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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나 Mar 29. 2023

엄마의 뜨개방

옛날 뜨개방

지난번에 엄마의 첫 번째 뜨개방 이야기를 했었다. 오늘은 요즘에는 많이 없어지고 있는 뜨개방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엄마의 뜨개방은 요즘 내가 운영하는 뜨개 공방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마룻바닥에 옹기종기 앉아서 점심시간에는 같이 밥을 해 먹고 수업이라기보다는  사랑방 느낌이다. 여름에는 손님이 많이 없었고 겨울에는 항상 복작복작 앉을자리가 없었다.  뜨개방은 거의 수강료 무료이다. 수강료가 무료인 만큼 다 알려주지 않는다. 엄마의 뜨개방도 그러했다. 하지만 수강료가 무료인 대신에 재료비가 소비자 판매가 보다 조금 더 더해진다. 그래도 수강료를 받는 것보다는 적은 금액이다. 그래도 세상에 진짜 공짜는 없다!! (요즘 남아 있는 뜨개방은 어떨지 잘 모르겠다.)


엄마는 회원님들께 게이지 노트를 하나씩 이름을 적어 만들어 드렸고 회원님이 원하시는 디자인의 옷이 있으면 슥슥 삭삭 그려서 몇 분 만에 게이지를 뚝딱 내곤 했었다. 지금 내가 하는 방식보다는 조금 더 쉽게 계산할 수 있는 약식 방법이었다. 그렇다 해도 게이지를 무슨 5분 만에 내냐고?! 천재 아니야? 그리고 노트에 코 수 단수 cm 경사 뜨기 횟수까지 야무지게 적혀 있다. 지금 우리가 보는 도안의 느낌이 아니고 암호 같지만 계속 함께하는 회원님들은 보면 다 알 수 있는 약속 같은 것이었다. 다른 뜨개방들은 게이지 비용 따로 코 잡는 비용 따로 마무리 비용 따로 받기도 했다는데 엄마도 참 미련하지... 엄마의 노동력으로 그것을 다 해주고 있었다. 일단 게이지 콧수가 정해지면 흔들코로 코를 만들어 주고, 옆선 잇기, 소매 잇기, 코막음 실정리 등 하기 싫고 힘든 것들은 엄마가 다 해주고 회원님들은  뜨는 즐거움만을 느꼈다. 뜨개 하는 것이 즐겁고 재미도 있기에 뜨개방을 찾은 것이지 요즘처럼 정확하게 배워서 내가 꼭 해낼 거야 하시는 분들도 딱히 많이 없었던 거 같기도 하다. 엄마는 옆선 잇는 것도 도사고 흔들코는 손이 안 보이고 실정리는 또 어쩜 그리 신속하고 깔끔하게 잘하는지~엄마가 꼼꼼하게 잘해주니 더 믿고 맡기신 거 같기도 하다. 그것마저도 즐거우셨다는데....... 하.. 지금 내가 생각해 보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마음이 짠해온다. 빨리 해달라고 재촉하시는 분들도 꽤 많았던 기억이 있다. 어느 날 퇴근 후 엄마 뜨개방에 놀러 갔는데 엄마가 세상에 정말 낭창한 것이다!! 속으로 혼자 얼마나 웃었던지 엄마도 사람인지라 힘들기는 했나 보다. 여기저기서 선생님 부르며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 시끌시끌했다. 영혼 없는 대답만 하는 엄마를 보고 저래도 되나 싶기도 하고 짠하기도 하고 어이가 없기도 했다. 그런데 회원님들도 엄마가 대답 안 해도 그러려니 하고 그냥 다들 각자 자기 말만 하고 있었다. 서로 다 다른 얘기 하는데 계속 시끄러우며 뭔가 대화가 흘러가는 느낌이랄까?

 

엄마가 뜨개방 오픈하던 시기에 이미 뜨개방 문화가 자리 잡혀 있었는데 뜨개방이 우후죽순 생길 때 경쟁으로 누군가 무료 강습을 시작하면서 전체적인 분위기가 그렇게 흘러갔다는 얘기를 들었다. 사실인지는 잘 모르겠다. 경쟁에서 함께 승리하는 방법을 선택했어야 했는데 함께 힘들어지는 방법을 잘못 선택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엄마의 뜨개방에도 가끔 젊은 회원님이 오셨고 방학 시즌에는 초 중고등학생 친구들도 많이 찾아왔다. 뜨개방에 놀러 가서 젊은 회원님이 계시면 내가 종종 수업도 해드리곤 했는데 추억이 몽글몽글하다. 총각 수강생들도 꽤 많았다. 여자 친구 목도리 모자 뜨러 온 총각 수강생들 중에는 카드 영업 사원도 있었는데 어찌나 싹싹했던지 영업 실적을 엄청 올렸다는 후문이 있었다. 엄마가 퇴근해서 이야기해주는 뜨개방 이야기가 가끔 너무 재미있었다. 망고 모자가 유행했던 그 해에는 정말 젊은 남자분들이 많이 왔다고 했다. 엄마의 뜨개방 이야기를 듣는 게 참 즐거웠다. 그 총각 아직 오냐고 물어보기도 하고 그러면 엄마는 오늘은 또 다른 총각이 왔다며 얘기도 하고 요즘 젊은 사람들 너무 싹싹해서 이모님들의 사랑을 독차지한다는 얘기도 그때의 나에게는 너무 신선하고 재미있었다. 그 총각 얼굴이 궁금해서 일 마치고 뜨개방에 놀러 간 적도 있었다. 피부가 뽀얗고 키도 크고 진짜 싹싹했다.


