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직장 생활을 하던 때, 내게 휴가는 일년에 고작 한 번 주어지는 그래서 반드시 야무지게, 누구라도 부러워하게 보내야할 황금같은 시간이었다.
직장시절에는 여름 휴가 6개월 전부터 계획을 짜고, 앞뒤로 주말을 붙여 최장 열흘 정도 일정으로 유럽이며 일본이며 목돈 들여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휴가 내내 하루하루 짧아지는 내 소중한 휴가에 눈물을 찔끔이며 아쉬워했던 기억이 난다. 이렇게 여행만 다니며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 출근하기 정말 싫다 하고 노래를 불렀더랬다.
그 시절 소원대로 나는 일년에 유급휴가만 1달이 넘고 그외 휴일도 한 달에 달하는 이탈리아에 살고 있다. 소원성취를 한 것인가? 옛날 내 모습을 생각해보면 그런 것도 같다. 하지만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는다고, 일년 고작 10일의 휴가를 즐기다 노는 날이 너무나 많은 나라에 살려니 여기엔 또 나름대로의 고충이 있다.
먼저 지출이 많아진다. 이건 유럽 친구들 대부분이 동의하는 바다. 한 달 동안 집에만 쳐박혀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니, 어디라도 떠나게 되고 거기서 숙소비, 식사비, 비행기 및 차량 이동비 등 각종 비용이 발생한다. 게다가 이탈리아는 (그리고 건너 듣기로는 프랑스도) 여름휴가가 인생의 목표 같은 나라다. 이곳 사람들은 얼마 되지도 않는 연봉 그리 아끼지도 않으며 살다가, 남은 돈은 모조리 여름휴가에 쏟아붓는 것 같다. 여름 휴가 6개월 전부터 유명 휴양지의 좋은 숙소들은 일찌감치 마감되는데 1달 단위로 숙소와 바닷가 파라솔을 빌리는 경우도 많다. 초여름부터는 누구를 만나도 휴가 얘기 뿐이다. 그러다보니 나도 휴가는 꼭 어딘가로 떠나 즐겨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달까.
분명 나도 이런 삶을 원했던 것 같은데...그런데 막상 겪어보니 마냥 좋지만은 않다. 꼭 지출이 많아서만은 아니다. 태생이 개미같이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라 그런가, 너무 오래 노는 것도 정말 힘들다. 매년 나는 이번 휴가는 집에서 좀 쉬어야지 하다가 2주 이상 되는 휴가가 다가오면 무조건 애 둘, 남편을 데리고 여행을 떠나 내 돈주고 사서 고생하고 돌아오는 시행착오를 반복했다. 언제까지 유럽에서 살지 알 수 없는 일이니 있는 동안 충분히 즐기자 라는 생각이 컸다. 게다가 내가 사는 이탈리아 북부 토리노는 차로 한 시간 반을 달리면 프랑스 국경을 넘을 수 있고, 2시간 여를 달리면 스위스가 나올 만큼 최적의 여행 입지를 자랑하는 터다. 시간 낭비 말고 어딘가를 가야한다는 강박이 생길 수밖에.
그런 말이 있지 않나, 소는 움직이면 똥을 싸고 인간은 움직이면 돈을 쓴다고. 아무리 가까운 도시로 떠나도 여행비는 꽤나 만만찮게 발생했다. 그래도 나는 이런 여행비는 인생 투자라고 생각해야 한다며 거의 매 휴가에 이탈리아, 스웨덴, 슬로베니아, 영국 등지로 여행을 떠났다. 그래도 한국에서 떠나온 것보다야 싸니까 하고 자위하면서 그리고 아이들이 두 눈에 새로운 문화와 풍경을 가득 담을 수 있길 바라면서. 물론 그 여행들을 모두 후회하는 것은 아니다. 충분히 값진 경험이었고 귀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내게 휴가는 편안하게 쉬는 시간이 아니라, 내 돈 내고 사서 고생하는 빡센 극기훈련 일정이 되어버렸다.
