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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사 Jan 23. 2022

매일 꾸준히 정원을 가꾸는 일의 위대함

그래서 어렵고, 그래서 아무나 하지 못하는 일

나는 (다정하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20대의 어느 날, 외국인 둘이서 종이 지도를 펼치고 길을 찾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도와준다고 말해 볼까? 말까?' 하면서 그 외국인들 주위를 두 번 왔다 갔다 하다가 결국 그냥 지나쳐버렸다. '다음 기회에..'로 넘어간 후에도 몇 번 더 같은 상황을 마주하자 나에게 든 생각은, 의지가 있다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내가 그 사람들을 도와주려면 먼저 영어에 자신감이 있어야 했고, 선뜻 나서서 도와줄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했다. 둘 다 훈련이 필요한 일이다. 


그런데 이렇게 작은 일도 주저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어떤 예상치 못한 위급한 상황 앞에서 몸을 던져 사람을 구해낸다. 지하철에서 목숨을 버리고 사람을 구해 낸 의인의 기사처럼 모두에게 박수를 받는 현실 속 영웅들을 보면 저분의 용기는 어느 순간 우연히 나타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오랜 시간 훈련되지 않으면 그런 행동이 나오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크고 중요하고 용감한' 선택을 하는 순간이 아니라 '사소하고 평범한' 순간들이다. 이런 순간들이 쌓여있지 않으면 영웅의 순간들은 절대 찾아올 수 없다. 마틴 루서킹이 'I have dream'이라는 연설 하기 위해 견뎌왔던 시간들이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게다가 극적인 순간의 주인공의 모습은 수많은 영웅들의 극히 일부분의 모습일 뿐이다. 책 <전념>에서는 영웅을 이렇게 설명한다.


전념하기의 영웅들은
매일, 매년 꾸준하게 시간과 노력을 쌓아
스스로 극적인 사건 그 자체가 된다.
전념하기의 영웅들은 매일, 매년 꾸준하게 시간과 노력을 쌓아 스스로 극적인 사건 그 자체가 된다. 그들의 앞을 가로막는 용은 일상이 주는 지루함, 다른 바도 기웃거리고 싶은 유혹, 그리고 내가 잘하고 있는지 확신하지 못하는 불안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있어 중요한 결단의 순간은 칼을 꺼내서 용에게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매일 꾸준히 정원을 가꾸는 일에 가깝다. -<전념>, p.25



"매일 꾸준히 정원을 가꾸는 일"이란 첫 문단에서 언급했던 훈련이 될 수도 있고, 꾸준함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행동의 측면으로만 본다면 쉽게 놓치는 것이 있다. 나와 정원의 관계다. 정원을 '매일 꾸준히' 가꾸기 위해서는 내가 즐겁고 행복해야 지속 가능하기 때문이다. 제대로 전념하기 위해서는 순서가 필요하다.


1. 나에 대한 이해


체인지그라운드에서 여러 훌륭한 분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면서 내가 마지막에 묻는 질문이 있다. '인생의 가치는 뭔가요?'. 이 질문을 하는 이유는 모두의 삶의 모양이 얼마나 다르고 또 각각이 얼마나 각자의 삶에서 중요한 것인지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사랑, 자신감, 꾸준함, 나눔, 자유...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신 분이 있는가 하면 한동안의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셨던 분들도 있다. 후자의 경우, 꽤 어려운 질문이었을 수 있는데 짧은 순간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자신이 했던 선택들의 공통점을 찾았을 것이다. 당장 무엇을 하고 싶은지보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의 질문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 질문은 내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게 되는 실패의 경험을 줄여줄 수 있다.


2. 나에게 맞는 정원 탐색하기


책을 읽다 보면 흔히 하게 되는 오해가 몇 가지 있다. 책이 주장하는 바에 몰입한 나머지 이것은 좋은 것, 이 반대되는 것은 나쁜 것이라고 실수하는 경우다. <전념>을 읽다 보면, 그러면 탐색하는 것은 나쁜 것인가 하는 질문이 나온다. 하지만 <전념>의 저자도 탐색 모드에도 분명히 장점이 있다고 밝혔다. '적어도 어느 시점까지는'이라는 전제가 있을 뿐이다. 피트 데이비스는 탐색 모드는 특히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에 해당하는 사람들에게 유효하다고 말한다. '매일 꾸준히' 즉, 평생 정원을 가꾸기 위해서는 10분의 전념부터 시작해야 한다. 10분, 1시간의 경험을 통해 나에게 적합한 정원을 찾아야 한다. 거기까지 분명히 시간이 필요하다. 다만 조심하자. 겉핧기식의 무한 탐색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가치에 부합하는지, 깊이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3. 임계점을 돌파하기까지 전념하는 시간


