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는 어떻게 영혼의 굳은살이 되는가

세네카가 어머니에게 보낸 위로

by 동동이 할아버지

쉼 없이 몰아치는 운명의 파도 앞에서


기원후 41년, 황제의 분노를 사 코르시카 섬으로 유배된 세네카는 아들을 멀리 보내고 슬픔에 빠져있는 어머니 헬비아(Helvia)에게 위로의 편지를 보냅니다.


흥미롭게도 그는 "모든 것이 다 잘 될 것"이라거나 "시간이 약"이라는 식의 상투적인 위로를 건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어머니가 겪어온 삶의 궤적, 수많은 비극적 상실들을 하나하나 직면하게 만듭니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었고, 의지하던 삼촌을 떠나보냈으며, 세 명의 자녀를 안겨준 사랑하는 남편마저 잃었던 그녀의 파란만장한 삶을 말입니다.

어머니는 그때마다 하나의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그리고 자식들마저 자리를 비운 상황 속에서, 또 다른 비보를 들어야 했고, 심지어 품 안에서 키워 내보낸 세 손주마저 잃는 비극까지 겪어야 했습니다. 마치 운명이 한 사람을 무너뜨리기로 작정한 것처럼, 어머니 헬비아의 삶에는 쉼표 없는 고난이 이어졌었죠.




고통은 인간을 나약하게 만드는가, 강인하게 만드는가?


우리는 흔히 나이가 들고 반복되는 상실을 경험하면 인간이 점차 마모되고 나약해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세네카의 관점은 정반대입니다. 그는 '강인함'과 '나약함'의 차이를 '행운의 지속' 여부에서 찾습니다.


나약해지는 길 (행운의 함정): 오랜 시간 행운에만 젖어 마음이 약해진 사람들은 아주 작은 타격에도 비탄에 잠기고 쓰러진다. 그들에게 고난은 낯설고 두려운 침입자일 뿐이니까.


강인해지는 길 (불운의 이점): 반면, 평생을 재난 속에서 보낸 이들은 가장 혹독한 상실 앞에서도 용기 있고 굴하지 않는 인내심을 발휘하게 된다.


세네카는 이 후자를 두고 "지속적인 불운은 그것에 단련된 이들을 무감각하게 만드는 이점을 갖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신병과 노병의 차이


세네카는 이를 신병과 노병의 모습에 비유합니다. 갓 입대한 신병들은 작은 상처에도 크게 비명을 지르며 “칼보다 의사의 손길을 더 두려워한다”고요. 하지만 수많은 전장을 누빈 노병들은 자기 몸을 관통하는 상처를 입어도 신음 한마디 없이, 마치 남의 몸을 치료하듯 묵묵히 자신의 상처를 의사에게 맡긴다고 합니다. (화타에게 뼈를 긁어내는 치료를 받는 동안 신음 소리 없이 바둑을 두었다는 삼국지의 관우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이처럼 세네카는 어머니 헬비아에게 이제 스스로를 치유할 용기를 내라고 권합니다. 수많은 불운을 겪으면서도 고통 다루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면 그 모든 고난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냐고 다그치기까지 하죠. 그러면서 유배지로 떠난 아들을 걱정하는 어머니에게, “제가 불행하게 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ne fieri quiddem me posse miserum)라고, 즉 자신은 도저히 불행해질 수 없는 사람이라고 당당하게 선언합니다.


(물론, 고통의 원인을 제대로 직면하기도 전에 ‘단단해질 것’을 종용하는 세네카의 이 서슬 퍼런 방식은, 내담자의 상처를 보듬고 충분한 애도와 공감을 우선시하는 현대적 상담 기법에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다소 거칠고 위험해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메시지가 지닌 진정한 힘은 '고통의 부정'이 아니라 '주체성의 회복'에 있습니다. 타인의 동정이나 상황의 호전에 기대지 않고, 오직 자신의 내면적 의지만으로 불행의 침입을 막아내겠다는 그 결기는 현대의 독자에게 오히려 역설적인 해방감을 선사하는 것 같습니다.)




나이 듦이란 '잃을 수 없는 것'을 발견하는 과정이다


세네카의 철학에서 가장 핵심적인 문장들 가운데 하나는 이렇습니다.


"운이 주지 않은 것은, 운이 뺏어갈 수도 없다." (Quod non dedit fortuna, non eripit.)


(‘fortuna’는 맹목적인 운을 의미합니다. 영어의 ‘luck’이나 ‘fortune’에 가까우며 “happiness’, 즉 ‘행복’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후자를 뜻하는 라틴어 어휘로는 ‘beatitudo’나 ‘felicitas’가 쓰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우리는 점점 더 많은 것을 잃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남는 것도 있습니다.

잃는 것은 무엇이고, 남는 것은 무엇일까요?


Fortuna가 준 것은 사라집니다. 그러나 fortuna가 주지 않은 것, 즉 우리의 태도와 판단은 빼앗기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네카가 이 명제로 행복이나 불행에 관한 존재론적 전환을 요구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행복의 근거를 외부에서 내부로 이동시키는 것 말입니다. 그럴 경우, 당연히 세월과 더불어 겪게 되는 고통 역시 인간을 약하게 만드는 필연적 과정일 필요가 없게 됩니다.

물론 고통이 우리를 자동으로 강하게 만들지는 않겠지요. 그러나 고통을 성찰하는 순간, 그것은 우리를 무너지게 두지 않는다는 것이 세네카의 생각입니다.


