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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폭풍속 부푼돛 Dec 22. 2021

공정하다는 착각, 마이클 샌델

모두가 인정받는 사회를 꿈꾸며

쉽지 않은 책이었다(어떻게 맨날 쉽지가 않나?). 총 7장 중에서 6, 7장을 제외하고는 솔직히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런 책을 한 번만 읽고 감상을 쓴다는 게 좀 그렇지만 지금  정도의 그릇에 이 책의 가치를 한번 담아 보는 것도 괜찮을 듯싶다. 재독 이후에는 좀 더 커진 그릇에 또 다른 가치를 담을 수 있으리라.


차별이라는 주제로 책을 읽고 결국은 이 책으로 마무리를 짓는다. <공정하다는 착각>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차별이나 평등에 대한 내용이다. 좀 더 명확히 얘기하자면 이 책의 핵심 키워드는 '능력주의'이다. 능력주의라는 가치 관념에 대한 마이클 샌델의 맹렬한 비판이다. 정치, 철학, 경제 등 모든 인문학을 망라하기에 읽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최근 읽은 책 중 가장 현실적인 책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정치적인 메시지는 다소 예민할 수도 있다. 그리고 책의 배경이 미국이라는 점에서 이질감도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완벽한 오판이다. 참으로 아이러닉 하지만 배경이 미국이어서 더욱 공감이 되고 대한민국의 현실을 직시할 수 있었다.




차별을 논하는 데 있어서 능력주의는 부분적인 요소이지만 그 비중은 아주 크다고 생각한다. 아니, 어쩌면 거의 다라고 할 수도 있을 거 같다. 왜냐하면 능력주의라는 것이 세상을 사는 생명에게는 피할 수 없는 숙명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은 인간이라는 고등생물뿐 아니라 생명이 붙어있는 미생물에게 에도 적용될 수 있다. 제한적인 환경에서 모두가 살아남기는 불가능하다. 누군가는 살아남고 누군가는 죽어야만 한다. 생사의 기준은 능력이다. 물리적이든, 정신적이든, 능력이 상대적으로 우수한 개체만이 존재할 수 있다. 이 세상에 존재하기 위한 능력주의는 어쩌면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생존논리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가장 공평하고도 공정한 잣대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우수한 인재를 뽑기 위해 고려시대, 광종이 중국으로부터 공정한 과거제도를 도입한 이후부터 현재까지 우리는 그렇게 믿고 있다.


이런 능력주의를 저자는 비판한다. 재미있는 것은 마이클 센델의 경력인데 그는 능력주의의 정점의 자리에 위치한 하버드 대학 교수이며 그것도 최연소 교수의 경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분명히 미국의 극단적인 능력주의의 혜택을 받은 장본인인 그가 능력주의를 비판한다는 것이 꽤나 흥미로웠다.

, 어쨌든 저자는 능력주의는 공정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로 "조건의 불평등"을 얘기한다. 조건의 불평등은 출발선이 다름을 의미한다. 지구 상에 존재하는 생명체라고 하면 조건이 같은 상태에서 태어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누군가는 상대적으로 우수한 이점을 가지고 태어나고 누군가 열등한 불리점을 가지고 태어난다.  능력주의 하에 경쟁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출발선이 다른 경쟁이다. 그렇다면 능력주의가 과연 공정하다고 할 수 있을까. 결국 개인 고유의 능력이라는 것이 환경적인 요인에 의해 결정되는 것은 아닐까. 좀 더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능력이 우수하다는 것은 ""이 좋아서 우수하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선천적인 재능뿐 아니라 고소득의 아빠와 지적인 엄마를 둔 가정에 태어난다는 점도 운이 결정하는 것이고, 훌륭한 선생님과 체계적인 교육 인프라 환경이 갖춰지는 것도 운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볼 수 있다. 심지어 하고자 하는 내적 욕망마저도 환경에 의해 결정지어질 수 있다. 이처럼 자신의 능력밖에 훌륭한 조건은 운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다.




현재를 기준으로 보면 조건의 평등이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얘기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역사 상 조건의 평등인 상태는 분명히 있었다. 6.25 전쟁 발발 이후부터 군부독재가 우리나라를 통치하던 근 몇십 년이 우리나라에서 조건이 평등한 시대가 아니였을까. 얼마 되지 않은 이 시대부터 우리나라의 극단적인 능력주의가 시작되었다 생각한다. 100프로 평등하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그 시절에는 무에서 성공을 창조하는 성공신화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누군가 얘기하는 개천에서 용 나는 시대였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은 스포트라이트가 비치며 인생역전의 훌륭한 사람이 되었고, 다수의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인생에서 그저 그런, 또는 비천한 실패자로 낙인이 찍히기도 했다. 재미있는 것은 이런 상황을 승자와 실패자 모두 한다는 점이다. 승자는 승자가 될 만한 자격이 되고 실패자는 자격이 미달이 되어서 승패가 갈렸다고 생각을 한다. 여기서 자격이라 함은 철저한 개인의 능력이다. 불가능할 거 같은 조건의 평등인 사회는 개인의 능력과 책임이 막중한 각자도생의  사회인 것이다. 

각자도생의 사회는 시대가 바뀌고 시간이 지나면서 간극을 심화하며 사회적 계층을 만들었다. 세계는 승자와 패자로 나누어졌으며 계층의 벽은 더욱 높고 두터워졌다. 능력주의 신봉 아래 승자는 '자격'이라는 보호막으로 그들의 오만을 옹호한다. 반대로 패자는 '자격'이라는 핑계로 그들의 굴욕을 합리화한다. 그들은 계속 오만 해지는 반면 그렇지 않은 자들은 계속 굴욕적이게 되는 상태가 바로 현시대이다.


