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의 스냅샷을 넘어

나만의 ‘장소’와 ‘서사’를 지키는 법

by 동동이 할아버지

철학자 Nancy S. Jecker는 에세이 “The time of one's life: views of aging and age group justice”에서 자신의 아버지에 관한 기억을 소환하면서 글을 시작합니다.


일흔여덟 번째 생일을 넘기실 무렵 아버지는 늙어 보이셨다. 서 계실 때 키가 5.2피트에 불과했고, 초라하고 연약한 체격에 불안정해 보이셨다. 대머리 위로 가느다란 머릿결을 빗겨 넘기셨다. 얼굴 위로는 작은 주름이 가로질러 뻗어 있었다. 남들보다 두드러진 체격을 가진 적이 없으셨던 아버지는 노년에 더 움츠러들었고 해가 갈수록 점점 더 볼록해지셨다. 무더운 8월의 어느 날 오후, Dupont Circle로 가는 길에 아버지와 함께 탔던 붐비는 버스 안에서 우리는 내내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버스가 코너를 돌자 승객들이 일제히 한쪽으로 쏠렸다. 바로 그때였다. 한 젊은 남자가 아버지를 바라보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미소를 지으면서 아버지에게 자리에 앉으라는 제스처를 했다. 나는 그때 아버지가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분명히 기억한다. 그는 누군가가 자신을 “그런 식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짐작할 수조차 없었던 것이다. 마치 당신이 거울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인 것처럼.


제커에 따르면, 노년기에 접어든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단 자신이 늙었다는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녀는 이 같은 현상을 “노년의 수수께끼”(The Riddle of Old Age) 또는 “노화의 수수께끼”(The Riddle of Aging)라고 부릅니다. 노년기에 접어든 사람들이 자신의 노화를 부정하고 노화를 타인에게만 일어나는 과정으로 인식할 때 나타나는 행동 패턴을 말합니다. 간단히 말해 “노년은 나와 무관하며, 다른 사람들만 늙는다”는 믿음을 말합니다.


[여기서 저는 저자의 생각에 하나만 더 보태고 싶습니다: “중년의 수수께끼”(The Riddle of Middle Age): 난 저렇게는 안 늙을 거다.]


제커의 주장에 의하면, 이 같은 현상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즉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이른바 “중년의 스냅샷” 속에서만 찾으려는 태도와 밀접합니다. 이런 태도를 고수할 경우, 에컨대 아동 연령의 아이들은 “진정한 자아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반면, 중년의 성인은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잃게 될 것”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이 관점을 노령 인구에 적용하면 “거기 멈춰! (Hang-In-There!)” 모델, 즉 노년의 과제란 현 상태를 계속 유지하는 것이고, 우리가 할 일은 노인이 젊음을 유지하도록 돕는 것이라는 모델이 만들어집니다. 또 아동에게 적용하면 아이들을 합리적이고 자율적이며 또한 생산적인 성인으로 만들기 위한 “예비 학교 모델(The Prep School Model)”이 만들어집니다.

요컨대, 우리는 나이에 상관없이 전 생애를 진정한 개인으로서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성년―주로 19세에서 64세에 한정된―기간에만 그럴 수 있는 셈이 되고 말지요.


어느덧 거울 속의 내가 낯설어지는 시기가 되다 보니―저는 가끔 거울 속에서 한참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 얼굴을 보고 놀랄 때가 있습니다―, 저 역시 ‘노인’이라는, 불과 2-3 년 전까지만 해도 생소했던 단어와 마주하게 됩니다. ‘할아버지’라는 호칭에는 조금씩 익숙해져가는 중이지만 아직 ‘어르신’이라는 표현에는 그렇지 못합니다.


현대사회는 ‘은퇴’ 혹은 ‘정년’ 등의 제도를 통해 생산 활동으로부터 노인을 배제시키며, 그들을 더 이상 자율적이지 못한 존재로 간주합니다. 노인들은 사회가 효율적으로 관리해야 할 대상 집단일 뿐입니다. 그런대 그 노령 인구를 그 이외의 인구 집단으로부터 구분해 주는 기준은 사실상 나이가 유일합니다. 하지만 나이듦이란 단순히 숫자의 변화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내가 살아온 시간의 결이 바뀌고, 내가 발 딛고 선 공간의 의미가 재편되는 지극히 철학적인 과정입니다.

