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년처럼 혼자 부엌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울기도 많이 울었고, 죽음과 꽤나 가까운 곳까지 가보려고 생각하기도 했다. 힘들었다는 표현이 부족할 만큼 지쳐있었다.
그때 내겐 정말이지 아무도 없었다.
그런 시체와 다를 바 없는 웃음기 사라진 엄마가 뭐 그리 좋다고, 아이들은 서로 나를 차지하려는 마음에 종일 엄마를 불러댔다. 싸우기는 또 얼마나 미친 듯이 싸워대는지 싸우다 불리해지면 고래고래 엄마를 찾는 아이들 틈에서 점점 더 미쳐버릴 것 같은 심정으로 하루를 버티듯 꾸역꾸역 살아내는 중이었다.
남편은 평일도 주말도 쉬는 날 없이 출근을 했다. 나는 늘 밤 10시에 밥을 차렸고 남편도 지친 삶으로 집에서는 시체처럼 아무것도 하려 하지 않았다. 남편의 코 푼 휴지, 쓰다 둔 치실까지도 마저도 내 몫이었다.
나… 너무 힘들어”
어느 날, 내가 남편에게 말을 꺼냈다.
다들 그렇게 힘들게 살아. 그럼 같이 죽을까......”
꾸역꾸역 하루를 살아오던 남편 역시, 날 위로해 줄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
“ ……”
똑같이 지쳐있고 공감해 줄 수 없는 남편에게 난 더 이상 할 말도 없었다. 원래 회사생활을 하던 남편이 주말도 없는 자영업을 하면서 하루도 바람 잦을 일 없는 현실에 남편도 체력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쳐 벼랑 끝에 서 있는 사람 같았다.
그 이후로는 나는 남편에게 더 이상 내 우울한 감정을 말하지 않았다. 남편 또한 나를 도와줄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남편도 버텨나가기 힘든 상태라 나를 돌보아줄 여유가 없었다.
나는 혼자였다. 남편과 아이들이 있었지만 혼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외롭고 우울했다. 삶의 의지도 없었다.
‘이번 생은 틀렸다.
그냥 이번 생은 나를 생각하지 말자’
그리고 그냥 그게 내 삶이라고 생각하고 지옥 같은 삶도 그냥 내 것이라 생각하고 그냥 그렇게 하루하루 살아갔다. 복잡했던 머릿속의 생각들도 모두 묶어 두었다. 내 머릿속은 더 이상 별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냥 살았다. 내가 할 일을 하고, 화가 나는 감정들은 모두 마음속에서 묻어 버렸다.
그러다 보니 불면증에 시달릴 정도로 생각이 많던 내 머릿속은 오히려 단순해졌다. 별다른 감정이 들지 않았다. 좋은 것을 봐도, 싫은 것을 봐도 별 감흥이 없었다. 무엇인가 해보고 싶은 것도 좋은 것도 점점 사라져 갔다.
나는 그렇게 나를 버렸다.
그렇게 마흔을 살아내던 나는 내가 유방암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 암이구나!’
그런데 나는 사실, 그리 절망스럽지 않았다.
‘나를 포기한 나’는 내가 암이라는 사실이 크게 내게 절망적이지 않았다. 계속 나쁜 일들이 겹치고 겹쳐오던 내게 솔직히 말해, 그냥 자연스러운 것, 그냥 그럴만한 것처럼 느껴졌다. 내 상황에서 내가 아프지 않다는 것은 오히려 더 이상할 정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종진단을 받은 내 병의 상태는 큰 사이즈의 암덩어리에 비해, 다행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유관 안에서만 퍼진 상황이었고 침윤이 되지 않아 아주 운 좋게(?) 부분절제로 끝낼 수 있었다. 물론 오른쪽 가슴 전절제와 부분절제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었고, 나는 위험성은 남겨두더라도 조금이라도 내 가슴을 남겨두고 싶어 부분절제수술을 선택했다. 나는 부분절제와 항암 패스를 할 수 있는 상황을 행복해해야 했다.
20회의 방사선치료와 5년 동안의 항암약 처방. 그렇게 내 유방암 치료를 받았다. 항암패스는 그 당시 내가 부릴 수 있는 사치스러운 행복이었다.
나는 유방암 환자가 되어서야 나를 짓누르던 짐들에서 조금 벗어날 수 있었다.
그동안 나는 독박육아 외에도 남편을 도와왔다. 남편은 식당 인원이 부족할 때마다 나를 불렀었고, 나는 몇 년 동안 <5분 대기조> 마냥 아이들 등교 후에도 남편의 sos를 기다려야만 했었다. 지인들과 점심약속을 하다가도 뛰쳐나간 적도 적지 않았다. 이렇게 내 직업은 두 번째 식당의 <사장님>이자 <프로 대타러>, <프로 땜빵러>였다. ‘J’ 성향인 사람들은 잘 알 것이다. 갑자기 계획에 없던 일들을 해야 하는 것이 J형 인간에게 얼마나 스트레스인 말이다.
나는 남편에게 선언했다. “나, 이제 못 나가”
직원, 알바가 없으면 없는 대로 식당문을 닫기도 하고 남편 혼자서 죽이 되던 밥이 되던 그렇게 식당 두 곳을 운영해 갔다.
아이들에게도 ‘엄마가 아프니까’라는 핑계를 댔다. 아이들도 이전보다 나를 쟁취하려 덜 싸우고 엄마를 덜 찾으려 노력하는 게 보였다. 무엇보다도 엄마가 어떻게 될까 봐 노심초사 걱정하는 아이들의 모습과 눈물이 보였다.
지긋지긋한 시부모님의 잔소리가 줄었다.
그리고 나는 남의 자식처럼 생각하던 친정엄마가 나를 챙겨주기 시작했다.
그렇게 내 유방암은 나에게 무기가 되어주고 방패가 되어 주었다.
남편도 친정엄마도 없이 매일 혼자서 대학병원을 다니며 20회 방사선 치료를 마쳤다.
아이들 하교시간에 맞춰 부랴부랴 식당에서 나오고 때로는 애 둘을 데리고 식당과 학원 집을 왔다 갔다, 집안살림과 육아와 교육은 100퍼센트 내 담당으로 고군분투하는 정신없는 삶을 살아내던 나는 규칙적으로 공부를 한다던가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은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내게 방사선 치료 후 갖게 된 오전시간은 정말 꿀같았다. 하지만 내 마음과 다르게 방사선치료의 후유증은 꽤 힘들었다. 내 몸을 계속 무기력하게 만들고 울렁거리는 속을 잠재우기 어려웠다. 간신히 아이들 등교시키고 난 후 소파에 거의 누워 지냈다. 나는 힘이 없었고 무기력하여 무언가를 할 수가 없었다.
여느 날처럼 소파에 누워 무기력하게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던 차였던가, 내 눈에 ‘그림책심리지도사’라는 단어가 들어왔다.
집 앞에 있는 도서관에서 곧 개설되는 수업에 대한 홍보였다. 정말 우연히 보게 된 글이었고, 무엇에 홀린 듯 신청 시간을 내 핸드폰에 예약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림책 심리 지도사 과정은 5분 만에 신청마감이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