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기획 창 이생망을 보고
나는 2030 청년세대다. 친구들과 모이면 나는 청년세대가 가진 어렵고 힘든 점에 대해서 때때로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이야기가 끝날 때 나는 한 마디를 덧붙인다. '그래도 내가 청년세대를 대표하지는 않지...'
보통 그 지점에서 이야기가 끝났다. 서울에 살고, 흔히 말하는 명문대를 나오고, 대기업에 취업한 내가 청년세대를 대표하지 않는 사실은 인식하고 있지만, 그렇다면 "진짜" 청년세대를 대표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에 대해 구체적으로 고민한 적이 없었다.
그 고민을 구체적으로 할 수 있게 해 준 프로그램을 최근에 만났다. 바로 KBS 시사기획 창 '이생망(이십대 생존 비망록)'을 통해서였다.
(유튜브 주소: https://www.youtube.com/watch?v=FoizX5nX4bw)
올해 본 다큐 프로그램 중에 단연 1위로 꼽을 만큼 내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었고 과연 누가 청년세대를 대표하는가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를 준 프로그램이다.
프로그램에서는 여러 내용을 다루지만 내게 특히 의미 있었던 2가지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첫째, 공부방 계급론이다. 지금의 청년세대를 하나의 세대로 볼 수 없고, 현재 삶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 10대 시절 공부환경으로 계급을 구분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부모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충분한 사교육을 받으며 대입을 준비했던 상층, 어느 정도 지원을 부모에게서 받았지만 면학환경으로 따지면 부족함이 있었던 중층, 부모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었으며 사교육도 받지 못한 하층이 있다. 대입을 준비하는 환경이 모든 것을 결정하지는 않으나 상당한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 모두가 공감할 것이다. 이는 다큐를 제작하며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실증적으로 드러난다. 10대 시절 공부방 환경과 그 이후의 삶(대입, 취업, 커리어 그리고 현재 사회경제적 상황) 사이의 충분한 연관성이 존재한다.
공부방 계급론을 생각해보면 대표적으로 '수능은 공정하다'라는 주장을 비판해볼 수 있다. 흔히 주위에서 시험(수능, 고시 등)은 공정하고 특히 우리나라 모든 사람이 겪은 수능은 공정한 시험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종종 있다. 맞다. 수능은 같은 날에 주어진 시간 안에서 동일한 시험지를 푼다는 점에서 공정하다. 하지만 그것은 수능시험 당일에만 한정된 이야기다. 수능시험을 준비하는 과정, 그 과정에서 어떤 지원을 받았는가는 부모의 사회경제적 상황에 따라 크게 달랐을 것이다. 분명 성적은 개인의 의지가 반영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공부방 환경이 달랐으면 결과도 달라질 확률이 크다.
두 번째는 현재 주류 청년 담론이 주로 대학을 나오고 수도권에 거주하는 청년의 목소리에 초점을 두었다는 점이다. '좋은 일자리가 부족하다', '스펙 경쟁이 치열하다', '집값이 천정부지 오르고 있다'라는 이야기도 청년문제이긴 하지만, 모든 청년이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큐에서 소개하는 청년세대 공장 노동자는 생계를 위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공장 노동을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어린 나이에 신체를 다치는 사고를 입기도 했다. 당장 그들에게는 대기업의 일자리 개수, 스펙 경쟁, 집값보다는 하루하루의 생존이 중요하며 생계를 이어나가는 일터의 안전이 더 중요하다. 대학 졸업 후 취업이라는 문턱에 걸쳐진 청년세대의 현실도 무겁지만, 당장 생존과 안전이라는 문제와 맞닿뜨린 청년세대의 고민도 그 못지않게 무겁다.
일례로 이준석 국민의 힘 대표가 당선됐을 때 청년세대의 목소리가 이제 정치에 적극적으로 반영되겠다며 나를 포함한 많은 청년이 관심과 기대를 가졌다. 하지만 이 관심도 공부방 계급으로 따져보면 상층에 해당하는 청년들의 주관심사였을 뿐 하층에 해당하는 청년들의 관심사는 아니었다.
