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김소연
어두운 복도에서
불도 켜지 않고
신발도 벗지 않고
그대로 벽에 등을 붙이고 있었다
아주 조용히
무언가를 지나고 있는 중이었다
거미
-이면우
오솔길 가운데 낯선 거미줄
아침이슬 반짝하니 거기 있음을 알겠다
허리 굽혀 갔다, 되짚어오다 고추잠자리
망에 걸려 파닥이는 걸 보았다
작은 삶 하나, 거미줄로 숲 전체를 흔들고 있다
함께 흔들리며 거미는 자신의 때를 엿보고 있다
순간 땀 식은 등 아프도록 시리다
그래, 내가 열아홉이라면 저 투명한 날개를
망에서 떼어내 바람 속으로 되돌릴 수 있겠지
적어도 스물아홉, 서른아홉이라면 짐짓
몸 전체로 망을 밀고 가도 좋을 게다
그러나 나는 지금 마흔아홉
홀로 망을 짜던 거미의 마음을 엿볼 나이
지금 흔들리는 건 가을 거미의 외로움임을 안다
캄캄한 뱃속, 들끓는 욕망을 바로 지금,
부신 햇살 속에
저토록 살아 꿈틀대는 걸로 바꿔놓고자
밤을 지새운 거미, 필사의 그물 짜기를 나는 안다
이제 곧 겨울이 잇대 올 것이다
이윽고 파닥 거림 뜸해지고
그쯤에서 거미는 궁리를 마쳤던가
슬슬 잠자리 가까이 다가가기 시작했다
나는 허리 굽혀, 거미줄 아래 오솔길 따라
채 해결 안 된 사람의 일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흰 책
-정끝별
덮인 책 위에
먼지가 쌓인다
그걸 털어내지 않는다
그저 매일 책을 한 번쯤 쳐다볼 뿐
아무도 모르게
책은 조금씩 안쪽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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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어른이 되어간다는 건,
책임을 지며 그대로 놔두는 것.
숲을 봐야 한다는 것.
보이지 않는 마음도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