오늘은 무심코 받아들였던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뒤집어보고, 노년의 삶을 어떻게 더 풍요롭게 정의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려 합니다.




‘생산성’이라는 시계의 감옥


우리는 평생을 ‘측정 가능한(Chronometric) 시간’ 속에서 살아갑니다. 올해 내가 몇 살인지, 정년까지 남은 기간은 얼마인지, 새로 들인 기계가 인간 조업자에 비해 얼마나 생산 효율적인지 등을 계산하면서 말입니다. 이런 계량적 시간관 안에서 노년은 ‘유통기한이 지나 효율이 떨어진 기간’으로 전락하거나 ‘성능이 다한 시계’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같은 시간만이 유일한 시간일까요?


철학자 바아스(J. Baars)는 나이가 좀 많은 사람을 인터뷰할 때, "옛날엔 어떠셨어요?"라고만 묻는 태도를 꼬집습니다. 그 같은 태도는 어르신들에게도 오늘 계획이 있고 내일의 설렘이 있다는 사실을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젊은이만 미래를 꿈꾸고 노인은 회상만 한다는 생각은 편견이라고 지적하지요.


은퇴 후 서예를 시작한 70대 지인 분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주변에서는 “그거 배워서 어디 쓰시게요?”라고 묻곤 한답니다. 하지만 그 분에게 서예 시간은 결과물을 내는 생산적 시간이 아닙니다. 붓끝이 종이에 닿는 그 순간의 충만한 현재를 누리는 시간일 뿐이죠.


‘중년의 스냅샷’에 갇혀 그때의 모습만이 진정한 자아라고 믿는 것보다는 어린 시절도, 청년 시절도, 그리고 지금의 노년도 모두 ‘나’라는 사람의 연속된 삶으로 보는 게 더 적절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흔히 ‘나이 듦’을 숫자의 증가나 기능의 퇴화로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철학의 눈으로 들여다본 노화는 많이 다른 풍경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살아온 시간을 ‘기록’에서 ‘이야기(Narrative)’로 바꾸고, 내가 머무는 공간을 ‘물리적 공간’에서 ‘존재의 보금자리’로 숙성시키는 과정입니다.




‘공간(space)’이라는 물리적 틀을 넘어 ‘장소(place)’라는 삶의 무대로


우리가 나이 들면서 경험하는 가장 큰 변화 중 하나는 활동 범위의 축소입니다. 직장과 광장에서 집으로, 그리고 방 한 칸으로 줄어들죠. 이때 이를 단순히 물리적인 ‘공간’의 축소로만 보면 우울해지기 쉽습니다.


쉬에스(C. Schües) 같은 현상학자는 인간을 단순히 ‘공간을 차지하는 물체’가 아니라 특정 ‘장소에 거주하는 존재’라고 말합니다. 내가 평생 손때 묻힌 가구, 창문을 통과해 들어오는 익숙한 햇살의 각도, 동네 산책길의 냄새 … 이런 것들은 단순한 물리적 배경이 아니라 내 존재의 일부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평생 살던 집을 떠나 시설로 옮긴 어르신들이 갑자기 기력이 쇠하거나 기억력이 나빠지는 경우를 봅니다. 이는 단순히 몸이 아파서가 아니라, 자신의 삶의 역사가 깃든 ‘장소’, 즉 나의 정체성이 녹아 있는 삶의 보금자리를 잃고, 나를 모르는 낯선 공간에 던져지는 실존적 상실 때문입니다. 나를 지탱해주던 익숙함(Familiarity)이라는 뿌리가 뽑힌 것이죠.


병원이나 노인 요양 시설이 아무리 깨끗하고 생활하기에 편리해도 노인들이 그곳을 ‘나의 집’이라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그곳에 나의 이야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공간을 물리적이고 동질적인 ‘관리의 대상’으로만 본다면, 노인의 생활 세계는 폭력적으로 침해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 경험상, 시설에 모셔진 대다수 분들은 그곳에서 벗어날 기회를 스스로 포기합니다. 한편, 자식들은 부모의 근황을 묻는 지인들에게 시설 자랑을 늘어놓게 되죠. 깨끗하고, 친절하고, 밥맛이 좋더라 등등.]