공부방 계급론으로 나를 따져보면 나는 중층 정도 공부방 환경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꼭 좋은 대학에 가서 성공하겠다기보다는 학비 부담을 스스로 해결하고 자식을 키우는 어머니의 고생에 보답의 의미로 공부를 했다. 다행히 반복해서 학습이 필요한 당시 입시교육과 내 성향이 잘 맞아서 나는 좋은 성적을 거뒀다. 그래서 서울의 명문대학에 진학했다. 혜택을 상상하며 대학에 온 것은 아니었지만 생각보다 내가 얻은 혜택은 많았다. 재원이 풍부해서 장학금을 받고 주로 학교를 다녔고, 외부활동에 지원해도 높은 확률로 선발되었다. 그리고 취업과정에서의 높은 서류 합격률도 학교가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이를 돌이켜보니 나는 좋은 대학에 갔다는 이유 하나로 사실 20대 초반의 삶에서 내가 들인 노력보다 더 큰 보상을 받고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현재 놓인 상황이 편하고 힘들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다. 서울에 살고, 흔히 말하는 명문대를 나오고, 대기업에 다니는 나 또한 앞으로 수도권에 내 집을 온전히 내 힘으로 구매하는 것을 상상하지 못하며, 내가 결혼을 해서 아이를 키울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그리고 필요인력이 줄어가는 산업환경 속에서 내 경쟁력이 사라지지 않을까 걱정된다.
하지만 그동안 혜택을 받은 나와 같은 청년도 우리나라에서 이렇게 살기가 힘든데, 그렇지 않은 청년은 얼마나 더 힘들까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만약에 청년 지원책이 한정된 자원을 사용할 수 있다면 혜택을 받은 나와 같은 청년보다는 그렇지 않은 청년에게 먼저 돌아가는 것이 맞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사실 같은 청년층에서 사회적 자원이 누구에게 우선될 것인가도 중요한 문제이지만, 그전에 현재의 기득권 세력이, 사회의 큰 정책을 결정하는 정부와 국회가, 청년문제를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얼마나 현실적인 대안을 내놓고 있는가가 더 중요하고 큰 문제일 것이다.
인구절벽, 지방 소멸, 저출생, 저성장, 사회 양극화 등 많은 문제가 매스컴을 도배한다. 이러한 문제는 자세히 보면 서로 다 얽혀있다. 그래서 어느 실타래를 풀어야 이 문제를 해결하고 좀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갈 수 있을지 헷갈린다. 하지만 나는 이 많은 문제를 해결하는 시작점이 '청년이 살만한 나라'를 만드는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청년이 살만해야 나라 경제도 성장하고 원한다면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을 수 있다. 이는 수도권이 아닌 지방 청년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어서 수도권이 아닌 곳에서도 충분히 괜찮은 삶을 영위할 수 있다면 지방 문제도 해결될 수 있다.
우리 사회의 어른들이 구호로서 '청년'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진정 이 나라의 미래와 존망이 '청년'에게 있다는 엄중한 인식을 갖고 나서 주기를 희망한다. 그때까지 나 또한 한 명의 청년으로 내 삶을 충실히 꾸려 가며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우리 청년세대가 좀 더 나은 삶을 꿈꿀 수 있게 조그마한 힘을 보태겠다고 다짐해본다.
최근 드라마 '갯마을 차차차'에서 이 긴 글의 핵심과 통하는 대사를 만나서,
아래 대사로 이 글을 마무리해본다.
그쪽은 본인이 잘났다고 생각하지?
머리 좋아 공부도 잘했을 테고 의사도 됐고 인생이 아주 탄탄대로였겠어
아... 물론 시련도 있었겠지 어쩌다가 덜컹하는 방지턱 같은 거
고작 그거 하나 넘으면서 역시 인생은 의지만 있으면 안 되는 게 없어 그랬을 테고...
(중략)
이봐요 의사 선생님 뭘 잘 모르시나 본데
인생이란 거 그렇게 공평하지 않아
평생이 울퉁불퉁 비포장도로인 사람도 있고
죽어라 달렸는데 그 끝이 낭떠러지인 사람도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