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골쥐 Dec 05. 2020

소심한 번역가, 이탈리아의 섬이 되다

극소심 AB형의 해외 생존기

나는 이탈리아에 살고 있는 12년 차 번역가다.

전혀 유명한 번역가는 아니고, 에이전시를 통해 통일성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도 없는 이런저런 책들을 스무 권 정도 번역했다.

출판 번역으로는 먹고살기가 힘든 관계로 커머셜 번역도 병행한다. 커머셜 번역은 요율이 좋은 해외 에이전시와 거래한다. 여기저기서 번 돈을 다 끌어모으면 예전에 대기업에 다닐 때와 얼추 비슷한 월급을 손에 쥘 수 있다. 다만 회사에 다닐 때는 멍 때리는 시간도 업무 시간으로 계산되어 월급을 받았지만, 지금은 키보드를 두드려 한 단어 번역할 때마다 요율에 따라 xx원 버는 것이 다를 뿐. (이렇게 이야기하면 회사원 친구들은 '회사에서 멍리는 시간이 어디 있냐'며 발끈하지만 말이다)


이태리어를 전공한 것은 아니다. 심지어 이탈리아에 산 지 3년이 넘어가는데, 사실 나는 이곳에서 영어로 서바이벌 중이다. 

이탈리아에 와서 살게 될 거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어쩌다 남편이 이탈리아에 취직을 하게 되면서 얼결에 자리 잡으면서도, 여기 몇 년이나 살겠어, 애들 더 크기 전에 말 통하는 다른 나라로 옮겨야지 하고만 생각했다. 

"그래도 이탈리아에 사는데 말은 배워야 진짜 이탈리아를 경험할 수 있지."

누군가가 말하면 

"언제 떠날지도 모르는데 그게 무슨 소용? 게다가 하루하루 번역 일로 너무 바빠."

하고 답하기 바빴다.


그렇게 나는 이탈리아의 섬이 되었다.

바다에 홀로 둥둥 떠있어, 옆 섬에 닿으려면 큰 마음 먹고 배를 띄워야 하는 그런 섬.


사실 한국에서 30년을 꼬박, 토종 한국인으로 살며 나는 고립된 섬과는 거리가 먼 인생을 살았다.

언제나 주위에 사람들이 북적였고, 나는 꽤나 중심에 서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난 10년 동안 남편을 따라 한국을 떠나 영국, 중국을 거쳐 이탈리아에 와서 살게 되며 나는 중심과 점점 멀어졌다.

내 고민을 들어주던 한 친구는 우리 나이쯤 되면 한국에 살아도 섬이 되기는 마찬가지라고 말해주었다.

각자의 가치관, 상황에 갇혀 가족 건사하고 일하기 바빠 누구와도 소통하지 못하고 고립되기는 마찬가지라고. 그런 친구의 말이 조금은 위로가 되었지만 내 나라에서 섬이 되는 것과 낯선 나라에 이방인으로 살며 섬이 되는 것은 또 조금 다른 이야기일 것이다.


내가 사는 동네의 사람들은 보통 태어난 동네에서 쭈욱 자라고,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같은 친구들과 함께 다니며(초등학교 1-5년은 학급과 선생님도 바뀌지 않는다) 단단한 자기만의 인간관계를 형성한다. 가족을 중심으로 동네, 학교 친구들이 더해진 그 서클은 평생 가는 인간관계가 되고, 그 안에서 모든 감정의 필요가 충족되므로 그 서클 밖에서 새로운 친구를 찾으려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아마도 그 서클이 완벽하게 형성되지 않은 10대, 그리고 밀라노 같은 코즈모폴리탄에 사는 젊은이들이라면 조금 다를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보통 만나게 되는 아이들 학교의 학부모는 다 40~50대에, 이 도시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들의 단단한 서클은 뚫고 들어가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리고 내 쪽에서도 뚫고 들어갈 의지가 전혀 없다. 게다가 앞서 말한 것처럼 나는 이탈리아에 온 지 3년이 넘었는데도 이태리어에 진전이 거의 없다. 누구라도 아, 저 여자는 이탈리아에 정착할 생각이 없구나 생각할 거다. 그러니 더더욱 사람들과 섞이기 어려워지는 악순환이 계속될 수밖에.


북부 이탈리아 도시에 3년 살며 나는 화목하지 않은 가정에서 눈칫밥 먹고 자란 어린 아이처럼 눈치가 빨라졌다. 이제 나는 사람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상대의 나에 대한 호감도를 그의 아우라만으로 귀신같이 판단하고, 그에 맞춰 처신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지난 세월 나를 짓눌러온 한국식 예절교육을 벗어나 내게 친절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나도 친절할 필요 없다는 진리를 알고, 이를 실천에 옮길 수도 있게 되었다.


물론 여기서 좋은 사람들을 전혀 만나지 못했다는 건 아니다.

우리 가족을 알뜰살뜰 챙겨주는 이탈리아 친구들도 있고, 코로나 전까지만 해도 한 달에 한 번씩은 집에 초대해 저녁식사를 함께 한 가족들도 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극소심 AB형 번역가, 인간관계에 서툰 나라는 인간이 살기에 이 도시는 적대적이다.

그나마 매일매일 바쁘게 쳐내야 할 일이 있기에 외로움을 느낄 시간이 없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언젠가부터 사람들과의 소통이 고팠다. 머릿속에 둥둥 부유하는 생각들을 글자에 차분하고 정갈하게 담아내어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는 그이들의 동감을 듣고 싶었다. 그래서 이렇게 용기를 내어본다. 이탈리아의 한 섬이 쓰는 이 글들이 한국에 그리고 전 세계에 나와 같이 둥둥 떠다니는 섬들에게 가닿길 바라는 마음이다.






























작가의 이전글 팬데믹 속 슬기로운 이탈리아 생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