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란히 앉아 흐르는 고독

슈베르트 피아노 듀오를 위한 환상곡 f단조 D.940

by 에리카
1006px-Franz_Schubert_by_Wilhelm_August_Rieder_1875.jpg Franz Schubert (1797~1828)

프란츠 슈베르트의 《Fantasy for Piano Four Hands in F minor, D.940(피아노 듀오를 위한 환상곡 f단조 D.940)》는 그의 생애 마지막 해인 1828년에 작곡된 작품입니다. 이 곡은 슈베르트가 남긴 피아노 듀오 작품 가운데에서도 가장 깊고 어두운 정서를 품고 있으며 그의 말년 음악 세계를 응축해 보여주는 대표작으로 꼽힙니다.


이 작품은 하나의 악장처럼 연주되지만 내부에는 서로 다른 성격의 장면들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처음 등장하는 어두운 주제는 곡 전체를 관통하며 다양한 모습으로 되돌아옵니다. 슈베르트는 이 반복과 변형을 통해 음악을 전진시키기보다는 같은 생각을 놓지 못한 채 조용히 되뇌는 듯한 인상을 남깁니다. 이 점에서 이 곡은 ‘이야기’라기보다 ‘사유’에 가까운 음악이라고 느껴집니다.


조성은 f단조입니다. 슈베르트에게 f단조는 종종 고독과 체념, 감내해야 할 운명을 상징하는 조성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곡에서도 그 음울한 색조는 처음부터 끝까지 쉽게 걷히지 않습니다. 두 연주자가 만들어내는 풍부한 음향 속에서도 음악은 결코 화려해지지 않고 다시금 긴장을 유지합니다.


중간에 등장하는 느린 부분은 장송 행진을 떠올리게 하는 리듬 위에서 조용히 흐릅니다. 감정을 격렬하게 드러내기보다는 이미 지나가 버린 것을 담담히 바라보는 시선에 가깝습니다. 슈베르트 특유의 절제된 비극성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후반부에서 나타나는 푸가 역시 이 작품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엄격한 대위법적 기법이 사용되지만, 이 음악은 질서를 회복하거나 승리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주제는 집요하게 반복되고 얽히며 결국 처음의 어두운 정서로 되돌아갑니다. 끝맺음마저도 명확한 해답보다는 ‘받아들임’에 가까운 태도를 보여줍니다.


lossy-page1-500px-Caroline_Esterhazy.tif.jpg Countess Caroline Esterházy (1811~1851)


이 환상곡은 카롤리네 폰 에스테르하지 백작부인에게 헌정되었습니다. 슈베르트는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여름 별장에서 음악 교사로 머물며 그녀를 알게 되었고 피아노와 노래를 가르치며 그녀와 음악을 매개로 한 교류를 이어갔습니다. 그러나 귀족 가문의 백작부인과 불안정한 삶을 살던 작곡가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사회적 거리가 존재했습니다.


zeliezovce_04-1200x640.jpg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여름 별장 내 음악실


슈베르트가 그녀에게 깊은 감정을 품고 있었을 가능성은 여러 증언을 통해 전해지지만 그는 그것을 구체적인 고백으로 남기지 않았습니다. 대신 자신의 삶이 저물어가던 시기에 쓴 이 음악 속에 조용히 접어 두었습니다. 전해지는 일화에 따르면 카롤리네가 “왜 저에게 헌정된 곡이 없나요?”라고 묻자, 슈베르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어차피 모든 곡이 당신을 향한 헌정곡이니까요.”


그는 자신과 같은 감정을 그녀에게 요구하지 않았고, 설명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미 음악 전체가 그 마음을 대신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요.


이 곡에 담긴 정서는 열정적인 사랑의 언어라기보다 오래 눌러 담은 사유와 절제에 가깝습니다.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연주해야 하는 1 Piano 4 Hands라는 형식 또한 의미심장합니다. 서로를 마주 보지 않고 같은 건반 위에서 나란히 앉아 호흡을 나누는 음악. 슈베르트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음악 안에서만 가능한 거리로 남겨두었고, 그 거리야말로 이 작품이 지닌 가장 깊은 울림이 되었습니다.


저는 이 곡이 슈베르트가 말년에 도달한 음악적 언어와 삶을 대하는 태도가 가장 정직하게 남아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끝을 알고 있었기에 더 이상 꾸미지 않아도 되었던 음악. 이 곡은 개인적 감정과 예술적 성찰이 겹쳐진 결과물로 삶 전체를 관통한 고독과 사유의 기록에 가깝습니다. 연주자에게는 기교보다 집중력과 서로를 향한 신뢰와 조화가 필요하며 듣는 이에게는 조용히 마음을 가라앉히는 시간을 건넵니다.


https://youtu.be/9_KYkpu1cBQ?si=AH1MFyJjHT3eMihM

Maria João Pires / Julien Brocal

(시작할 때 화면에 c minor로 조성이 잘못 표기되어 있습니다. 이 곡의 조성은 f minor 입니다.)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