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이 아니라 원칙으로 산다는 것

칸트가 말한 정신의 섭생법

by 동동이 할아버지


우리는 누구나 이런 경험을 합니다.

아무도 모르는 일인데도 마음이 편하지 않은 순간이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일도 잘 마무리되었고, 주변 사람들도 별말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마음 한쪽에 불편함이 남아 있습니다.


“나는 그때 정말 옳게 행동한 걸까?”


이 질문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입니다.


18세기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이런 순간을 인간의 중요한 도덕적 경험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인간이 감정에 흔들리는 이유가 단순히 의지가 약하기 때문이 아니라 마음을 다루는 방식이 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조금 독특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윤리학적 수양법(die ethische Asketik)”


칸트는 『도덕형이상학-덕론』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윤리학적 수양법이란 인간이 덕을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에게 부과하는 훈련이다.”


여기서 말하는 수양은 금욕적인 수행이 아닙니다. 그가 말한 것은 인간이 도덕적 삶을 지속하기 위해 마음을 다루는 방식입니다. 몸의 건강을 위해 식습관과 운동이 필요하듯 마음에도 일종의 정신적 섭생법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종종 판단을 해야 하는 순간 앞에서 흔들립니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이 흔들리는 순간을 살펴보면 대개 단순한 기분의 문제가 아닙니다. 대부분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영화 속 장면에서도 이런 순간은 자주 등장합니다.



침묵해야 할까, 말해야 할까?


영화 <12인의 성난 사람들>에는 유명한 장면이 있습니다. 열두 명의 배심원이 한 소년의 유죄 여부를 결정해야 합니다. 처음에는 거의 모든 사람이 유죄라고 생각합니다. 사건을 빨리 끝내고 집에 가고 싶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 사람이 조용히 말합니다.


“저는 아직 확신이 없습니다.”


그는 소년이 무죄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단지 조금 더 생각해 보자고 말할 뿐입니다. 이 한마디는 방 안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꾸어 놓습니다. 이 장면이 인상적인 이유는 도덕적 행동이 거대한 영웅적 결단이 아니라 조용한 저항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칸트는 개인적인 욕망이나 본능의 유혹에 저항하는 이런 태도를 도덕적 의지의 힘(Tugend, 덕)이라고 보았습니다.



결과보다 중요한 것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마지막 장면을 기억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주인공 쉰들러는 자신이 구한 유대인들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립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이 차를 팔았으면 한 명을 더 구할 수 있었을 텐데 ...”

“이 배지를 팔았으면 두 명을 더 구할 수 있었을 텐데 ...”


그는 이미 천 명이 넘는 사람을 구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하지 못한 일을 생각합니다. 이 장면은 인간의 도덕적 경험이 단순한 성과 계산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칸트는 인간의 가치를 결과나 성공에서 찾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선한 의지 외에는 아무것도 무조건적으로 선하다고 불릴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라 어떤 원칙에 따라[어떤 원칙을 동기로 삼아] 행동하려 했는가라는 것입니다.



스스로에게서 도망칠 수 없는 순간


영화 <어 퓨 굿 맨(A Few Good Men)>에는 이런 대사가 등장합니다.


“넌 진실을 감당할 수 없어.(You can't handle the truth.)”


이 영화의 핵심은 단순한 법정 드라마가 아닙니다. 군 조직 안에서 사람들이 자신이 알고 있는 진실을 어떻게 외면하는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조직과 질서라는 이유로 침묵합니다. 문제는 그 침묵이 결국 자기 자신과의 갈등을 남긴다는 것입니다. 어째서일까요?

우리 안에는 작은 법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칸트는 이런 경험을 설명하기 위해 “양심(Gewissen)”이라는 개념을 사용합니다.

그는 양심을 단순한 감정이나 죄책감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양심은 우리 안에 있는 ‘하나의 내적 법정’이라고 말합니다. 칸트의 표현에 따르면 인간은 마치 자신의 행위를 스스로 재판하는 사람처럼 살아갑니다.

우리는 어떤 행동을 하고 나서 자신에게 묻습니다.


“나는 옳게 행동했는가?”


그리고 이 질문 앞에서는 우리가 스스로 판사이면서 동시에 피고인이 됩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재판에서는 우리가 완전히 도망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속일 수는 있어도 자기 자신의 판단에서는 완전히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칸트에게 도덕적 삶은 외부에서 주어진 규칙을 따르는 삶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양심 앞에서 책임을 지는 삶입니다.


솔직히 이쯤에서 저를 포함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칸트에게 이렇게 반문하고 싶어질 것입니다.


“양심? 그런 거 없는 인간들이 더 많던데?”


하지만 칸트는 그런 생각이 인간을 “악마화”하는 태도에 닿아 있다고 봅니다. 인간 존재를 천사처럼 여기는 것도 설득력이 없지만 그렇다고 양심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존재로 간주하는 태도도 경계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와 같은 태도는 부도덕한 행위에 대한 우리의 책망이나 비난을 무의미하게 만들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마치 타인의 견해를 전혀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가 그 반론 자체 그리고 그 대화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처럼, 양심이나 도덕에 관한 사안도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인식이나 실천에 관한 사안에서 상대방의 개선 가능 능력 자체를 부정하려는 태도는 모든 의사 표시나 평가를 무의미한 일로 만든다는 것이지요.