전념하기의 영웅들은 올바른 균형을 유지하는 데에 성공한 사람들이다. 자기에게 맞지 않는 방에 갇혀있거나 한없이 복도를 서성대며 이 방 저 방 기웃대는 대신, 그들은 스스로 방을 선택해서 거기에 정착함으로써 이 같은 긴장감을 해소할 방법을 찾았다. -<전념>, p.700


나에게 맞는 정원을 찾았다면 그 정원에 씨를 심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충분한 시간을 전념해야 비로소 변화가 시작된다. 이것을 제이콥 리스 Jacob Ris는 바위를 두드리는 석수에 비유했고, 피트 시거 Pete Seeger은 시소에 비유했다. 100번을 두드려도 실금 하나 가지 않던 바위가 단 한 번의 망치질을 하는 순간 쩍 하고 둘로 갈라진다. 한 숟가락씩 채우는 모래로 꿈쩍도 하지 않던 시소가 어느 날 갑자기 기울어진다. 이런 변화는 한꺼번에 느닷없이 찾아온다. 99도까지 물이 끓지 않다가 1도의 상승으로 물이 끓는 것처럼, 그 순간은 임계점을 돌파하는 순간이다. 임계점을 돌파한 후의 변화는 복리의 효과 혹은 멱 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주황색 구간의 전념이 빛을 발하기까지 투입해야 하는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앞서 말한 것처럼 전념을 강조하는 것은, 무한 탐색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분명히 탐색이 필요한 시기가 있다. 또, 전념이 언제나 좋은 것도 아니다. 시야가 좁아져서 중요한 정보를 놓치고 전체 숲을 보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념>의 저자가 전념을 강조한 것은 지금 우리는 너무 많은 선택지에 놓여있고,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방황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각에 관한 생각>에서 데니얼 카너먼이 인간의 정신활동을 시스템 1과 시스템 2로 구분한 것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해보면, 인류 초기 궁핍한 세계에서 인간의 생존에 이로웠던 시스템1 (빠르고 직관적인, 의식하지 않고 생각하는 활동)도 필요하지만, 거기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시스템2 (느리고 숙고를 요하는 활동)를 놓치고 있다면 여기에도 집중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즉 더 많은 에너지를 소비해야 하는 일, 장래의 막연한 보상을 위해 오늘의 수고와 노력을 등한시하게 된 많은 사람들에게 전념은 꼭 필요하다.


첫 문장에서 말했듯이 나는 '다정하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러려면 순간적으로, 길을 지나다가 우연히, 순간적으로, 혹은 남에게 보이기 위해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평소 훈련이 필요하다. 도움을 줄 수 있으려면 여유가 있어야 하고 지식과 내공이 있어야 한다. 누군가에게 친절하려면 매일 일어나는 수많은 분노에서 나를 돌아보고 반성하고 참는 일련의 훈련 과정이 필요하다. 아이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매일 기도와 반성과 사과로 훈련하는 한편, 1년 동안 매월 50킬로를 달리고 걷겠다는 나와의 약속을 지켰다. 1년 동안 매일 11시에 45분 동안 책을 읽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3년 동안 매주 혹은 2-3주에 한 번씩 씽큐베이션에서 진행되는 마감 기한을 놓친 적 없이 글을 썼다. 하나 하나를 할 때마다 과연 이걸 해서 도움이 될까? 싶었다. 하지만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불과 3년 전의 나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할 정도로 변화를 만들어낸 것은 저 행동들이 쌓인 덕분이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전념은 어떤 영웅적인 순간들이 모인 것이 아니다. 일상의 지루하고 반복적인 순간들이 모이다 보면 변화는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


아이들에게 화를 내기 전과 후, 나의 빡침을 다스리기 위해 책상 옆에 붙여 놓은 메모...


내가 정의하는 전념은 다른 선택을 포기하는 것, 오래 참는 것이다. 그래서 어렵고 그래서 아무나 해내지 못한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포기는 내 행복을 포기하는 희생과는 분명히 다르다. 내가 이것을 포기함으로써 다른 것을 경험할 시간은 줄어들지만 대신, 더 깊이 경험할 수 있다. 그리고 어떤 행위에 깊게 몰입하는 것은 결국 행복감과 이어진다. <전념>에서 저자는 이것을 "자발적 전념"이라고 부른다. 이 '자발적 전념'의 시간이 오랫동안 지속되었을 때, 삶은 더 깊어진다. 그리고 그 폭발력은 그 자신도 예상한 것 그 이상이 될 것이다. 노파심에서 말하지만 그 폭발력은 남에게 보여지기 위한 것이 아니다. 내 전념의 시간을 통해 꽃 한 송이를 피워냈다면, 그것조차 위대하다.


전념하기의 핵심은 시간을 통제하는 것에 있다.
죽음은 삶의 길이를 통제한다.
그러나 삶의 깊이를 통제하는 것은 나 자신이다.
-<전념>, 피트 데이비스


*본 콘텐츠는 제작비를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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