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찬란한 여행의 비극

비극이 희극으로 바뀌는 순간

by 폭풍속 부푼돛

'2005년 7월 10일 시작한 도보여행이 내일이면 끝이 난다.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호기롭게 시작한 도보여행.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무조건 걸어가는 것이 목표인 혼자만의 여행. 걸어 다니며 보았던 멋진 길과 풍경. 여행 중 만났던 많은 사람들의 응원의 목소리. 궂은 날씨 속에 간간히 축복을 내려준 파란 하늘. 여행의 순간순간을 잊을 수 없으리라. 나의 가장 찬란한 시절의 이 여행을 잊지 못하리라!'

고성 통일전망대를 앞둔 마지막 전날 밤, 만감이 교차하는 가운데 나는 이런 자화자찬이 가득한 기록을 남겼다. 충분히 잘했고, 충분히 멋진 여행이었다. 걸어서, 그것도 혼자서 부산에서 고성까지 왔으니 말이다. 하지만 자화자찬은 딱 거기까지만이었다. 여행의 마지막 날을 앞둔 그날 밤까지.



장마로 인한 궂은 날씨가 여행 내내 나를 괴롭혔다. 궂은 날씨의 정점은 마지막 날 새벽이었다. 유독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쳤다.

'어? 이러다 오늘 못 가는 거 아니야?'

불안감이 엄습했다. 잘 버티고 왔는데 마지막 날 계획이 무너진다면 여행의 의미가 없어져 버릴 것만 같았다. 이 여행의 의미는 오로지 걷는 것이었다. 걷는 것으로써 나 자신을 시험하고 나의 한계를 극복하고 싶었다. 그러면 어떤 깨달음을 찾을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이 여행에서 찾게 될 보물을 눈앞에 두고 그만둘 수가 없었다. 하늘을 보고 기도했다.

‘하느님, 제발 도와주세요. 비바람 좀 멈추게 해 주세요. 내일 걸어서 통일전망대에 까지 갈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나의 간절한 바람이 하늘에 닿았을까 다행히 비바람은 잦아들었다. 우의를 걸치고 통일전망대까지 충분히 걸어갈 수 있을 거 같았다. 비장한 마음으로 우의를 입고 배낭을 들쳐 멨다. ‘에구구구~’ 의도치 않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솔직히 그 당시 몸과 마음이 많이 지쳐 있었다. 여행을 빨리 끝내고 꼬들꼬들한 이불이 깔린 침대에서 두 다리를 쭉 뻗고 싶었다. 하지만 이 여행의 끝이 얼마 남지 않았다. 오늘만 견디면 보물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가는 이정표를 따라 도로를 걸었다. 지도상으로 꽤 되는 거리였다. 도로를 얼마 걷지 않았는데 이정표 대신 낯선 안내판이 보였다. 도보여행 중 이정표는 바다의 나침반과 같은 존재다. 이정표 대신 다른 무언가를 보니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안내판 가리키는 곳은 통일전망대 출입 신고소였다. 그곳에는 마치, 도보여행자에게 내리는 사형선고 같은 문구가 쓰여 있었다.

"통일전망대까지는 셔틀버스로 이동 가능합니다."

뜻하지 않은 셔틀버스 이용 입간판 때문에 내가 꿈꿨던 젊은 날의 찬란한 도보여행을 망쳐 버렸다. 여행을 버스로 끝낸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오로지 걷는다는 마음 하나로 부산부터 고성까지 왔는데 마지막을 앞두고 버스라니. 입간판 앞에서 나의 도보여행은 끝이 났다.

무거운 배낭을 들쳐 메고 버스로 오르는 발걸음이 얼마나 무거웠는지 모른다. 그토록 자랑스러웠던 배낭이 버스 좌석에 덩그러니 놓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토록 처량하게 보일 수 없었다. 그런 배낭이 부끄러웠다. 버티고 버티었던 나의 마음도 무너져 버렸다.

애초에 계획했던 여행은 망쳐버렸다. 통일전망대에 도착했지만, 여행을 마무리할 수가 없었다. 그 어떠한 깨달음도 보물도 찾을 수 없었다. 그저 내일 새벽부터 일어나 분주하게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과 이제는 걸어가야 할 그 어떤 곳도 존재하지 않는 허무함만이 남았다.



여행의 끝을 내지 못해서인지, 2005년 7월 10일에 시작한 이 여행은 2021년 7월 지금까지도 유효하다. 여행의 끝에서 찾겠다던 보물을 여전히 찾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25살의 내가 찾기에는 그 보물이 너무나 가까이 있어서 알아차리지 못했던 건 아니었을까? 하나의 마음에 갇혀서 여유가 없었던 건 아니었을까? 어린 내가 담기에는 보물의 크기가 너무나 컸었던 건 아니었을까?

16년이 지난 지금에야 여행이 가르쳐준 보물의 의미를 조금은 알 것 같다. 새까맣고 어두운 우주에서 초록빛으로 빛나는 지구의 모습에 감동을 느끼는 것처럼, 불혹의 내가 초록빛으로 빛나는 가장 찬란한 시절의 나를 보고 있자니 알 수 없는 감동이 밀려온다. 동시에 찰리 채플린의 명언이 생각난다.

"인생은 가까이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그날의 입간판이 비극이었다면 나 자신을 시험하고 극복하기 위해 그 먼 길을 걸으며 버틴 나의 모습은 희극 이리라. 그렇다면 하루하루 버티는 일상의 고단함과 힘듦도 멀리서 바라본다면 희극으로 바뀔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자신 있게 '그렇다'라고 말하고 싶다. 나의 모습을 제3의 눈으로 보는 자세는 인생을 보다 낭만적이고 감동적인 인생으로 바꾸어 줄 수 있다. 작은 감정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담대하고도 초연한 나로 만들어 줄 수도 있다. 그깟 버스 타는 게 뭐가 그리 대수라고. 지금 생각해보면 아무것도 아닌데 말이다.

2005년 7월 시작한 여행이 이제야 끝이 보이기 시작한다. 고성 통일전망대를 앞둔 전날 밤처럼 2021년 7월 이제는 제대로 나를 칭찬하고 싶다. 충분히 잘했다고, 충분히 멋진 여행을 잘 버티었다고. 동시에 응원하고 싶다. 다음 목적지를 향해 하루하루 잘 버티길, 그러다 보면 언젠가 목적지에 다다를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될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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