어떤 고통은 붙잡아야 합니다


칸트는 윤리학적 수양법과 관련해 중요한 구분을 하나 제안합니다. 모든 고통을 같은 방식으로 대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책임 없는 일 때문에 이렇게 고통 받는 것이 가장 괴롭습니다.”
“내가 책임이 있다는 걸 알았더라면 이렇게까지 힘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칸트의 생각은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그는 도덕적 책임과 관계없는 고통을 마음속에 오래 붙잡고 있는 태도를 경계했습니다. 그런 고통에 계속 매달려 있는 것은 결국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 상태에 머무르는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그는 도덕적 책임이 있는 고통은 가볍게 넘겨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자신이 저지른 도덕적 위반을 마음속에 간직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위반은 일반적인 의도의 실현에서의 실패가 아니라 도덕적인 문제에서의 실패, 즉 우리가 스스로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행동입니다. 주목할 점은 칸트가 후회 자체를 미덕으로 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우연히 겪게 된 어떤 불행에 대해 눈물을 흘리기만 하고 상실한 것을 보충하기 위해 용기를 추스르지 않는 인간을 경멸한다.”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덧붙입니다.


“벌레가 자신의 마음을 갉아먹게 방관하지 말아야 한다.”


이 표현은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 자학적인 후회를 가리킵니다.


칸트는 후회의 가치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후회 그 자체는 아무 가치도 지니지 않는다. 그것은 개선으로 이어지는 충동이 되는 한에서만 가치를 지닌다.”


그래서 그는 후회의 진짜 의미를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후회가 진정한 것이라면 가능한 한 빨리 개선된 행위로 이어져야 한다.”


이 말은 단순하지만 강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고통은 단지 감정으로 머무르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행동을 촉구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칸트는 마지막에 이렇게 말합니다.


“선한 무언가를 행하라. 고통은 그렇게 하라고 네게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어떤 고통은 놓아주어야 합니다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한 가지 의문을 갖게 됩니다. 매사에 이렇게 진지하게 살아야 할까요?

흥미롭게도 칸트의 또 다른 얼굴은 조금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주로 그의 정식 저작이 아니라 학생들이 기록한 강의 노트들에서 발견됩니다.


도덕철학이나 인간학 강의 기록들을 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엄격한 철학자와는 달리 훨씬 자유롭고 인간적인 칸트의 면모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는 인간이 원칙에 의해 행하는 일 이외의 대부분의 인생사는 “기만적이고 맹목적인 것들”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그는 심지어 인간을, 운명이 가지고 노는 “공(Ball)”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이 말은 인생을 비관적으로 규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도덕과 관련된 문제는 진지하게 다루되, 그 외의 많은 일들에는 과도한 중요성을 부여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칸트는 인간을 괴롭히는 것의 상당 부분이 실제의 해악이 아니라 상상된 해악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세상을 조금 더 가볍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같은 맥락에서 칸트는 자주 헤라클레이토스 데모크리토스를 비교하며, 평소 인간의 비참한 상황에 동정심을 갖고 괴로워했다고 전해지는 헤라클레이토스보다는 인간사의 덧없음에 초연했던 후자를 따를 것을 추천합니다.


“데모크리토스는 늘 기분 좋게 살았고 이렇게 말한 철학자다. ‘인생에 심각한 것이란 없다. 모든 것은 다 어린애 장난일 뿐. 괴로움에 대한 인간의 탄식은 장난감을 잃어버린 어린애 울음이다.’”


이 말은 삶을 무의미하게 여기라는 뜻이 아닙니다. 누구나 각자의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즐거움을 찾되, 도덕에 위배되지 않는 한 타인의 삶의 방식에 간섭하거나 그 사람의 태도에 연연해 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도덕적 가치가 걸려 있지 않은 일들까지 무겁게 짊어질 필요는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차라리 그런 일들은 “해학(Scherz)”으로 대할 것을 권하지요.


칸트의 인생에 관한 생각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도덕에는 엄격하게, 그 외의 삶은 가볍게.”


사람들의 평가, 사소한 불쾌함, 작은 일들의 비교에서 일어나는 감정들 …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삶 전체를 결정할 만큼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것들에 계속 매달릴수록 삶은 점점 더 무거워집니다.



마음에도 근육이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마음을 타고난 성격처럼 생각합니다.


“나는 원래 예민한 편입니다.”
“나는 멘탈이 약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칸트의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그는 인간의 도덕적 힘이 훈련을 통해 강화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보았습니다. 쉽게 말해 마음에도 근육이 있다는 뜻입니다. 몸의 근육이 반복적인 운동을 통해 강해지듯이 마음의 근육도 반복적인 훈련을 통해 강해집니다.


충동 앞에서 잠깐 멈추는 것.

자신의 생각을 다시 바라보는 것.

기분보다 원칙을 선택하는 것.


이 모든 것은 거창한 철학적 행위가 아니라 마음의 근육을 단련하는 작은 연습입니다.



흔들리는 순간을 대하는 방법


우리는 누구나 흔들립니다. 생각이 많아지는 날도 있고, 기분이 이유 없이 가라앉는 날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흔들리는 순간에도 다시 방향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삶이 조금 어지러워지는 순간에도 자신의 생각을 잠시 바라보고 조용히 방향을 다시 잡을 수 있게 해 주는 것. 어쩌면 이것이 칸트 철학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메시지일 것입니다.


칸트가 말한 윤리학적 수양법은 거창한 수행이 아닙니다. 어떤 생각이 마음을 흔들 때 그 생각을 바로 믿기 전에 잠깐 멈추어 보는 것. 그리고 조용히 스스로에게 이렇게 묻는 것입니다.


“지금 나는 어떤 원칙에 따라 살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