상실과 제한의 통합


우리는 노화를 우리 몸이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이 변하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떤 노화 전문가는, 노화를 나의 ‘살아있는 몸(Leib)’이 점차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물체(Körper)’가 되어가는 과정이라 정의하기도 합니다. 사춘기 시절, 갑자기 커진 몸이 낯설어 방황하다가 결국 그 몸을 내 것으로 받아들였던 이른바 ‘재통합(Reintegration)’의 기억이 다들 있으실 겁니다. 노년기 역시 이와 유사한 학습 과정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사춘기가 확장을 위한 통합이었다면, 노년은 ‘상실과 제한의 통합(Integration of Loss)’입니다.


예컨대 사춘기 시절, 갑자기 길어진 팔다리와 굵어진 목소리가 내 것 같지 않아 당황스러웠지만, 결국 그건 그 에너지를 이용해 세상 밖으로 튀어 나갈 준비를 하는 과정이었습니다. 말하자면, 흩어졌던 자아를 더 큰 그릇에 다시 담는 것이었지요.


그럼 나이가 들어 예전처럼 산에 오르지 못하고 눈이 침침해지는 것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그것 역시 단순히 ‘기능 장애’로 간주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아무리 ‘노화 = 질병’이라는 공식을 내세운 안티-에이징 마케팅이 시대의 대세가 되었더라도 말입니다.

어쩌면 상실을 외면하거나 부정하는 대신, 제한된 범위 안에서일지라도 나만의 질서를 만들어내며 존엄을 관철해내는 것이 바로 노년기의 진정한 성숙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앞에서 말한 노인 전문 요양 시설이 단순한 물리적 공간을 넘어 삶의 보금자리로 탈바꿈할 수는 없을까요? 흥미롭게도 철학자 메이(W. F. May)는 이와 관련해, 물의 공식이 H2O라는 사실에 불평하며 “나는 물의 정의에 약간의 해조가 필요하다”고 한 예이츠를 인용합니다. 질병과 노화와 관련된 불쾌한 냄새를 요양 시설에서 없애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감각적인 삶에 관한 약간의 진실한 것들(a few of bona fides of sensuous life)을 노인의 방/세계에 허용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심지어 그는 노인의 거주 공간이 단순한 시설을 넘어 '성사적인 분위기(Sacramental Aura)'까지 풍겨야 한다고 말합니다. 노인의 방은 자신의 몸이 확장된 공간으로서, 예컨대 그 방에 거주하는 노인이 방문객에게 의자를 권할 때, 자신의 제한된 삶을 타인에게 확장하고 공유하는 존엄한 장소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시간의 경우도 위에서 소개했던 바아스 같은 이는, 현대의 지배적인 시간관에서처럼, 임의로 누락시키거나 처분할 수 있는 낱낱의 파편적인 사건들로 채워져 있고,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어떤 추상물이 아니라, 한 사람의 경험을 전체로서 의미 있는 이야기로 구성하게 해주는 바탕으로 바라볼 것[서사적 시간관]을 주장합니다. 전자의 시간관은 노인들의 존재나 기여가 무의미하다는 판단, 그리고 그들을 그저 비용효율적인 관리 대상에 불과한 사회적 짐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고착화할 뿐이라고 비판하면서 말입니다.


노화를, “젊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경험하고, 성장하며, 다양한 상황과 시기를 겪는, 또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려 애쓰는” 과정으로 이해할 때, 비로소 노인 문제를 관리 대상으로만 바라보려는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노화는 분명 인간이 선택하지도 않았고 궁극적으로 제어할 수도 없는 상황들을 동반합니다. 그럼에도 그 상황을 겪고 있고 또 겪게 될 인간이 무의미하거나 성가신 천덕꾸러기로 대우받아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오히려 다른 연령대와 마찬가지로 존엄하게 대해져야 하며 가급적 우리의 삶과 사회에 의미 있게 통합되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노년에 이른 사람 자신도 준비가 되어 있어야 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