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소란, 어떻게 잠재울까?

스피노자의 ‘멀리 보기’와 베르그손의 ‘살아 있는 시간’

by 동동이 할아버지

누군가의 무심한 말 한마디에 온종일 기분을 망치고, 읽지도 않은 메시지 하나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날이 있습니다. 작은 실수가 마치 거대한 실패처럼 느껴져 스스로를 몰아세울 때, 우리는 묻게 됩니다. “나는 왜 이토록 사소한 일에 휘청이는 걸까?”


17세기 철학자 바루흐 스피노자는 이 질문을 아주 오래 붙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우리가 감정에 휘둘리는 이유가 마음이 약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너무 ‘좁은 창’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라고 진단했습니다. 그리고 그 해결책으로 하나의 독특한 시선을 제안합니다.


바로 ‘영원성의 관점에서(sub specie aeternitatis)’ 세상을 바라보는 연습입니다.

이 말은 어렵게 들릴 수 있지만 뜻은 비교적 단순합니다.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잠시 떼어놓고 멀리서, 더 큰 시간의 흐름 속에서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마치 스크린 속 장면에 울고 웃는 관객의 관점이 아니라, 영사기 옆에서 영화 전체를 지켜보는 감독의 시선을 갖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요.




렌즈를 깎던 철학자


스피노자는 단순히 책상 앞에서 이론만 세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철학을 삶으로 증명했습니다. 유대교 공동체로부터도 위험한 사상을 가졌다는 이유로 파문당하고 친지와 친구들로부터도 외면당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대학교수직 제안조차 거절한 채, 평생 안경 렌즈를 깎으며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미세한 유리가루가 폐를 망가뜨리는 고된 작업이었지만 그의 삶은 의외로 평온했습니다. 그에게 닥친 사건들은 ‘불행’이 아니라, 거대한 자연 질서 속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현상이었기 때문입니다. 렌즈를 투명하게 닦아내듯, 그는 자신의 마음에 붙은 감정의 먼지를 닦아내며 세계의 질서를 바라보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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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나’에서 넓은 ‘전체’로


우리는 보통 사건을 ‘지금, 여기, 나’를 중심으로 해석합니다. 그러면 오늘의 상처는 세상의 전부가 됩니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사건을 더 큰 맥락 속에 놓아보라고 조언합니다.


직장 상사의 날카로운 피드백이나 SNS의 비난 댓글을 마주하면 “저 사람은 왜 나를 미워할까?”라며 괴로워합니다. 하지만 스피노자식으로 렌즈를 닦으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그 사람의 분노 또한 그의 기질, 그날의 컨디션, 조직의 생리가 맞물려 일어난 필연적인 자연 현상일 뿐입니다. 비 내리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듯, 타인의 감정 또한 거대한 인과법칙 속의 한 조각으로 이해해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고통은 나를 향한 공격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현상’이 됩니다.


애니메이션 영화 〈인사이드 아웃〉의 주인공 라일리를 떠올려 보세요. 라일리는 이사를 온 뒤 친구와 학교, 그리고 모든 것이 무너진 것처럼 느낍니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우리는 알게 됩니다. 그 슬픔과 혼란 역시 성장 과정의 일부였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라일리의 감정은 단순히 “나쁜 경험”이 아니라 더 넓은 삶의 흐름 속에서 의미를 갖습니다.


스피노자가 말한 관점의 전환도 이와 비슷합니다. 지금의 고통을 단순히 개인적인 불행으로 보는 대신, 더 큰 인과관계의 질서 속에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것을 마치 거대한 시계 속 톱니바퀴처럼 배치하는 순간 감정의 소용돌이는 잦아들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그 시점부터 감정은 조금 달라집니다. 분노나 슬픔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지만, 그것이 우리를 압도하지는 않습니다. 감정은 더 이상 우리를 끌고 다니는 힘이 아니라 이해할 수 있는 현상이 됩니다.


흥미롭게도 스토아 철학과 유사하게 이 스피노자의 철학도 현대 심리치료의 핵심과 맞닿아 있습니다. 인지행동치료(CBT)는 고통이 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 사건에 대한 ‘해석’에서 온다고 했지요. 이는 상황을 넓은 맥락에서 재구성하도록 돕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음 챙김(Mindfulness) 명상법도 비슷합니다. 감정을 억누르는 대신, 한 발 떨어져 “아, 지금 내가 화가 났구나” 하고 관찰하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감정에 휩쓸린 사람이 아니라 감정을 바라보는 관찰자가 됩니다. 이것 역시 스피노자가 말한 ‘영원성의 관점’과 닮아 있습니다.




하지만 삶은 기계가 아니라 ‘흐름’이다


물론 모든 철학자가 스피노자의 생각에 동의한 것은 아닙니다. 프랑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손(1859-1941)은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그에게 세계는 이미 완성된 기계처럼 작동하는 구조가 아니라,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살아 있는 흐름이었습니다. 베르그손은 이를 ‘지속(durée)’이라고 불렀습니다. 시간은 시계처럼 똑같이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이 쌓이며 질적으로 변화하는 흐름이라는 뜻입니다.

이 같은 관점에 따르면, 우리가 어떤 삶의 사건과 관련해 일어나는 감정을 이해하려 한다면, 그 사건을 멀리서 관찰자로서 바라보기보다는 그 감정이 형성된 삶의 흐름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오랫동안 준비한 계획이 무너졌다고 해 봅시다. 스피노자의 시선에서는 그 역시 자연의 질서 속 사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베르그손은 아마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삶은 이미 완성된 기계가 아니라 계속 만들어지는 이야기다.”


지금의 실패는 결론이 아니라 새로운 방향이 만들어지는 순간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종종 인생을 이미 짜여진 계획표처럼 생각합니다. 하지만 실제 삶은 예상하지 못한 만남이나 우연한 선택이 전혀 다른 길을 열어 주기도 합니다.


베르그손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런 창조적인 시간이었습니다. 그는 삶이 스피노자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예측 불가능하고 역동적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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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온과 생동 사이


스피노자의 철학은 우리에게 흔들리지 않는 평온을 가르쳐 줍니다. 반면 베르그손의 철학은 살아 있는 변화와 창조를 강조합니다. 흔들리지 않는 뿌리자라나는 가지의 생동감, 어쩌면 우리의 삶에는 이 두 가지 시선이 모두 필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감정의 파도가 너무 거세게 몰아칠 때는 잠시 스피노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지금의 문제도 더 큰 삶의 흐름 속에서는 작은 한 장면일 뿐이라는 것을 떠올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이 조금 가라앉으면 다시 베르그손의 시간 속으로 돌아옵니다. 내게 주어진 이 순간을 온몸으로 느끼며 새로운 선택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스피노자와 베르그손의 철학은 종종 어려운 이론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잠시 멀리서 바라보고, 다시 삶 속으로 들어가라.”


이 두 걸음을 반복하는 사이, 우리의 마음은 조금 더 단단하고 투명해지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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