 이 땅에 내려앉아 있습니다. 그 끝 너머에 드레이크 해협(Drake Passage)을 건너면 남극입니다.
엘도라도(El Dorado) — 환상이 만든 역사. 스페인어로 '황금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콜롬비아 원주민의 의식에서 유래했습니다. 추장이 금가루를 몸에 바르고 호수에 들어가는 의식이 스페인인들 귀에 들어갔고, '금으로 된 도시'가 어딘가에 있다는 전설로 부풀어올랐습니다. 수백 명의 탐험가가 정글을 헤매며 이 도시를 찾았습니다. 아무도 못 찾았습니다. 구글맵이 없던 시대의 검색 결과는 '약 0건'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헛된 탐색이 남미 내륙 탐험을 가속화했습니다. 환상이 실제 역사를 만든 경우입니다.
콜럼버스 교환(Columbian Exchange) — 대륙이 주고받은 것들. 1492년 콜럼버스의 항해 이후, 구대륙(유라시아·아프리카)과 신대륙(아메리카) 사이에 생물학적 대교환이 벌어졌습니다. 아메리카에서 유럽으로 간 것: 감자, 토마토, 옥수수, 고추, 초콜릿, 담배. 유럽에서 아메리카로 간 것: 밀, 쌀, 말, 소, 천연두, 홍역.
감자 하나가 유럽의 인구 폭발을 이끌었습니다. 이탈리아 요리에서 토마토를 빼면 뭐가 남을까요. 한국 음식에서 고추를 빼면 김치가 사라집니다. 지금은 각 문화의 정체성처럼 여겨지는 식재료들이 사실은 500년밖에 안 된 수입품입니다.
대신 천연두가 아메리카 원주민 인구의 약 90%를 쓸어버렸습니다. 아즈텍과 잉카가 스페인 소수의 정복자에게 무너진 건 무기의 차이보다 질병의 차이가 컸습니다. 생물학적 교환에서 한쪽이 치른 대가는 문명의 소멸이었습니다.
남미 국경선 — 자연 vs 직선. 아프리카(9편)와 중동(4편)의 직선 국경과 달리, 남미 국경은 상당 부분 자연 지형을 따릅니다. 안데스 산맥이 칠레와 아르헨티나를 가르고, 강이 여러 나라의 경계를 이룹니다. 자연을 따른 국경이 많다는 건, 유럽 열강이 아프리카·중동만큼 세밀하게 국경을 그어주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남미 대부분은 스페인과 포르투갈 둘이서 나눠 가졌기 때문입니다. 1494년 토르데시야스 조약(Treaty of Tordesillas)으로 지구를 동서로 반 갈랐습니다. 교황이 선을 그었습니다. 그 선 서쪽은 스페인, 동쪽은 포르투갈. 브라질이 포르투갈어를 쓰고 나머지 대부분이 스페인어를 쓰는 이유가 이 한 줄의 선입니다.
중남미의 핵심은 이겁니다.
산맥이 서쪽을 세우고, 밀림이 동쪽을 가두고, 바다가 외부를 불러들였습니다. 안데스 위에서 잉카가 하늘에 닿는 문명을 세웠고, 아마존 안에서는 숲이 모든 것을 삼켰고, 카리브해를 통해 유럽의 배와 질병과 언어가 밀려들어왔습니다. 이 대륙은 스스로 하나가 된 적이 없습니다. 외부의 언어(스페인어·포르투갈어)와 외부의 종교(가톨릭)가 하나로 묶어놓은 것이 지금의 '중남미'입니다. 묶인 것과 하나인 것은 다릅니다. 그 차이를 이해하려면, 안데스의 높이와 아마존의 깊이를 먼저 느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