엄마는 뜨개방 이사를 진짜 많이 했다. 옮길 때마다 마루를 깔고 열선 작업을 해서 엉덩이가 뜨끈뜨끈하니 너무 좋았다. 주로 퇴근하고 엄마 가게에 놀러 갔는데 피곤했던 나는 방에 누워서 잠을 많이 잤다. 내가 웅크리고 자고 있으면 손님들이 담요도 덮어주시곤 했다. 아침 이른 시간에 나가서 밤늦게까지 있어야 했기에 없는 게 없었다. 밥솥과 큰 냉장고 주방은 필수였다. 가끔 엄마 가게에서 먹는 밥이 참 맛있었다. 손님들이 가져오신 반찬들과 즉석에서 끓인 된장찌개 맛을 아직 잊을 수가 없다.


뜨개에 잠시 흥미가 떨어져 있다가도 엄마 가게에만 가면 손이 근질근질 예쁜 옷 보면 다 뜨고 싶고 엄마가 샘플로 걸어놓은 옷은 죄다 가져다 입고 싶었다. 그렇게 가게에 있는 실을 쓰윽 하나 꺼내고 엄마 나 이거 뜨고 싶어 게이지 내줘하고 시작해 놓고는 일하느라 바빠 하다만 뜨개들이 쌓여갔다. 최근에 완성한 것도 많지만 나 몰래 엄마가 버린 것도 엄청 많다. 뜨개 하는 모습들이 각양각색이라 보는 것만으로도 재미있었다. 이상한 암호 같은 기호와 설명을 척척 알아듣고 무늬도 주머니도 화려한 디자인의 옷을 척척 떠내시는 것도, 가위로 싹둑 잘라내고 수정하는 것도 신기해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소소한 뜨개 팁들을 엄마 뜨개방에서  많이 배웠다.


결혼하기 전에 퇴사를 하고 남편이 있는 울산에 직장을 알아보던 중에 잠시 자유의 시간이 생겨서 뜨개 소품들을 만들어 판매했었다. 인형, 키링, 핀, 머리띠 등등 잠도 안 자고 열심히 만들었다. 만들어서 포장해서 엄마 가게에 가져가면 손님들이 하나씩 사주셨다. 인정이 넘치는 곳이었다. 그렇게 용돈을 벌었다. 내가 처음으로 뜨개로 돈을 벌었던 순간이다.

엄마도 뜨개방을 하며  몸과 마음이 고된 시간도 있었겠지만 뜨개와 엄마의 일을 너무너무 사랑했던 엄마는 힘든 내색보다는 늘 좋다는 말씀을 더 많이 하셨다.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났고 아직까지 엄마에게 좋은 친구로 남아 적적하지 않게 외롭지 않게 함께해 주시니 감사하다.

뜨개방 문화를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다 가르쳐 주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뜨개방은 생계를 위해 운영을 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렇다고 지금의 공방이 생계를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은 아니다) 대부분 무료 수강으로 진행이 된다. 그러다 보니 수업하는 학원이라기보다는 실가게에서 실을 사면 보너스로 뜨개를 배우며 함께 할 수 있는 곳이라는 느낌이다. 꼼꼼하게 다 알려주기에는 에너지가 늘 부족했을 것이고 설명하고 가르쳐 주는 것보다는 해주는 것이 빠르니 그리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다 알려주면 다음에 재방문을 하지 않을 테니.. 다 알려줄 수도 없었을 것이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와 분위기의 차이가 아닐까 생각한다.

뜨개에 관심 있는 분이라면 뜨개를 배우고 싶어서 뜨개방을 기웃거렸지만 결국 실망하고 돌아선 경험이 많을 것이다. 지금의 공방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에 어머님들의 압도적인 포스에 눌리기도 하고~ 질문할 타이밍을 잡지도 못하고 물어보면 가르쳐 주기보다는 해주시니 실력은 늘 제자리! 였던 경험.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다른 곳! 시대적 문화적 차이가 있지만  그곳 또한 뜨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든 곳이고  나에게 "뜨개방"은 엄마의 삶이자 꿈이자 좋은 추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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