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밀한 '집 안'(가후쿠)에 울리는 낯선 '목소리'(오토)
"하지만 가후쿠 씨, 우리가 누군가를 완전히 이해한다는 게 과연 가능할까요? 설령 그 사람을 깊이 사랑한다 해도."
- 무라카미 하루키, 『여자 없는 남자들』, 「드라이브 마이 카」, 양윤옥 옮김, 문학동네, 2014, p.49 인용. -
가후쿠는 말했다. "우리는 이십 년 가까이 함께 살았고, 친밀한 부부이자 서로 신뢰할 수 있는 친구라고 생각했어. 어떤 일이든 솔직하게 이야기한다고 말이야.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어.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는지도 모르지. 뭐라고 말해야 좋을까…… 나에게 치명적인 맹점 같은 게 있었는지도 몰라."
- 무라카미 하루키, 『여자 없는 남자들』, 「드라이브 마이 카」, 양윤옥 옮김, 문학동네, 2014, p.49 인용. -
가후쿠는 아내를 깊이 사랑했다고 믿었다. 20년 가까이 함께했고, 서로를 신뢰한다고 생각했다. 즉, 그는 자신이 아내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는 원작 소설 및 영화 속에서 다음과 같이 직접 고백한다. “나는 그녀 안에 있는 무언가 중요한 것을 놓쳤는지도 몰라”(49) 그녀가 죽은 지금, 그 오해는 아마 영원히 풀리지 않을 수수께끼(mystery)로 남을 것이라고 덧붙인다. 가후쿠의 문제는 그가 타자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는 점이다. 혹은 듣기를 끝까지 두려워하고 불안해했다. 이것이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가 가후쿠에게서 드러내는 가장 뼈아픈 진실이다.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는 상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더 깊이 들어가면 타자를 환대하지 못하는 ‘닫힌 자아(closed ego)’의 문제로 논의를 확장시킬 수 있다. 이번 글에서는 이 영화를 나르시시즘(narcissism), 특히 에코와 나르키소스 신화(the myth of Echo and Narcissus)의 구조를 빌려 읽어내며 서구 지성사를 지배해온 ‘시각 중심주의(ocularcentrism)’의 폐쇄성까지 함께 논의하고자 한다.
먼저 에코와 나르키소스 신화의 구조를 살펴보도록 하자. 나르키소스는 다른 요정들의 사랑 고백 따위는 거절해버리며 자아도취에 빠진 인물이다. 더 나아가, 그는 자신의 모습에 매혹되어 결국 자기 자신과 닿으려다 익사해버린다. 이는 곧 자신이 먼저 존재한 뒤에 타자를 관측 후 지배하고자 하는 시각중심적 사유와 관련된다. 그에 반해 에코는 스스로 말할 수 없고, 오로지 타자의 말을 반복해 되돌려주는 목소리(voice)만을 가진 존재다. 이는 나르키소스와 반대로 타자가 먼저 존재해야만 비로소 자신이 존재할 수 있는 청각적 사유를 상징한다. 이와 관련해 다음 구절을 짤막하게 참고하도록 하자.
“철학은 평면거울을 통해 세계의 빛을 비추고, 그러한 시각 이미지를 통해 세계를 설명하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는 남성 주체가 거울을 통해 자신을 반사하고 시각적으로 나르시시즘적인 자기동일성을 재확인하며 구축한 남근시각중심적인 세계이다. 여기서 여성은 자기 자신을 시각적으로 재현할 도구가 없기 때문에 나르시시즘적인 남성 주체와 자기를 동일시하며, 그러한 ‘남성적 반사구조’ 속에 갇히게 된다.”
- 유서연, 『시각의 폭력』, 동녘, 2021, p.207 인용. -
그런데 이러한 시각중심적 주체는 자신은 볼 수 없으면서도 타자로부터 보여지기만 하는 무대(stage)에 노출(exposure)되는 상황을 두려워한다. 아니, 그것은 보통의 두려움을 가뿐히 넘어선 불안(anxiety)의 정동(affect)이라 할 수 있다. 가령 다음과 같은 나르키소스와 에코의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 그러하다.
