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편. 북아메리카

대평원, 로키, 미시시피가 쓴 각본

by 한창훈

미국이 초강대국이 된 이유를 딱 하나만 대라면, 답은 땅입니다. 사상도 아니고 제도도 아니고 인물도 아닙니다. 물론 그것들도 중요했습니다. 하지만 출발점은 땅입니다. 동쪽에 대서양, 서쪽에 태평양. 북쪽에 캐나다, 남쪽에 멕시코. 양쪽 대양이 적의 침략을 막아주고, 남북의 이웃은 위협이 되지 않습니다. 중앙에는 세계 최대의 농경지가 펼쳐져 있습니다. 부동산으로 치면 양면 오션뷰에 뒤뜰은 무한대이고 이웃은 조용합니다. 이런 매물은 지구에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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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개의 세로줄 — 북아메리카의 뼈대

북아메리카의 지형은 놀랍도록 단순합니다. 세 개의 세로줄로 읽을 수 있습니다.

동쪽 줄: 애팔래치아 산맥(Appalachian Mountains). 대서양 해안을 따라 남북으로 뻗은 오래된 산맥입니다. 최고봉이 약 2,000m. 히말라야나 로키에 비하면 언덕 수준입니다. 수억 년 전에는 높았지만, 오랜 세월 깎여서 둥글어졌습니다. 나이 든 산입니다.

이 산맥이 초기 미국 역사의 틀을 만들었습니다. 영국 식민지는 대서양 해안과 애팔래치아 산맥 사이의 좁은 해안 평야에 갇혀 있었습니다. 13개 식민지가 전부 이 띠 안에 있었습니다. 산맥 너머 서쪽이 뭐가 있는지 잘 몰랐습니다. 독립 이후에야 산을 넘었고, 넘고 나니 상상할 수 없는 크기의 평원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한반도로 치면 애팔래치아는 태백산맥과 비슷한 역할입니다. 동해안과 내륙을 가르는 등뼈. 다만 태백산맥 너머에는 서울과 평야가 있고, 애팔래치아 너머에는 대륙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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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 줄: 대평원(Great Plains)과 미시시피강. 애팔래치아와 로키 산맥 사이에 거대한 평야가 펼쳐집니다. 남북으로 캐나다에서 멕시코만까지. 동서로 수천 km. 세계에서 가장 넓은 연속 농경지 중 하나입니다. 밀, 옥수수, 대두가 이 땅을 덮고 있습니다. 미국이 세계 최대의 식량 수출국인 이유가 이 평원입니다.

이 평원의 한가운데를 미시시피강(Mississippi River)이 관통합니다. 세계에서 세 번째로 긴 강입니다. 지류까지 합치면 미국 본토의 약 40%를 배수합니다. 이 강이 미국의 내륙 수운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산업 혁명 이전, 물건을 대량으로 운반하는 가장 싼 방법은 배였습니다. 미시시피강과 그 지류를 따라 농산물과 공산품이 오갔습니다. 뉴올리언스(New Orleans)가 미시시피강 하구에서 번영한 건 강의 끝에 앉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서울의 마포나 용산이 한강 수운의 거점이었던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스케일만 대륙급입니다.

서쪽 줄: 로키 산맥(Rocky Mountains). 북아메리카의 척추입니다.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에서 미국 뉴멕시코까지 약 4,800km. 최고봉 엘버트산(Mount Elbert)이 4,401m. 알프스보다 높습니다. 이 산맥이 서부와 동부를 갈라놓았습니다. 산맥 동쪽은 비가 충분히 와서 농사가 됩니다. 서쪽은 건조합니다. 사막과 준사막이 펼쳐집니다. 연 강수량 500mm 등강수량선이 로키 산맥 근처를 지나갑니다. 7편에서 만리장성이 400mm 등강수량선과 일치한다고 했습니다. 비가 오는 선이 문명의 경계를 긋는 건 동양이나 서양이나 같습니다.