나이 들어가며 겪는 상실은 우리를 약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동안 무엇으로 서 있었는지를 묻는 것이며, 그 질문을 통해서 우리가 조금 더 단단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흔히 우리는 나이가 들고 고통이 누적될수록 영혼이 연약해진다고 믿습니다. 고통을 그저 피해야 할 불운이나 제거해야 할 질병처럼 여기기 때문입니다. 제 개인적 경험으로 보면, 노화와 더불어 불가피하게 겪는 신체적 기운의 쇠락이나 질병도 이 같은 생각을 부추기는 것 같습니다. (서점에 가보거나 인터넷 검색을 해보면 ‘노화 = 질병‘이라는 테제를 내세운 책들이 널려있습니다.)


그러나 세네카의 관점에서 보면, 반복되는 고통과 시련은 우리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운명의 변덕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면역력(‘맷집’으로 표현해도 좋겠지요)을 갖게 하는 숭고한 훈련 과정입니다.


온실 속에서 한 번도 거친 비바람을 맞아보지 않은 화초는 작은 기온 변화에도 쉽게 시들어버립니다. 반면, 거센 폭풍우를 여러 번 견뎌낸 나무는 비바람을 맞을수록 뿌리를 더욱 깊고 단단하게 내립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우리가 인생의 후반기에 마주하는 슬픔이나 결핍은 우리를 허물어뜨리는 흉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타인의 시선이나 세상의 평가, 그리고 얄궂은 운명에 더 이상 휘둘리지 않도록 우리의 내면을 단단한 요새로 만들어주는 담금질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고통 없는 안락함만이 계속되는 삶은 축복 같아 보이지만, 실은 작은 충격에도 바스라질 만큼 우리를 유약하게 만들 위험이 큽니다. 반대로 수많은 상처를 꿰매고 다시 일어선 사람의 영혼에는 쉽게 뚫리지 않는 단단한 굳은살이 박여 있습니다.


나이 들어감이 단순한 쇠락이 아니라 고요한 존엄이 될 수 있다면, 그 이유는 그동안 우리가 통과해 온 상처와 고통들이 우리를 어떤 비극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는 용맹한 전사로 길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노화란, 쉼 없는 파도에 깎여나가며, 그 어떤 파도에도 휩쓸리지 않는 단단한 내면의 핵을 발견해가는 과정으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




단단함은 결코 딱딱함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가 경계해야 할 지점이 하나 있습니다. 세네카가 말하는 '영혼의 단단함'이나 '내면의 핵'을 발견하는 과정은, 나이가 들면서 흔히 마주하게 되는 '불필요한 고집스러움'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점입니다.


고집은 사실 두려움에서 비롯된 '경직'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세계가 좁아지고 힘이 약해지는 것에 대한 공포를 감추기 위해, 변화를 거부하고 아집이라는 방어벽을 쌓는 것입니다. 이는 부러지기 쉬운 마른 나뭇가지에 비유할 수 있겠죠. 반면, 세네카가 말하는 내면의 핵은 '유연함'을 전제로 합니다. 진정으로 단단한 사람은 자신의 견해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외부의 비판이나 새로운 상황을 담담히 수용할 수 있는 여유를 드러냅니다. 그러니 고집이 낡은 틀을 지키기 위한 '굳어버림'이라면, 영혼의 단단함(fortitudo)은 ‘뿌리를 내리는 것’, 다시 말해 외부의 풍파에 휘둘리지 않는 평온함(ataraxia)을 뜻합니다.


이는 세상을 향해 벽을 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자기만의 중심을 잡는 '열린 강인함'입니다. 고집스러운 이는 자신의 틀이 깨질까 봐 분노하지만, 내면이 단단한 이는 비본질적인 것들이 사라져도(뺏겨도) 자신의 본질은 훼손되지 않음을 알기에 오히려 너그럽고 유연해질 수 있습니다.


결국, 노년의 고집이 자신의 선택지가 줄어드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 만들어낸 아집에 갇히는 것이라면, 세네카의 단단함은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나로 존재할 수 있다'는 존재론적 자유에 가깝습니다. 진정으로 단단해진 영혼은 타인에게 군림하려 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거친 파도를 다 견뎌낸 바위가 그 위에서 쉬어가는 갈매기들에게 자리를 내어주듯, 자신의 흉터를 타인을 보듬는 포용력으로 전환하는 지혜를 발휘합니다.


오늘도 삶이 남긴 상처로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면, 또 반복되는 삶의 고통으로 인해 스스로가 한없이 나약해졌다고 느낀다면, 스스로를 불운한 피해자가 아닌 치열한 전투를 나름 준수하게 견뎌낸 상처투성이의 베테랑으로 바라보는 것은 어떨까요?


그렇게 바라볼 수만 있다면, 세네카가 자신이 유배당한 일조차 '본질적인 것들에 집중할 수 있는 기회'로 재해석했던 것처럼, 우리가 나이 들어가며 얻은 그 흉터들은 영혼이 부서진 흔적이 아니라, 어떤 시련에도 무너지지 않는 단단함을 쟁취해 낸 영광스러운 훈장일 것입니다.


이뿐만이 아니지요. 지난 글에서 나누었듯, 고난을 통과하며 단단해진 사람은 그 존재 자체로 타인에게 삶의 이정표이자 든든한 기준점이 되어줍니다. 우리의 흉터는 누군가에게는 가야 할 길을 비추는 가장 정직한 빛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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