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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민 Oct 28. 2018

35. 완전한 동네

회상 (3)

오래전 살던 11층 집을 뒤로하고 아파트 현관으로 내려왔다. 밖으로 나와 고개를 돌리니 낡고 작은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가건물이라고 하기엔 꽤 번듯하고 상가라고 하기엔 너무 단출한 건물이었다. 벽면에는 거의 다 말라가는 대걸레 두 개가 나란히 걸려 있었다. 그 옆에는 나무로 된 현판에 건물의 용도를 암시하는 한자가 세로로 쓰여 있었는데 제대로 읽을 수는 없었다. 에어컨 환풍기는 벽면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고 그 음영 속에 관리사무소라는 글씨가 보였다. 출입구로 보이는 회색 철문은 빗장이 걸린 채 잠겨 있었다. 철문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상상해 보았다. 잘 떠오르지 않았다. 관리사무소에서 나오는 사람을 본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파트 단지 한편에 관리사무소가 자리 잡은 곳은 인적이 드물어 조용했다. 순간 경로당이라는 단어가 머리를 스쳤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관리사무소와 경로당은 기억 속에서 같은 공간 안에 있었다. 기억 속에서 자취를 감춘 작업복을 입은 아저씨들과 바둑을 두는 어르신들에 대해 생각했다. 공통점이 없을 것 같은 그들은 왜 한 건물 안에 모여 있어야 했을까. 그것도 후미진 곳에 있는 건물에.


국민학교를 찾아 걸었다. 양곡상가아파트 옆 공터에는 농구 코트가 있었다. 아스팔트 바닥에는 경기에 필요한 라인이 그려져 있었고 골대에는 그물이 달려 있었다. 농구를 하고 있는 사람은 없었지만 누군가 농구를 하고 있었다면 그건 분명 초등학생들이었을 것이다. 이제 막 농구의 규칙을 몸에 익히기 시작한 아이들. 골대로 공을 던져 올리기 위해 온 힘을 끌어모으는 아이들. 진지한 아이들의 얼굴을 생각했다. 농구는 어려운 스포츠였다. 처음 시작은 땅과 돌만 있으면 됐다. 운동장 바닥에 쪼그려 앉아 돌을 튕기고 선을 그으면 한 뼘의 땅을 얻을 수 있었다. 돌을 튕길수록 내 땅은 넓어졌다. 때론 옆 친구의 땅을 뺏기도 하고 친구에게 내 땅을 빼앗기기도 했다. 바닥에서의 훈련이 끝나면 공이 주어졌다. 공을 차서 골대에 넣으면 됐다. 어느 순간이 되어 내 발을 떠난 공은 바닥에서 떠올라 짧은 비행을 시작했다. 그다음에는 손바닥만 한 공을 던질 수 있게 되었고 운이 좋은 날에는 친구가 던진 공을 방망이로 쳐볼 수도 있었다. 그런 날은 많지 않았지만 어떤 날에는 내 방망이에서 떠난 공이 숨을 몇 번 고를 수 있을 만큼의 시간을 비행하기도 했다. 농구공은 이 모든 훈련을 마친 다음 주어졌다. 얼굴보다 큰 공을 자기 키의 두 배가 넘는 링 속으로 던져 올리는 일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농구 코트 너머에는 정자가 있었다. 등나무를 배경으로 동네 어른들이 앉아 있었다. 초여름의 더위에 맞서는 부채질이 분주했다. 하이톤의 대화를 들었고 내용은 모르겠지만 유쾌하게 느껴졌다. 아파트 단지를 나와 국민학교로 향하는 다리를 건넜다. 열 걸음 남짓 되는 폭을 가진 개울이 아파트 단지와 학교 사이에 경계를 그었다. 잠시 다리 위에 멈춰 섰다. 개울이 만들어 놓은 여백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의 대화가 사라진 공백으로 흐르는 조용한 물소리를 들었다. 개울의 북쪽 끝과 남쪽 끝을 번갈아 보았다. 수도 없이 이 다리를 건넜을 어릴 적 나 자신을 떠올렸다. 그때 나에게 이 동네는 모든 것이 갖춰진 하나의 완전한 세계였다. 부족함이 없는 곳이었다. 가족이 있었고 집이 있었고 슈퍼가 있었다. 건너편에는 친구가 있었고 문방구가 있었고 운동장이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감싸고 있는 동산이 있었다. 지하철이 얼마나 가까운지 학교가 얼마나 명문인지 집값이 계속 오를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 것과 상관없이 나는 책가방을 메고 매일 이 다리를 건넜고 친구들과 손을 잡았고 새로운 것을 배웠다. 어제에 대한 후회도 없었고 내일에 대한 두려움도 없었다. 하루하루 성장했고 그걸로 만족했다.


휴일의 학교는 한산했다. 양곡초등학교의 외벽은 밝게 채색되어 있어 학교의 나이를 짐작할 수 없었다. 커다란 고무 타이어가 박힌 정글짐은 더 이상 찾을 수가 없었다. 대신 포장을 갓 뜯어낸 에어컨처럼 말끔한 미끄럼틀이 보였다. 다만 운동장 한편에는 여전히 횃불을 들고 달리는 소년의 동상이 있었고 그 아래에는 체력은 국력이라는 문구가 새겨진 동판이 있었다. 운동장은 여전히 넓었다. 운동장의 가장자리를 따라 걸었다. 알록달록 채색된 벤치와 수도꼭지가 여러 개 달린 수돗가를 지났다. 몇 명의 아이들이 야구를 하고 있었다. 배트가 야구공을 때리며 '깡'하는 소리를 냈다. 청명한 그 소리를 쫓아 글러브를 낀 한 아이가 열심히 달렸다. 공을 잡진 못했지만 아이들은 힘껏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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