"마침 소년은 성실한 친구들 무리와 헤어지며 "여기 누구 있니?"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에코가 "있니?" 하고 대꾸했다. 그가 어리둥절해져
사방을 둘러보며 "이리 와!" 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그녀는 그가 자기를 부르는 대로 그를 불렀다.
그는 뒤돌아보다가 아무도 오지 않자 "왜 너는 나를 피하지?" 하고
다시 외쳤다. 그리고 자기가 한 말을 대답으로 돌려받았다.
그는 대꾸하는 목소리에 속아 멈춰 서서는 "여기서 우리 만나자."
하고 소리쳤다. 에코는 이보다 더 기꺼이 대꾸하고 싶은 소리는
없었던지라 "우리 만나자"라고 대꾸하고는
제 말을 좇아 몸소 숲에서 나오더니 달려가
고대하던 그의 목을 두 팔로 껴안았다.
하지만 나르킷수스는 도망치며 말했다. "손 치워, 껴안지 말고!
그전에 내가 죽는 게 낫지, 나에 대한 권리를 너에게 넘기느니!"
- 오비디우스, 『변신 이야기』, 「나르킷수스와 에코」, 천병희 옮김, 숲, 2017, pp.141-142 인용. -
이처럼 나르키소스는 자신을 향해 돌진해 오는 에코의 품을 단칼에 거절하며, “나에 대한 권리를 너에게 넘기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고 선언한다. 이 순간은 단순한 거절이 아니다. 이는 상상계 속에서 자기-이미지(self-image)를 통제하고 있다고 믿던(오인한) 시각적 주체가 타자의 실재적 접촉 가능성에 맞닥뜨리며 그 세계가 '붕괴'되는 장면이다. 나르키소스에게 타자는 응시(gaze)의 대상일 수는 있지만, 결코 자신에게 손을 뻗어 이미지를 안전하게 바라볼 수 있는 거리를 무력화시키는 '실재(the Real)'가 되어서는 안 된다. 타자에게 노출되었고, 더 나아가 에코와의 접촉을 통해 거리가 없어질 뿐만 아니라 서로 겹치게 된 나르키소스는 혼돈스러워 미치게 될 지경이었다. 그렇게 불안에 압도된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자기애에 사로잡혀 죽음을 맞이하게 되어 수선화를 남긴다.
"쉽게 전염되어오는 그대의 필로소피
친밀함과 낯설음 그 한가운데 있어도
불협과 리듬의 혼란 그 속에서마저 달콤해
그대를 보고 있으면"
- 심규선, <필로소피> 中 -
그런데 나르키소스의 이야기는 단지 옛 신화 속 비극적 사건이라고 볼 수는 없다. 이러한 비극은 오늘날의 주체 또한 반복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구조적 진실이다. 실제로 우리는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의 주인공 가후쿠를 통해 이처럼 동일한 나르시시즘적 주체의 구조를 재발견하게 된다. 에코(echo)의 메아리처럼 반복되는 아내의 목소리 속 진실을 대면하기에 불안했던 그는 나르키소스처럼 도피하고야 만다. 그리고 끝내 그 또한 자기애에 파묻혀 멜랑꼴리가 피워낸 죽음의 향과 함께 하루하루를 연명한다.