승자가 오만이라는 견고한 성을 쌓을 수 있었던  이유는 '자격'뿐만이 아닐 것이다. '자격'이라는 벽돌을 일체화시켜주는 시멘트가 필요하다. 나는 이것을 '상처'라고 말하고 싶다.

능력주의의 정점에 있는 승자는 과연 행복한 삶을 살까? 책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얘기한다. 정점에 오르기 위한 노력이 무색하게도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한 분투는 승자의 마음과 정신을 황폐하게 만든다. 언젠가 추락할 수 있다는 불안감은 승자를 완벽주의자로 만든다. 꼭대기에 도달해도 저기 멀리 다른 꼭대기에 누군가를 보며 현실에서 만족할 수는 없다. 능력주의라는 경쟁에서 이긴 승자라 할지라도 마음 한구석에는 아물지 않은 상처만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상처는 자격이라는 벽돌과 화학반응을 일으켜 일체화가 된다. 한켜 한켜 자격과 상처로 쌓아 올린 오만의 성에서 승자는 패자를 내려다본다. 비록 승자이지만 상처에 대한 보상을 받기라도 하는 것처럼 성 아래 패자에게 굴욕감을 선사한다.

남아있는 거라곤 상처 받은 자와 굴욕감에 젖은 실패자만 있을 뿐이다.




생존의 본능이라고 할 수도 있는 능력주의를 이렇게 비판하는 것이 불편하게 들릴 수도 있겠다. 하지만 능력주의가 들어놓은 현시대의 극단화를 생각한다면 이 정도의 비판은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책의 후반부 6, 7장에서는 능력주의를 학력주의와 노동이라는 키워드로 분류하여 비판한다. 책 후반부에서 저자는 하나의 가치로 귀결된다. 그것은 바로 '겸손'이다. 능력이 출중해서 아이비리그에 들어간 학생이든 고액 연봉자이든 능력주의라는 사회에서 인정받고 어마어마한 부를 이룬 사람에게 겸손이라는 미덕을 제시한다. 겸손을 통해 극단화가 되어 있는 양극화를 완화하고 공동선이 이루는 것이 저자가 최종적으로 말하는 메시지이다. 미국인들에게 겸손이라는 가치가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는 모르겠으나, 대한민국을 사는 우리들에게는 후반부의 겸손은 식상하여 맥이 빠질 법도 하다. 반대로 그렇게 귀가 닳도록 들었던 공자의 겸손이라는 가치를 능력주의를 논하는 미국 책에서 중요한 가치로 여겨지다니 새삼스럽게 보이기도 하다. 하지만 가만히 좀  생각해보면 대단한 통찰임에 틀림없다. 극단으로 치닫는 폭주열차를 겸손이라는 제동장치로, 나 자신뿐 아니라 주위까지 되돌아볼 수 있는 여유는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예전 한 정치인이 개천에서 용을 운운하며 우리 사회에서 모두가 용이 되는 건 힘든 일이며 그렇다면 개천에서 붕어로, 가재로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찾아야 된다고 말하였다. 얼핏 보면 이 책에서 얘기하는 능력주의와 맥락을 같이 한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을 빌미로 정치인은 엄청난 사회적 비난을 받아야만 했다. 공고한 능력주의 사회에서 사회적 이동이 힘듦을 인정하고 주어진 상황에서 행복을 찾자는 의도였을 것이다. 하지만 너무 멀리 갔다. 너무나도 승자의 관점에서 다수의 그렇지 못한 자들의 입장을 단언한 것이다. 본인은 용이면서 붕어로 만족하며 살라니 개천의 붕어들이 화날 법도 하다. 결국 하늘의 용을 잡아 끌어내렸다.

이 책도 확실히 승자의 관점에서 서술되었다고 생각한다. 결국은 승자들은 오만하지 말고 그렇지 못한 자들과 잘 어울려 공동선을 이루자는 내용인데 그렇다면 개천에 사는 나 같은 사람어떻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메시지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능력주의 사회에서 그저 승자들의 선처를 바라며, 인정받기를 바라고있을 것인가, 아니면 능력주의를 비판하며 문제 제기만 할 것인가. 그렇다고 능력주의가 쉽게 바뀌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가만히 있기에는 그렇지 못한 자들의 '자유의지'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그러기엔 너무나 불타오르는 자유적 본능이다. 이 말인 그래도 아직까지는 우리나라의 능력주의에서는 자유의지가 조건의 불평등을 극복할  있다는 의미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것이 마지막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미국의 능력주의의 뒤를 바뒤쫓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다.


개인의 자유적 본능과 모두가 잘 사는 공동선은 대립되는 기치이지만 어느 하나 소홀히 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개인의 철저한 자유 보장에 의한 양극화도 바람직하지 않고 평등을 통한 모두가 잘 사는 사회도 불가능할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나름 결론을 내리자면 '모두가 인정받는 사회' 가장 바람직한 사회가 아닐까 감히 생각해본다.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인정의 욕구를  충족할 수 있는 사회적 시스템과 각자의 자리에서 모두가 존중하고, 존중받을 수 있국민의 감수성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이데올로기나 경제시스템의 문제를 초월한다고 생각한다. 능력주의에 의한 어쩔 수 없는 계층이 발생하더라도 용이 붕어를 존중하고, 붕어도 용을 존중하는 개천내가 생각하는 행복한 사회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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