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전사로 배치된 통역병
한 지인의 아들이 군 복무를 앞두고 고민을 했다고 합니다.
“어차피 갈 거면, 신체적으로 조금 덜 힘들고 내 특기를 살릴 수 있는 보직이 좋지 않을까?”하고요.
영어에 자신이 있던 그는 통역병을 지원했고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모두가 안심했습니다. 이제 비교적 수월한 군 생활을 하겠구나, 능력도 살릴 수 있겠구나 하면서.
그런데 최종 배치 결과는 특전사였습니다.
지인과 주변 사람들은 적잖이 당황했습니다.
“왜 하필 거기냐.”
“어려운 시험에 합격했는데 더 힘든 곳으로 가다니…”
하지만 정작 본인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의외이긴 한데, 제가 더 필요한 곳이 있나 보죠.”
몇 년 전 이 이야기를 들으며 저는 세네카(BC 4 - AD 65)의 문장이 떠올랐습니다.
“군에서도 가장 위험한 임무는 제일 용감한 자들에게 돌아간다네. 지휘관은 정예의 병사들에게 적군을 야습하게 하고, 정찰 임무를 맡기며, 수비부대를 몰아내는 과제를 주지.“
우리는 자주 묻습니다.
왜 성실한 사람에게 병이 오고,
왜 착한 사람에게 불행이 겹치며,
왜 열심히 사는 사람에게 더 큰 시험이 오는가.
세네카는 되묻습니다.
“어째서 신이 하필 가장 선한 자를 질병이나 슬픔이나 온갖 불행한 일들로 괴롭히는 것이라고 생각하나?”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위험한 임무를 부여받고 떠나는 어느 누구도 ‘지휘관이 나한테 못된 짓을 하는 거야’ 하고 불만을 토로하지 않네. 오히려 ‘장군이 나를 인정하나보다’라고 말하지.”
우리는 보통 역경을 ‘차별’로 해석하지만,
세네카는 그것을 ‘선발’로 해석합니다.
과한 행복은 왜 위험한가
세네카는 불행을 미화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는 ‘행복의 과잉’을 경계합니다.
“무엇이든 과도하면 해악이 되지만, 특히나 행복이 지나치게 되면 가장 위험한 법이네.”
편안함은 우리를 무디게 합니다.
안전함은 우리를 나약하게 합니다.
모든 것이 순조로울 때, 우리는 자신이 단단해졌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단단해지는 순간은 마찰 속에 있습니다.
“신들이 선한 사람들을 다룰 때는, 교사가 제자를 가르칠 때와 동일한 원칙에 따른다네… 운명이 우리에게 매질을 가한다? 우리는 참아야 하네… 그것은 잔인한 행위가 아니라 전투이고, 사람은 자주 싸우면 싸울수록 더 용감해지기 때문이지.”
그리고 그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선원은 거친 바다를 참고 견딤으로써 탁월한 선원이 되고… 병사의 팔은 창을 휘두른 만큼 강해지지 않는가.”
통역병을 지원했지만 특전사에 배치된 그 청년처럼,
삶은 종종 우리가 선택한 길보다 더 거친 자리로 우리를 보냅니다.
문제는 배치가 아니라 해석입니다.
부는 선이 아니다
우리는 종종 겉으로 보이는 조건으로 삶을 평가합니다.
안전한 보직, 높은 연봉, 안정된 지위.
그러나 세네카는 단호합니다.
“부는 선이 아닐세. 그러니까 포주(抱主) 엘리우스조차 그것을 가지는 것이지. 사람들이 신전에서 돈을 숭배하긴 하지만 사창가에서도 볼 수 있게끔 말이야.”
그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불공평’에 대해서도 이렇게 반문합니다.
“착한 사람이 불구가 되고 십자가에 못 박히고 감금당하는데, 악한 자는 성한 몸으로 걱정 없이 즐기면서 거리를 활보하는 것이 불공평하지 않냐고? 그렇다면 이건 어떻겠나? 용감한 자들은 상처를 싸매고 무기를 든 채로 밤새워 진영에서 보초를 서는데, 변태에다가 전문적인 호색한들은 안락한 도시 한복판에서 쾌락으로 밤을 지새우는 것은 공평한가?”
세네카의 논지는 단순합니다.
고귀한 삶이 편안함과 비례하지는 않는다는 것.
겉의 평온이 곧 선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행복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 곧 너의 행복이다.”
이 문장은 잔인할 만큼 급진적입니다.
행복을 많이 누리는 것이 아니라,
행복이 없어도 흔들리지 않는 상태.
그것이 단단함이며, 진짜 자유라는 뜻이겠지요.
세네카는 이렇게 묻고 대답합니다.
“왜 그들은 힘든 일을 견디느냐고? 다른 사람들에게 견디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서라네.“
고난을 통과한 사람은 의도하지 않아도 하나의 기준이 됩니다.
그 존재 자체가 하나의 증명이 될 테니까요.
특전사로 배치된 그 청년도 어쩌면 누군가에게 ‘견디는 법’을 보여줄 사람이 될지도 모릅니다.
삶이 우리를 덜 편한 곳에 배치할 때,
그것은 벌이 아니라 선발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삶은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PS: 브런치스토리 작가 분들과 독자 분들 중에도 과거에 힘겨웠거나 현재의 힘든 경험을 이야기로 공유하시는 분들이 많다는 사실에 놀란 사람이 저만은 아닐 겁니다.
세네카의 글은 <세네카 삶의 지혜를 위한 편지> (김천운 역)을 참고했습니다. 세네카의 흉상으로 많이 알려진 사진 속 작품은 실제로는 '헤시오드(Hesiod)'로 추정된다고 고전 고고학 공부한 친구에게 들은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엔, 사색의 결과물을 분만하느라 애쓰는 (진땀에 찌든 우거지상!) 전형적인 서양 철학자의 모습에 더 어울려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