이렇게 보면 영화 속 주인공 가후쿠를 '보는 자'로 고착된 나르키소스적 주체로 조명하고, 반대로 그의 아내 오토의 존재를 '타자의 목소리'라는 에코적 구조 속에서 다시 읽어낼 수 있다. 공교롭게도, 주인공의 이름 '가후쿠'는 한자로 '가복(家福)'이라 해서 친밀한 주체를 상징하는 '집 안'이라 할 수 있겠고, 그의 아내 오토는 한자로 '음(音)'이므로 타자의 낯선 '목소리(voice)'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이때 가후쿠에게 '집 안'은 내가 자족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닫힌 거울 무대(mirror stage), 다시 말해 응시의 질서를 통해 통제 가능한 친밀한 세계다. 그러나 그 안에서 들려오는 오토의 목소리는 응시로 붙잡을 수 없는 타자성, 그러나 여전히 유령(ghost)처럼 남아서 거울에 틈을 내는 목소리라는 형태로 반복적으로 말을 건넨다. 가후쿠는 그 목소리가 자신에게 말을 건네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목소리가 향하는 질문에 끝내 응답(response)하지 않음으로써 진실한 관계에 책임(responsibility)지지 않으려 한다. 그는 영화 속 대사가 말하듯 "제대로 상처받았어야 했"다. 이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원작 소설 「기노」 속 다음과 같은 구절을 통해 그의 심리를 보다 자세히 살펴보자.
기노는 그 방문이 자신이 무엇보다 원해왔던 것이며 동시에 무엇보다 두려워했던 것임을 새삼 깨달았다. 그렇다. 양의적이라는 건 결국 양극단 중간의 공동(空洞)을 떠안는 일인 것이다. "상처받았지, 조금은?" 아내는 그에게 물었다. "나도 인간이니까 상처받을 일에는 상처받아." 기노는 대답했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적어도 반은 거짓말이다. 나는 상처받아야 할 때 충분히 상처받지 않았다, 고 기노는 인정했다. 진짜 아픔을 느껴야 할 때 나는 결정적인 감각을 억눌러버렸다. 통절함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서 진실과 정면으로 맞서기를 회피하고, 그 결과 이렇게 알맹이 없이 텅 빈 마음을 떠안게 되었다.
- 무라카미 하루키, 『여자 없는 남자들』, 「기노」, 양윤옥 옮김, 문학동네, 2014, p.265 인용. -
즉, 친밀한 '집 안'에서 유령[(g)host]과도 같은 타자의 낯선 '목소리'는 곧 언캐니(uncanny)를 이끌어내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한편으로는 친밀한 오토의 목소리를 죽음 충동(death drive)에 이끌려 강박적으로 반복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가후쿠는 그러한 반복이 낳는 언캐니의 불안을 감당하지 못했기에, 그 목소리에 한 발짝 더 나아가지 못하고 애써 외면했다. 결국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가 우리에게 묻는 것은 "누군가를 완전히 이해한다는 게 과연 가능할까요?"다. 당연히 "누군가를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조금이나마, 아주 조금이나마 타자에게 닿고자 나아가려면 자신의 내부에서 들리는 타자의 목소리에 응답(response)하여 책임(responsibility)을 지려고 해야 한다. 가후쿠는 이 책임을 끝내 회피함으로써, 사랑했던 타자와의 관계를 정리하지 못한 채, 무한한 응시의 거울 무대를 '멜랑꼴리'의 상태로 떠돌며 다음과 같이 한동안 방랑하게 된다.
기노는 이불을 둘러쓰고 눈을 감고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고 자신의 비좁은 세계로 도망쳐 그 안에 틀어박혔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아무것도 보지 마. 아무것도 듣지 마. 하지만 그 소리를 지워버릴 수는 없다. 설령 세상 끝까지 도망치고 양쪽 귀를 찰흙으로 막아버린다 해도 살아 있는 한, 의식이 실낱만큼이라도 남아 있는 한 노크 소리는 그를 쫓아올 것이다. 그것이 두드리는 것은 비즈니스호텔 방의 문이 아니다. 그것은 그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사람은 그런 소리로부터 완전히 도망칠 수 없다.
- 무라카미 하루키, 『여자 없는 남자들』, 「기노」, 양윤옥 옮김, 문학동네, 2014, p.266 인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