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테뉴가 말하는 덜어내는 삶의 기술
공식적인 ‘노인’ 꼬리표를 달고 난 뒤, 제 자신과 주변 친구들을 가만히 들여다보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노년기에 대한 기대는 대체로 두 갈래로 나뉜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는 “이제 모든 의무에서 벗어나 편안해지고 싶다”는 소망이고,
다른 하나는 “이대로 점점 망가지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입니다.
각자가 처한 환경과 준비 정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 사이 어딘가에서 방향을 잃는 듯 보입니다.
요즘은 ‘노년의 지혜’를 이야기하는 콘텐츠도 넘쳐납니다. 하지만 그중 일부는 노년을 지나치게 미화하거나, 반대로 과장되게 두려워하게 만드는 경우가 꽤 있습니다. 저 역시 여전히 막막합니다. 어떻게 늙어야 하는지, 무엇을 붙잡고 무엇을 내려놓아야 할지 머리로는 알 것 같다가도 막상 행동으로 옮길 때는 타성에 찌든대로 움직이는 게 다반사입니다. 게다가 얼마 전 암 진단까지 받아 놓고 보니 더더욱 걱정만 많아집니다.
생각해 보면, 철학자들이 ‘노화’라는 주제를 본격적으로 고민하게 된 것도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닙니다. 근대 이전만 해도 노년은 흔한 경험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익숙했지만, 노화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래 사는 것 자체가 드문 일이었으니까요.
이런 점에서 미셸 드 몽테뉴의 <에세>는 비록 ‘노년’이라는 주제를 직접 다룬 글은 아니지만, 지금 우리가 읽어도 낯설지 않은 희귀한 작품입니다. 그는 노년을 미화하지도, 그렇다고 절망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있는 그대로 말합니다. 때로는 불편할 정도로 솔직하게.
몽테뉴가 59세에 죽었으니,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에세>는 노년을 앞둔 작가가 쓴 작품인데도 말입니다.
노년은 ‘축복’도 ‘추락’도 아니다
우리는 흔히 노년을 두 가지 방식으로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찬양이고, 다른 하나는 비관입니다.
“노년은 지혜의 시기다.” 혹은
“늙는 것은 비참한 쇠락이다.”
그런데 몽테뉴는 이 두 가지를 모두 경계합니다. 그는 병과 노쇠가 영혼을 더 낫게 만든다는 주장에 대해 거의 짜증(!)에 가까운 반응을 보입니다. 노화 과정에서 겪는 고통이 우리를 자동으로 더 지혜롭게 만든다는 생각을 몽테뉴는 “치사한 치료법”이라고까지 말합니다.
“[노화와] 병 덕택에 갖게 되는 영혼의 건강이라니, 치사한 치료법 아닌가! ... 기쁨을 맛볼 때보다는 고통을 소화시켜야 할 때 나의 이성은 더 산만해지고 힘들어 한다. 맑은 날 나는 더 또렷하게 세상을 본다. 건강은 질병보다 나를 더 유쾌하게, 그러므로 더 유익하게 깨우쳐 준다. 즐길 수 있는 건강이 있을 때야말로, 나는 가장 많이 개선과 절제 쪽으로 나아갔다. 건강하고 발랄하며 활력 넘치던 시절보다 노쇠의 비참과 역경이 더 나은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면, 그리고 사람들이 나를 생각할 때 그 동안의 [즉, 젊고 건강하던 시절의] 내 모습이 아니라 그 상태가 멈춘 모습으로 기억한다면, 나는 부끄럽고 분할 것 같다.
내 생각에는 인간의 행복을 만드는 것은 행복하게 사는 것이지 [견유학파의 창시자] 안티스테네스가 말한 것처럼 행복하게 죽는 것이 아니다. 다 끝난 사람의 머리와 몸에 철학자의 꼬리를 기괴하게 달아매려는 노력을 나는 해 본 적이 없다. 그리고 이 초라한 끝자락[노년]이 내 삶의 가장 아름답고 완전하며 긴 부분[젊고 건강하던 시절]을 취소하고 부인하게 하려는 짓도 말이다.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은 모습으로 나를 내보이고 또 그렇게 비치기를 바란다. ...”
그는 키케로처럼 노년을 낭만적으로 포장하기는커녕(<노년에 대하여>, De Senectute), 오히려 냉정하게 우리가 말년에 다가갈수록 더 까다로워지고, 시기심이 늘고, 사소한 것에 집착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노년은 우리의 얼굴보다는 정신에 더 많은 주름을 새긴다.”
이건 불편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진실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우리 주변에서 자주 목격하고 있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희망은 없는가
여기서 자연스럽게 질문이 따라옵니다. “그럼 늙으면 다 그렇게 된다는 건가?”
하지만 몽테뉴는 다시 한 발 물러섭니다.
