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를 벗어날 때처럼 사람이 아름다운 때는 없다"

by 바람
image.png?type=w966 내 소중한 친구 찬희의 아름다운 시편 필사본이다.


30:11 주님께서는 내 통곡을 기쁨의 춤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나에게서 슬픔의 상복을 벗기시고, 기쁨의 나들이옷을 갈아입히셨기에
30:12 내 영혼이 잠잠할 수 없어서, 주님을 찬양하렵니다. 주, 나의 하나님, 내가 영원토록 주님께 감사를 드리렵니다.

- 시편 30:11-12 (새번역) -


위 구절을 필사하며 상당히 감명받고 인상 깊었다며 친한 친구가 공유한 적이 있다. 그 친구는 감정 메마른 사람도 시편을 보면 없던 감수성도 샘솟을 것 같다고 표현할 정도로 감명을 받은 듯했다. 내 생각에도 시편에는 참으로 아름답고 다채로운 표현들이 많다. 특히 위 구절은 어떻게 이런 표현을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멋있고 아름다우며 절절한 표현들이다. "내 통곡을 기쁨의 춤으로 바꾸어", "나에게서 슬픔의 상복을 벗기시고, 기쁨의 나들이 옷을 갈아입히셨기에"(시편 30:11)... 이런 표현을 듣는 사람이야말로 "영혼이 잠잠할 수 없어서, 주님을 찬양"(시편 30:12)하게 될 것 같다.


특히 개인적으로는 무언가가 바뀌어지고 변화되었다는 느낌을 주는 표현들이 마음에 들었다. 많은 이들이 말하는 것처럼 "신앙은 변화"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변화하지 않으면 신앙이라고 할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죽은 믿음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물이 포도주로 변한 구절(요 2:9)처럼 의식도 근본적으로 변화해야 한다. 기독교 성서에는 이러한 구절처럼 변화를 강조하는 은유(metaphor)가 많이 등장한다. 일례로 요한복음에서 니고데모가 예수로부터 가르침을 얻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고 몰래 방문한 장면이 있다. 그때 예수는 니고데모에게 다음과 같은 화두를 던졌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3:3)



그 순간 니고데모는 벙찐 얼굴로 되물었다.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느냐 이 말이다. 물론 이는 예수의 단순한 비유다. 니고데모가 예수의 말씀을 너무나 진지하게 경청한 나머지 벌어진 코믹한 해프닝인 것이다. 이때 예수가 말한 '거듭남'은 그가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외친 '회심(metanoia)'를 뜻한다. 여기서 말하는 '회심'은 흔히 '회개(repent)'라고 오역되는 '메타노이아(metanoia)'를 가리킨다. 본래 이 단어에는 죄를 뉘우쳐야 한다는 뜻이 일절 들어있지 않다. '메타(meta)'는 변화를 뜻하고, '노이아(noia)'는 마음의 상태를 뜻한다. 그러므로 '메타노이아'는 그저 마음상태를 고쳐먹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절망으로 가득차 있어 죽음과 다를 바 없는 육적인 삶에서 생명력있는 영적인 삶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라는 구절이 뜻하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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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늘 거듭나야 한다. 거듭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자기만의 동일자 세계에만 갇혀서 차이와 타자로 가득한 다른 세계를 받아들일 수 없는 "터진 웅덩이"(렘 2:13)가 되기 마련이다. 항상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변화하는 경계선상에서 타자에게 열려있을 때에만 주체가 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나는 내가 아닐 때에만 내가 될 수 있다. (being outside itself) 성서의 출애굽기(Exodus)를 떠오르게 해준다. 유대인들이 스스로 주체적인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상처입을 가능성을 감수하고 이집트 바깥으로 노출되어야만 했던 것처럼 말이다. 또한 이러한 생각은 도마복음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과 맞닿아있다고 볼 수 있다.


"진실로 나라는 너희 안에 있고, 너희 밖에 있다. (Rather, the kingdom is inside you and it is outside you.)"

(도마복음 3:3 (<도올의 도마복음한글역주 2>, 김용옥, 통나무, p.151)




이러한 구절은 훗날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1)와 같은 누가복음에도 영향을 미쳤으리라고 본다. 누가복음의 구절만 하더라도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초월적으로 외재화해온 천국을 우리들의 마음에 내면화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그런데 도마복음은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간다. 또 다시 "너희 밖에"를 동시에 말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하나님의 나라"니 "천국"이니 하는 이원론적인 느낌이 나는 표현까지 버리고 오직 "나라(the kingdom)"라는 표현만 담백하게 말한다. 그렇다면 왜 다시 "너희 밖에"인가?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있겠지만 나는 이것이 타자에게 열려있어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이러한 해석은 예수가 서로 사랑을 주고받는 공동체를 강조했다는 점에서 크게 무리가 없다.(요 13:34) 그리고 진정한 사랑은 자기를 벗어나 타자에게 열려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정현종 시인이 말하듯이, "자기를 벗어날 때처럼 사람이 아름다운 때는 없다."


"자기를 벗어날 때처럼
사람이 아름다운 때는 없다"

- 정현종, <사람은 언제 아름다운가>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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