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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읽는 약사언니 Jul 20. 2020

도피충

도피의 또 다른 이름은? 


 세상에 너무 잘난 사람들이 많아 보일 때, 친구가 성공할 때, 내 삶이 공허하게 느껴져 회의감이 들 때, 정답을 찾고 싶은데 길이 보이지 않을 때, 그래서 결국 나 자신이 작게 만 보일 때 우리는 도피를 하고 싶어 진다.


 언제부터 나의 도피가 시작되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배앓이를 했던 어린 나에게 엄마가 약이라는 것의 쓴 맛을 알려 주었을 때 즈음이었을까? ‘공부’라는 큰 산의 존재를 알지 못한 채 가나다라마바사라는 글자들을 외우며 마치 훈민정음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을 때 즈음이었을까?    


 도피, 그것은 어쩌면 모든 인간의 본능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종종 도피를 꿈꾼다. 도피를 통하여 현실에서 도망치는 것에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도피의 다른 이름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펼쳐지고 있는 ‘새로운 도전’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기에 그러했다. 




 어린 시절 도피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유학이었다. 사춘기였을까? 고2라는 중요한 시기에 나는 유학이라는 게 가고 싶어 졌다. 현실성이 없는 이야기였다. 곧 수능이었고, 학점관리에 수능 공부에 온 힘을 쏟아도 모자란 게 시간인 시기였다. 


 당시 재학 중이었던 진명여고에서는 ‘희망 직업인과의 만남’이라고 하여 내가 되고 싶은 직업을 적어 신청하면, 실제로 그 직업 종사자를 모셔서 그 직업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는 행사가 있었다. 희망 직업인을 직접 만나 그 직업인이 되기 위해 필요한 구체적인 과정, 보람, 전망 등의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유익한 행사였다. 그쯤에 현타가 왔다. 내가 과연 어떠한 직업을 꿈꿔도 되는 게 맞나? 일단 점수에 맞춰서 가장 좋은 학교에 들어가야지 되는 게 아닌가? 한 치 앞만 보고 달려도 벅찬 시간들이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희망 직업 강좌를 신청했지만, 강좌가 끝난 후에 나는 더 깊은 멘붕에 빠졌다. 그동안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뭔지 적극적으로 고민해 보지 않았던 것의 결과였다. 


 친구들과 경쟁하는 것에 마음이 불편해져 갔다. 자신의 노트필기를 빌려주지 않으려는 친구가 원망스럽고 쪼잔하게 느껴져 내 노트필기를 요구하는 친구들에게 선뜻 나의 노트를 내어 주었지만, 학년이 올라갈수록 나의 노트필기를 돌려보려는 친구들이 부담스러워졌다. 왜 수업시간에 본인은 자면서 내 노트를 보려고 하는 건지 사실 조금씩 미운 마음들이 생기기 시작했던 것도 같다. 


 나와 등수가 비슷한 친구네 집이 우리 집에서 보이던 때가 있었다. 친구 방의 불이 꺼져있는지 아닌지 우리 집 거실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때쯤이었다. 그 친구 방에 불이 꺼질 때까지 내가 공부를 멈추지 않았던 것이.


 나에게 필요한 것은 자아를 찾아가는 시간이었다. 사랑하는 친구들과 나를 비교하는 경쟁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리고 인생에 다시 오지 않은 가장 큰 결정, 유학을 결심했다.

 



 어른 시절의 도피는 사실 손에 꼽기도 힘들다. 언제부터 내가 나 자신을 어른이라고 생각했는지 기억도 나질 않는다. 20살 초반, 대학생의 신분으로 과외를 몇 번 한 적이 있다. 단지 갓 스무 살을 넘긴 나에게 과외학생들의 학부모님이 나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과외비를 쥐어 주실 때, 처음 듣는 선생님 소리에 닭살이 돋고, 나를 불렀나 싶었을 때. 나에게 학생이 생겼다는 책임감과 사명감이 나를 짓눌렀을 때, 그때쯤이었을까? 


