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가 된 지 한 달째의 일기
하늘을 나는 호텔, 혹은 비만 돌고래라는 별명을 가진 a380의 퍼스트 클래스에 남편과 단둘이 타고 파리에서 아부다비로 가고 있다. 퇴사 기념 여행의 마지막 여정이다.
A380은 현존하는 여객기 중에 가장 큰 사이즈이다. 총 2층인데, 에티하드 항공의 경우 1층은 이코노미, 2층은 비즈니스(뒤쪽)와 퍼스트(앞쪽)로 운영하고 있다. 나 같은 항공 덕후에게는 꿈의 항공기이고 좌석이다. 이 기종이 출시됐을 때부터 내 생에 이걸 탈 날이 올까 싶었던 바로 그 좌석이다.
사실 a380도 처음 타보는데, 퍼스트 클래스, 그것도 아파트먼트라니 실로 영화 타이타닉의 케이트 윈슬렛처럼 일등석 승객이 되었다고 하기에 손색없다. (아파트먼트는 에티하드 항공에서 운영하는 퍼스트 클래스 좌석 중 하나입니다. 1인석이 의자+소파 베드로 구성되어 있어요.)
인천공항에 이 항공기가 취항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 때다 싶었다. 10년 동안 차곡차곡 모은 아시아나 마일리지를 처음으로 털어보았다. 사실 항공 덕후인 나는 퍼스트 클래스를 밥 먹듯 타는 사람이 되는 게 꿈이라고 평소에도 장난처럼 말하곤 했다. 버킷 리스트에 거의 하나뿐인 아이템이었던 셈이다.
사실 항공 마일리지는 모으기도 어렵지만 쓰기는 더 어렵다. 특히나 에티하드 아파트먼트 같은 경우, 인천 출발이나 도착 노선에 많아야 단 2자리 만을 보너스 좌석으로 풀기 때문에 시간이 맞고 운이 따라야 잡을 수 있다. 과장을 약간 보태면 직장과 이 티켓을 맞바꾼 것인지도 모른다. 남편과 내가 둘 다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다면 이 티켓이 나오는 시간에 맞추긴 어려웠을 것이다. 나의 퇴사 기념 여행으로 안성맞춤이었다.
이곳은 모든 것이 좋다. 넓은 좌석, 극진한 서비스, 예쁜 식기, 고급스러운 음식,... 내 생에 이런 경험을 해보다니. 경험치로는 세계 최고인 것 같다.
나는 수수하고 검소한 편이지만 '항공기 일등석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누구일까?' 하는 동경 비슷한 궁금증 같은 것이 있었다. 내가 그 사람이 되어 그것을 경험해보니 '아, 이런 것이구나.', '이런 부분들이 좋음을 만드는 거구나.', 혹은 '이런 건 여기도 똑같구나.', '어쩔 수 없는 것도 있구나.'를 느낀다.
패스트 트랙, 비즈니스에 비해 조금씩 넓은 좌석, 조금씩 고급스러운 마감, 풀 사이즈의 식기, 예쁜 플레이팅, 이런 것들이 퍼스트를 만든다. 그러나 아무리 퍼스트 클래스에서 캐비어를 먹은들, 내가 집에서 한 계란말이가 더 맛있다. 두 사람이 앉아도 될 만큼 넓은 좌석과 침대로 변신하는 별도의 소파가 있다고 한들, 내 집 안방에 더 넓고 더 편안한 침대가 있다. 승객보다 더 많은 승무원이 우릴 위해 대기하고 있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으로 살 수 있는 서비스는 그리 편치만은 않다.
이번 여행에서 아무리 꿈의 일등석이라도 결국은 파리의 13제곱미터짜리 좁은 호텔방이 더 편안하다는 것을 체험했다. 그러므로 앞으로 이걸 탈 일 없는 나머지의 내 인생도 더 행복하다.
동경과 갈증이 없는 상태는 실로 엄청난 것이다. 이번 여행으로 인생의 엄청난 부분이 그렇게 되었다. 비행 내내 입에 달고 다녔던 더 이상 바랄 게 없다는 말이 아마 사실일지 모른다. (그 이후로 7개월이 지났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더군요.)
인간세상의 많은 버라이어티를 경험해보는 건 행운이다.
그건 또 내가 흙수저로 태어나 비교적 성공적인 인생길을 걷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금수저로 태어났으면 느끼지 못했을 많은 것들.
그리고 인생의 반을 훌쩍 넘게 함께한 남편이 있다. 남편은 언제나 내 옆에서 그의 느낌과 생각들, 내가 미처 놓쳤던 부분들을 공유하며 내 경험을 더 풍성하게 만들어준다.
지금껏 남편과 함께 걸어온, 그리고 앞으로도 함께할 내 인생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