오대호 — 담수의 바다

오대호(Great Lakes). 슈피리어, 미시간, 휴런, 이리, 온타리오. 세계 지표 담수의 약 20%가 이 다섯 호수에 들어 있습니다. 위성 사진으로 보면 호수라기보다 내륙의 바다입니다. 슈피리어 호(Lake Superior) 하나의 면적이 한반도의 약 37%입니다. 호수 하나가 한반도 면적의 3분의 1을 넘습니다.

오대호가 미국 산업사에서 중요한 이유는 위치입니다. 호수 주변에 철광석과 석탄이 있었습니다. 호수를 통해 원자재를 운반했습니다. 디트로이트(자동차), 시카고(철강·곡물), 클리블랜드(제철). 미국 제조업의 심장부가 오대호 연안에 모인 건 자원과 수운이 겹치는 자리였기 때문입니다. 이 지역이 나중에 '러스트 벨트(Rust Belt, 녹슨 지대)'가 된 건, 제조업이 떠나면서 녹이 슬었기 때문입니다. 땅이 산업을 불렀고, 산업이 떠나자 땅만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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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 넓지만 좁은 나라

캐나다는 면적 기준 세계 2위입니다. 러시아 다음. 한반도의 약 45배. 그런데 인구는 약 4,000만 명입니다. 한국 인구보다 적습니다. 땅의 대부분이 사람이 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캐나다 북부는 캐나다 순상지(Canadian Shield)라 불리는 거대한 암반 지대입니다. 빙하가 깎고 간 자리라 토양이 얇고 농사가 안 됩니다. 광물은 풍부하지만 추위가 혹독합니다. 더 북쪽은 툰드라와 북극권입니다. 결과적으로 캐나다 인구의 약 90%가 미국 국경에서 200km 이내에 삽니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넓은 나라인데, 사실상 남쪽 가장자리의 얇은 띠에 모여 사는 겁니다. 넓어서 강한 게 아니라, 좁은 띠에서 효율적으로 사는 나라입니다.

멕시코 — 고원 위의 나라

멕시코는 흔히 중남미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지리적으로는 북아메리카입니다. 미국과 2,000km 이상의 국경을 맞대고 있습니다.

멕시코의 핵심 지형은 멕시코 고원(Mexican Plateau)입니다. 양쪽에 시에라마드레 산맥(Sierra Madre — 스페인어로 '어머니 산맥')이 서 있고, 그 사이에 높은 고원이 펼쳐져 있습니다. 수도 멕시코시티(Mexico City)가 해발 약 2,240m에 있습니다. 서울(해발 약 38m)의 60배 높이입니다. 아즈텍 제국의 수도 테노치티틀란(Tenochtitlan)이 이 고원의 호수 위에 세워졌습니다. 스페인 정복자 코르테스(Hernán Cortés)가 이 도시를 처음 봤을 때, 유럽의 어떤 도시보다 크고 아름다웠다고 기록했습니다.

멕시코 해안 저지대는 덥고 습합니다. 고원은 높아서 선선합니다. 이 기후 차이가 멕시코의 인구 분포를 결정했습니다. 사람들은 해안보다 고원에 모였습니다. 6편에서 에티오피아 고원이 독자 문명을 만든 것과 비슷한 원리입니다. 높이는 불편하지만, 기후를 쾌적하게 만들고 방어력을 제공합니다.




여기서부터는 조금 더 깊은 이야기입니다

파나마 지협(Isthmus of Panama) — 세계를 바꾼 80km. 2편에서 지협을 다뤘습니다. 파나마 지협은 폭 80km. 이 좁은 육지가 대서양과 태평양을 갈라놓고,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를 잇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지협이 원래는 없었습니다. 약 300만 년 전에 해저 화산 활동으로 솟아올랐습니다.

이 사건의 파급효과가 엄청났습니다. 대서양과 태평양의 해류가 차단됐습니다. 멕시코만류(Gulf Stream)가 강화되어 유럽을 따뜻하게 만들었습니다. 3편에서 런던이 서울보다 겨울이 따뜻한 이유로 멕시코 만류를 언급했습니다. 그 만류를 강화한 게 파나마 지협입니다. 80km의 땅이 대서양 건너 유럽의 기후까지 바꾼 겁니다.

