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디 아더스> & 소설 <환상의 빛>
추천 의뢰를 자주 받는 편이다. 좋은 책, 영화, 음악부터 식당까지 추천해달라는 대상은 꽤 다양하다. 좋아하는 것들을 설명할 때만큼은 목소리가 한 톤 정도 올라가고, 외향성은 +30 쯤 더해지는 나로서는 추천 후 피드백을 무시할 수 없는 일이다. 얼마 전 좋은 영화 추천해달라는 친구에게 <디 아워스>를 추천했다가 “너무 우울한 거 아니냐”는 피드백을 받았다. 은근 기분 상하네, 이거. 좋은데 밝은 영화 달라고 애초에 설명을 해주던가. 그러고 보면 요즘처럼 ‘우울하다’는 표현이 자주 쓰이는 때가 또 있었던가. SNS상에서 우울함은 맛있는 음식이나 즐거운 여가생활 등의 반작용으로 손쉽게 해결할 수 있는 찰나의 증상이고, 스스로 생을 등진 유명인들의 뉴스 기사에는 우울증이라는 명료한 단어가 모든 인과를 편리하게 설명한다. 인간의 심연을 특정 단어로 퉁 치려는 태도에 나는 자주 불편함을 느낀다. 언어는 유한하고 첨언은 본질을 오도한다. 타인에 대해, 차마 가 닿을 수 없는 생에 대해 가까스로 섬세해 질 수 있을 때는 침묵을 지킬 때 뿐이다. 쉬운 설명을 유보해야 할 때, 삶과 죽음이 혼재한 무경계의 적막이 드리운 두 작품을 떠올린다.
스티븐 달드리의 <디 아워스>에는 우아하고 서늘한 적막이 가득하다. 영화에는 세 여인이 등장한다. 1923년의 버지니아 울프, 1951년의 로라 브라운, 2001년의 클라리사 본. 시공간을 넘나드는 서사 속에서 그들은 각기 다른 고민에 잠겨있다. 딱히 부족할 게 없어 보이는 그들의 내면에는 세찬 밀물과 썰물이 넘나든다. 여인들의 삶은 살아가야 할 현실과 미묘하게 어긋나 있고, 출구 없는 일상에서 길 잃은 존재의 불씨는 서서히 꺼져간다. 무엇이 그들을 그토록 방황하게 하는지는 마지막까지 설명되지 않는다. 그 석연찮음이 내가 이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다. 원인이 정확한 고통은 드물다. 사건이 아닌 존재의 중심에서 기인한 고통일수록 더더욱 그러하다. 언어가 소거된 자리에서 배우들의 표정과 몸짓은 한층 섬세해진다. 생기 잃은 눈과 떨리는 입술을 지켜보는 이는 정확히는 몰라도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다. 삶에 균열이 생긴 여인에게는 남편의 생일케이크를 만드는 일조차 숨 막히는 무게로 짓눌러 올 수 있음을. 그는 이웃집 여인에게 입을 맞추며 무력함에 저항한다. 소리 없는 비명이자 스스로에 대한 연민의 증표다. 생의 민낯이란 이처럼 형언할 수 없는 비문들의 집합체임을, 달드리는 설명 대신 적막으로 전달한다.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역시 기차역 신 이다. 사라진 버지니아를 찾으러 기차역으로 달려온 남편은 참아온 울분을 토해낸다. 쉰 목소리로 “당신은 제 정신을 유지할 의무가 있다”고 소리치는 그의 말이 길어질수록 버지니아의 고통은 왜곡된다. 남편이 ‘의무’의 세계로 자신을 몰아넣고 정신세계를 판단한 순간, 그들 사이에 그어진 보이지 않는 선을 재차 확인한 버지니아는 절망한다. 우물처럼 깊은 두 눈으로 죽음을 염원하는 세기의 작가. 런던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아내의 간절함을 받아들인 레너드 울프의 피로한 얼굴에는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여인을 영영 이해할 수 없으리라는 진실을 깨달은 자의 허망함이 서려있다. 그 어떤 말로도 다독여질 수 없는 심연이 그들 사이에 가로놓여 있었다.
