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나왔다.
평범하지 않은 나의 평범한 가출 이유
그 시작은 참으로 미약했다.
흔하디 흔한 모녀 싸움이었고, 고집 센 성격마저 똑같이 닮은 엄마와 나는 누구 하나 잘못을 시인하지 않았다.
결국 저 어딘가 깊게 묵혀두었던, 꼬깃꼬깃한 주머니가 터져버렸다.
혹여 한 줌 소리라도 새어 나갈까 베개에 입을 파묻고 악을 지르던 나는,
눈물과 침 자국이 그대로 남은 베개를 내려다보고 결심했다.
'이곳을 떠나자.'
그래, 떠나자.
대단히도 충동적인 생각이었지만 그리 쉽게 결정한 것도 아니었다. 늘, 언제부턴가 항상 나는 떠나고 싶었다.
가정폭력, 아버지나 어머니의 부재, 산더미 같은 빚,
그런 건 아무것도 없었다.
가족은 화목했고, 싸우고 욕하기보단 하하호호 웃는 날이 곱절은 많았다.
차라리 화목하지 않았다면 더 빨리 나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집.
따뜻하고 안락하고, 내가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곳.
쉼터가 되어야 할 집이건만 나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내가 동의하지 않은 것들이 '가족으로서의 당연한 의무'라는 이름이 되어 날 옥죄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삼키고 침묵해야 화목한 가정이 되는,
내 진심을 숨기고 나를 억압해야만 행복해지는,
착한 딸, 좋은 누나, 의젓한 어른의 롤을 수행해야만 진정한 가족이 될 수 있는 집이었다.
하지만 나는 사실 나를 절제하는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에, 늘 나의 세치 혀로 가족의 화목을 깨트렸다. 부모에게 나는 키우기 힘든 철 안 드는 딸이었고, 특이한 존재였고,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너는 대체 왜 항상 그러니?"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너밖에 없을 거다."
"어디 다른 데 가서 그러지 마라."
평범하지 않은 나, 보편적인 것이 통하지 않는 나.
이 타이틀은 과연 내가 만든 것일까? 가족이 만든 것일까?
한 때 나는 이런 내 존재가 죄송했다. 부모님이 불쌍했다.
평범하게 부모님이 하라는 대로 살고, 적당한 때에 시기적절한 길을 가고, 남들만큼 노력해서 남들처럼 살지 못하는 내가 당신들의 장녀라는 것이 죄송했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나이가 되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그래야만 한다.
나는 내 부모에게서 사람을 사람 자체로 사랑하는 것을 배우지 못했다.
물론 내 부모님은 나를 인정하고 칭찬해주었다.
내 존재 가치가 아닌 내 행동들을, 업적들을, 재능들을.
당신들이 원하는 길로 향할 때에서야 나는 사랑받았다.
물론 부모님이 원하는 길을 가지 않더라도 질타를 받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일의 결과는 매우 참혹하고 곤욕스러울 것이라는 '조언'을 빙자한 협박을 받았다.
'그래, 내가 집을 나가는 건 합리적이야.'
핑계일지 모를 짧은 결심을 하고, 날이 새는 대로 짐을 쌌다.
답답했던 집을 나오는 것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짐을 싸고, 나온다.
그리고 묵을 곳을 찾는다.
짐을 싸 나오는 건 언제든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그 이후 묵을 곳을 찾는 게 항상 난관이었다.
사실 직장이 없었다면 나는 참았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속에 있는 울분을 꾹꾹 담아 다시 가뒀을지도 모른다.
다행히도 나는 아르바이트로 모아둔 돈이 아주 조금 남아있었고, 카드 한도도 넉넉했고, 취업을 해 회사에 다니게 된 지 2주째 접어든 상태였다.
어떻게든 돈은 마련할 수 있겠지, 라는 무계획의 계획을 가지고 패기롭게 나온 나는 머릿속으로 계산을 해 보았다.
하지만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한 달도 채 안된 신입사원이 방을 구하기란 택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 결심을 도로 무르기엔, 용기를 내서 차곡차곡 쌓아둔 내 짐 보따리가 부끄러웠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 마른하늘에 비가 한 두 방울씩 내리기 시작했다.
우산을 사기에는 당장 며칠 동안 밖에서 지낼지 알 수가 없기에 쉽게 돈을 쓸 수 없었다. 결국 비가 그칠 때까지 버스정류장에서 가만히 앉아있었다.
그 때의 나는 오히려 웃고 있었다.
이제 진짜 안녕이구나.
드디어 내가 나로서 살 수 있겠구나.
어쩌면 대책 없이 무작정 나온 나의 가출이 너무나도 나다워서 웃음이 났는지도 모른다.
늘 나는 갑자기였다. 어느 날 갑자기 여행을 떠나고, 어느 날 갑자기 미래를 결정하곤 했다.
다행히 짧은 소나기가 물러가고 날이 밝아,
값싼 모텔방을 하나 구해 잠시 몸을 뉘었다.
지친 몸을 쉬고 나니 그제서야 걱정이 몰려왔다. 당장에 돈도 없을 뿐더러, 집을 구하기엔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지금의 현실을 몇 시간만이라도 잊고 싶어 TV를 틀었지만, 당장 내일부터는 어디에서 지내야 할지 막막해 눈앞이 흐렸다.
급하게 자료들을 찾아 공부하며 핸드폰을 네 시간쯤 들여다보고 슬슬 손가락에 감각이 없어질 때가 되어서야 결론이 났다.
'결국 고시원밖에 답이 없다'고.
나는 다음날 찾아가 볼 고시원들에 전화와 문자를 돌리기 시작했다.
'내일 바로 입주하려고 합니다. 방 좀 볼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