“노는 땅이 기름지고 비옥하면 수천 가지 쓸모없는 잡초들만 무성해지듯, 그래서 그 땅을 쓸 만하게 유지하려면 우리 필요에 따라 그때그때 씨앗들에 알맞게 개간해서 파종해야 하듯, ... 정신도 마찬가지다. 굴레를 씌워 강제로 어떤 주제에 몰두하게 하지 않으면, 모호한 상상의 벌판에서 절도 없이 여기저기로 마구 튄다.”
이 말은 단순한 비관이 아닙니다. 마음을 확고한 주제(목표)에 의해 붙잡아두지 않으면, 사방으로 흩어지고 잡념이나 환상을 만들어낸다는 말은, 뒤집어 보면, 마음을 붙잡아 둘 수 있다면, 달라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저는 그렇게 읽었습니다.
그래서 노년의 문제는 나이가 아닙니다. 늘어난 여가로 방향 없이 풀려버린 정신에 있습니다.
젊을 때는 외부가 우리를 붙잡아 줍니다.
일, 사람, 관계, 책임, 마감—이런 것들이 삶의 구조를 만들어 줍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그 끈들이 하나씩 느슨해집니다. 그때 아무 준비가 없다면, 마음은 쉽게 흩어집니다.
의미 없는 걱정, 과거에 대한 집착, 타인에 대한 불만—이런 것들은 노년의 ‘특징’이라기보다는, 방치된 정신의 결과입니다.
노화는 드러남이다
몽테뉴에게 나이 든다는 것은 젊은 시절의 자신과 별개의,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미 가지고 있던 것이 더 선명해지는 과정입니다.
너그러웠던 사람은 더 깊어지고, 예민했던 사람은 더 까칠해지고, 집착이 많던 사람은 더 집요해집니다
그래서 그는 경고합니다. 노년의 문제는 나이가 아니라, 그 이전에 어떻게 살아왔는가에 달려 있다고.
‘고치는 삶’이 아니라 ‘덜어내는 삶’
우리는 흔히 노년에 들어서면 자신을 더 나은 사람으로 ‘고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더 현명해져야 하고, 더 너그러워져야 하고, 더 성숙해져야 한다고.
하지만 몽테뉴는 오히려 젊을 때의 활력과 자연스러움을 높이 평가합니다. 노년의 억지스러운 쇄신은 오히려 그것을 훼손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건 이미 굳어진 성향 위에 억지로 덧칠을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다른 길을 제안합니다. 억지로 더하려 하기보다 불필요한 것을 덜어내는 것, 이것이 훨씬 현실적이고 훨씬 품위 있는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명예에 대한 집착, 타인의 시선, 쓸데없는 걱정을 덜어내며 가급적 건강했을 때의 자연스러운 자신의 모습을 유지하라는 거죠.
후카시 없는 철학자
다만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몽테뉴는 자신의 솔직함을 극단까지 밀어붙인 나머지(저는 그를 “후카시 없는 철학자”라고 부릅니다), 전반적으로 삶의 축적이 만들어내는 변화의 가능성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는 노화를 거의 ‘침식’에 가까운 과정으로 묘사합니다. 마치 아무리 애써도 조금씩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는 흐름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실제로 만나는 사람들은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오랜 시간의 경험, 이른바 ‘삶의 경험’(Lebenserfahrung)은 단순한 퇴락과는 다른 결과를 만들어냅니다. 같은 상황에서도 덜 흔들리는 사람, 관계에서 자신을 덜 소모하는 사람, 불필요한 감정에 덜 끌려가는 사람—이런 변화는 분명 ‘저절로’ 생기지 않습니다. 하지만 시간을 통과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몽테뉴는 이 가능성을 다소 냉정하게 잘라내지만, 우리는 그 지점을 조금 더 열어 둘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세네카를 높이 평가한 몽테뉴가 인간의 조형 가능성, 즉 스스로를 다듬고 형성해 나갈 수 있는 가능성에 이처럼 인색했다는 점은 오히려 흥미로운 대목이기도 합니다.
결국 남는 질문들
노년의 삶을 생각할 때, 우리는 여러 질문을 던집니다.
얼마나 건강할 수 있을까?
얼마나 오래 살 수 있을까?
얼마나 덜 고통스러울 수 있을까?
공식적 노령 인구에 속하게 되면서 제게는 여기에 두 개의 질문이 보태졌습니다.
내게 남아있는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나?
그 삶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리고 몽테뉴의 글을 따라가다 보니, 이 마지막 두 질문에 대한 답의 윤곽이 어렴풋이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노년은 특별한 시간이 아니다. 예컨대 보상도 아니고 그렇다고 벌도 아니다.
그저 지금까지의 삶이 덜 가려지고, 더 또렷하게 드러나기 시작하는 시기다.
그러니 바람직한 노년은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미 시작되어 있는 삶을 조금 덜 흐트러지게 살아가는 것, 그 정도면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