매년 여름 다녔던 뜨거운 지중해
주말이면 유명 와인 산지 바롤로로 가끔 드라이브를 간다
구석구석 볼 데 많은 이탈리아...물론 다 코로나 이전 이야기다
애 둘 데리고 여행은, 아시겠지만 그닥 낭만적이지 않습니다
그랬기에 이번 크리스마스 연휴는 내게 아주 특별했다. 이탈리아에 온지 4년 차, 이렇게 보름 넘는 기간 동안 집에만 있어본 것은 처음이다. 코로나 때문에 이번 크리스마스 연휴 동안 강력한 록다운이 시행됐기 때문이다. 그래도 떠날 사람들은 주(州)간 이동이 금지되기 전에 가족이 있는 지역이나 산속 별장으로 떠난 모양이지만, 방문할 가족도 없고 이 시국에 산에 놀러가고 싶지도 않았던 우리는 집에서 지지고 볶기로 했다.
게다가 나는 심각한 번아웃 상태였다. 집에서 놀면 뭐하나, 어차피 록다운이라 어디도 못가는데 하는 마음에 하나 둘 받은 일이 쌓여, 밥먹고 청소하는 시간 빼고는 내내 앉아 일을 해야 하는 정신없는 나날이 계속되고 있었다.주말에도 하루는 일을 했고,12월 마지막 프로젝트는 성탄절인 25일에 마감이었을 정도. 나는 마지막 프로젝트만 끝나면 좀 푹 쉬고 싶었다.
그래서 우리는 엄청나게 많은 식료품을 사다 쟁여놓고, 집콕 놀이를 시작했다. 삼시세끼 해먹는 게 일이라지만, 번역일이 멈추니 내 식구들 입으로 들어가는 요리 정도는 일같지도 않게 느껴졌다. (물론 처음 며칠 동안만 하하) 새로 장만한 빔 프로젝터로 대형 화면으로 아이들과 '백투더퓨처' 시리즈를 보고, 늘어져 웹서핑을 하거나 책을 읽다 새벽 2~3시가 되어 잠이 들고, 아침 10시 넘어 일어나는 게 일상이 되어 대륙을 건너 여행이라도 온듯, 4시간의 시차가 생겨버렸다.
엄청 많이 사도 150유로가 넘지 않는 장바구니. 이탈리아에 살며 누리는 최고의 호사가 아닐까 싶다
원래는 쉬면서 블로그와 브런치에 글도 좀 쓰고, 밀린 옷장 정리도 할 생각이었지만 편하게 쉬면 쉴수록 더욱 격렬하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졌다. 그렇게 나는 결국 생산적인 일이라고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꼬박 2주의 시간을 잉여인간처럼 살며 흘려보냈다. 엄청 지루할 거라 걱정했는데, 웬걸.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소파에 늘어져 누워있는 한 순간 한 순간이 꿀처럼 달았다. 처음 맛보는 이 완전한 휴식이 너무나 편안하고 감사했다.
집에서 사랑하는 내 식구들과 살을 부비며 평온한 일상을 누리는 것이 이렇게 진정한 휴식으로 다가올 줄이야. 이번 휴가가 정말 길고 지루했다는 주변 사람들도 있지만, 내게는 이제껏 느끼지 못했던 휴가의 일면을 발견한 것만으로 충분한 시간이었다.
코로나는 정말 제길슨 나쁜 놈이지만, 그래도 가끔 옛다 하며 깨달음을 주는데 이번 연휴가 내게 그랬던 것 같다.
하루죙일 남편 + 애들과 딩굴거리다 해질녘 즈음 부엌에서 요리를 하다보면,
"엄마 하늘이 너무 예뻐요!!!" 하며 아이가 외친다. 그 소리를 따라 아이 방으로 가서, 네 가족 멍하니 서서 하늘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 가스렌지에 올려온 요리가 생각나 아차차 다시 부엌으로 발걸음을 돌렸던 올해의 크리스마스 연휴가, 또 다른 의미에서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