1914년 파나마 운하(Panama Canal)가 개통됐습니다.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가려면 남아메리카 끝(혼곶, Cape Horn)을 돌아야 했는데, 운하가 수천 km를 단축했습니다. 4편에서 다뤘던 수에즈 운하와 쌍벽을 이루는 세계 물류의 병목입니다. 미국이 이 운하를 건설하고 수십 년간 관리한 건 군사적·경제적 필요 때문이었습니다. 태평양 함대와 대서양 함대를 빠르게 이동시키려면 이 운하가 필수였습니다.

알래스카(Alaska) — 러시아의 후회. 미국 최대의 주입니다. 면적이 한반도의 약 7배. 1867년 러시아가 미국에 720만 달러에 팔았습니다. 1km²당 약 4.7달러. 지금 서울 아파트 한 채 가격이면 알래스카 전체를 살 수 있었던 셈입니다. 당시 미국 내에서도 "쓸모없는 얼음 땅을 왜 샀느냐"는 비판이 있었습니다. '슈어드의 어리석음(Seward's Folly)'이라 불렸습니다. 국무장관 윌리엄 슈어드(William Seward)가 매입을 주도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후 금이 발견됐고, 석유가 발견됐고, 냉전 시대에는 러시아와 마주 보는 전략적 요충지가 됐습니다. 알래스카와 러시아 사이의 베링 해협(Bering Strait)은 가장 좁은 곳이 85km입니다. 맑은 날에는 미국 땅에서 러시아 땅이 보입니다. 720만 달러짜리 '어리석음'이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부동산 거래 중 하나로 뒤집혔습니다. 8편에서 네덜란드가 맨해튼과 육두구 섬을 맞바꾼 이야기를 했습니다. 부동산의 미래 가치는 아무도 모릅니다.

미국의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 — 지리가 만든 이념. 19세기 미국인들은 대서양에서 태평양까지 대륙 전체를 차지하는 것이 신이 부여한 운명이라 믿었습니다. '명백한 운명'이라는 표현이 1845년에 등장합니다. 이것은 이념이지만, 이 이념을 가능하게 만든 건 지형입니다. 애팔래치아를 넘으면 드넓은 평원이 나옵니다. 로키를 넘으면 태평양이 보입니다. 중간에 강력한 국가가 없었습니다. 원주민 부족들은 있었지만, 유럽식 군사력에 대항하기 어려웠습니다. '채울 수 있는 빈 공간'이 (원주민의 관점에서는 결코 비어 있지 않았지만) 서진(西進)의 물리적 조건을 만들었습니다. 이념은 늘 지형 위에서 자랍니다.

미국 동부 vs 서부 — 비가 가른 두 세계. 미국을 동서로 가르는 보이지 않는 선이 있습니다. 경도 100도 부근. 대략 텍사스 중부에서 남북 다코타까지 이어지는 선입니다. 이 선 동쪽은 연 강수량 500mm 이상으로 농사가 가능합니다. 서쪽은 건조해서 관개 없이는 농사가 어렵습니다. 도시의 모양도 다릅니다. 동부는 오래된 유럽식 도시가 많고, 서부는 자동차 시대에 설계된 넓은 도로와 교외 주택지가 많습니다. 같은 나라 안에서 동쪽으로 가면 유럽이 보이고, 서쪽으로 가면 미래가 보인다는 말이 여기서 나옵니다.


한 가지만 기억한다면

북아메리카의 핵심은 이겁니다.

입지가 운명을 이겼습니다. 미국은 좋은 제도와 좋은 인재가 만든 나라이기도 하지만, 그 전에 좋은 땅이 만든 나라입니다. 양쪽에 대양이라는 해자가 있고, 중앙에 끝없는 농경지가 있고, 강이 내륙 수운을 보장합니다. 유럽의 전쟁에 말려들 위험이 적고, 자원이 자급자족 가능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안전하고 가장 비옥한 위치. 이 위에 세워진 나라가 초강대국이 된 건, 놀라운 일이 아니라 거의 필연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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