무작정 서울역으로 가 아무 열차에나 올라타고 싶은 날이 있다. 문득, 삶이 맞지 않은 옷처럼 어딘가 잘못된 현실을 두르고 있는듯한 느낌을 좀처럼 지울 수 없는 날. 그런 날이면 러닝화에 발을 구겨 넣고 머릿속에서 수없이 그린 기차역 대신 생고생이 기다리는 체육관으로 향하는 내 모습에 코웃음을 치게 된다. 오래 살고 싶지도 않은 주제에 운동은 개뿔. 신형철 평론가의 산문집에서 <환상의 빛>에 대한 글을 처음 읽었을 때, 작품에서 발췌한 한 문장에 단숨에 마음을 뺏긴 이유도 이런 자가당착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다미오 씨는 차분하고 부드러운 성격의 사람이고, 전 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도모코도 저를 잘 따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저는 아내와 젖먹이를 버리고 멋대로 죽어버린 당신에게 이렇게 말을 걸곤 합니다."
‘멋대로 죽어버린 당신’이라니.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먹먹함이 밀려왔다. 동시에 한 남자가 그렇게 멋대로 죽어버린 이유를 왠지 알 것 같았다. 미야모토 테루의 <환상의 빛>은 서신의 형식으로 진행되는 단편소설이다. 수년이 흐른 후에도 여전히 자살한 남편에게 마음 속 넋두리를 하는 유미코. 전 남편이 치일 줄 알면서 한신 전차 철로 위를 걸어간 이유를 납득해보려 애쓰지만, 끝내 답을 찾지 못한다. 참았던 물음을 입 밖으로 내뱉은 그녀에게 재혼한 남편은 한 마디를 남길 뿐이다. “사람은 혼이 빠져나가면 죽고 싶어지는 법이야.”
조금 더 시간이 흐른 후, 유미코는 체력이나 정신력같은 표면적인 이유와는 별개로 “이 세상에는 사람의 혼을 빼가는 병이 있다”고 확신한다. 그런 병에 걸린 사람의 눈에는 바다에 일렁이는 한 순간의 잔물결이 더할 나위없이 아름다운 것으로 비춰질지 모른다. 그래서 “어쩌면 당신도 그날 밤 레일 저편에서 그것과 비슷한 빛을 봤는지도 모르겠”다고, 조용히 짐작해본다. 소소기 바다의 흔들리는 물결 너머로 흩어지는 유미코의 모호한 독백만이 불가해한 생의 진실에 가 닿을 수 있는 최선의 해석이다.
한 사람을 온전히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 타인에 대한 쉽고 간결한 결론을 들을 때마다 나는 ‘우리가 행복했던 것보다 더 행복한 두 사람은 없을 것’이라는 유서를 남기고 물 속으로 걸어 들어간 작가와 선로 위를 걸어가는 낯선 남자의 뒷모습을 떠올린다. 그가 달려오는 열차를 피하지 않은 이유가 단지 삶이 우울해서 였을 뿐인지, ‘마음의 병’이라는 동정이나 ‘무책임하다’는 비난 외에 어떤 말을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본다. 혹은 어떤 말만은 해서는 안되는지를. 김혜리 평론가는 <환상을 빛>을 두고 ‘침묵을 경청해야 하는 작품’이라고 표현했다. 살아온 날들이 더해질수록 삶의 의미를 설명하는데 망설임이 길어진다. 인생의 한 구간을 반듯이 잘라내 들여다보면, 그 속에 담긴 진실들은 대체로 모호하게 일그러져 있을 것이다. 반듯한 단면 밖에 보지 못할 때, 우리는 얼마나 쉽게 타인의 속사정을 외면하고 오도하는가. 편리한 언어가 휩쓸고 간 진실은 얼마나 지리멸렬한가. 사람의 생이란 알수록, 그리고 살수록 감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만이 가까스로 읊조릴 수 있는 유일한 진실이다. 필립 로스가 썼듯 “산다는 건 사람들을 오해하는 것이고, 오해하고 오해하고 또 오해하다가 신중하게 다시 생각해본 뒤에 또 오해하는 것”이라면, 진실이 무력한 생의 수많은 법정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존엄한 행동은 침묵을 지키는 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