 어른 시절의 도피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은 친구, 연인과의 관계에서의 도피였다. 어린 시절에는 학업에 대한 것이 친구들과의 주된 대화 내용이었다. 얕은 대화만 해도 좋은 친구사이가 유지되는데 문제없었다. 어른이 되어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들이 너와 나의 생각이 같은지 다른지  구별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친구도 연인도 잘 조절해 보려고 노력은 했지만 결국 나와 맞지 않는 부분들이 부각되었을 때, 그 사람이 나의 존재에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고 생각되어 슬퍼졌을 때 나는 도피를 하였다.  


 또 다른 도피는 직장에서의 도피였다. 귀국하여서 처음으로 연구소에 연구원 겸 대학원생으로 근무할 때였다. 암이 생기는 경로들을 찾아내어 그 경로를 차단하는 신약을 개발하는 연구실이었다. 타지에서 근 10년간 생활을 하다가 같은 민족인 한국인들과 함께 일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너무 부풀어 있었던 탓이었을까? 단연코 연구실에서의 생활은 잊고 있었던 한국의 수직적인 사회구조를 단시간에 익힐 수 있었던 경험이었다. 


 세포를 배양하고 동물에 실험을 하는 등 신약 연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던 나에게 사수라는 사람이 배정되었다. 당시 나는 기본적인 실험실 기자재에 대한 용어조차 제대로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사수가 한번 말하는 것을 다 기억할 수가 없었다. 공책을 들고 다니며 노트를 적고, 복습을 해도 매일매일 새로운 것을 배워야 했기 때문에 재미있었지만 빨리 잘하고 싶은데, 배워야 할 것 투성이인 나 자신이 원망스럽기도 했던 시간이었다. 


 나의 사수는 똑같은 말을 두 번 하는 것을 싫어하는 분이셨는데, 내가 똑같은 것을 두 번 물어보면 화를 내면서 혼잣말로 욕을 하기도 하였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웠지만 한국에서 처음 하는 사회생활이라 원래 한국은 이런가 하면서 견디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험한 말을 듣는 것이 불편해졌고 모르는 것을 그냥 넘어가게 되는 나 자신을 발견하며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연구실에 출근하면서 오늘은 사수가 기분이 좋았으면 좋겠다고 기도하며 두려움에 떨면서 출근하는 날들도 잦아졌다. 


10년간 미국에 살면서 이제 막 고국에 돌아왔는데, 한국이 다른 나라인 것처럼 느껴졌다. 새롭게 느껴지는 나의 나라와 문화, 새로운 사람들, 새로운 환경, 새로운 지식들에 적응하며 연구실 업무에 까지 적응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경직된 마음으로 출근하던 어느 날, 배양하고 있는 세포의 사진을 찍는 현미경의 작동법을 배우는 날이었다. 현미경에 연결된 컴퓨터에 내 세포사진을 저장하려면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서 내가 원하는 폴더까지 들어가야 했는데, 필기하다가 중간 스텝을 놓쳐서 다시 물어본 그 순간. 


‘퍽!’ 내 뒤통수를 시원하게 갈기며 “내가 방금 말했지!” 라며 소리쳤다. 그 순간 억누르고 있던 나의 설움이 폭발했다. 그 길로 화장실에 가서 한 시간쯤 울고 난 후, 실험실 담당 교수님께 가서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하아, 이런,, 어른 시절의 나는 어린 시절의 도피가 그립기까지 했다. 


 나는 종종 도피를 했고, 그것은 나의 선택이었다. 결과적으로만 본다면 분명 좋은 도피도 있었고, 나쁜 도피도 있었을 것이며, 그것이 어떤 종류의 도피였는지 깨닫기까지 오랜 세월이 걸릴 수도 있다. 이런저런 경험들 속에서 나는 나의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 다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깨달았다.   

   



 

도피의 또 다른 이름은 도전이며, 

 현실에서 도망쳤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또 다른 도전을 향해 첫 발자국을 내딛는 순간임을.      


 여러분은 어떤 도피, 아니 어떤 도전을 하고 있는가? 

 

독일의 대 문학가 괴테가 말했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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