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를 이해로 치환하기, [여행과 나날]

두 계절, 두 이방인

by 최필록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들께서는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글을 쓸 때면 재능의 한계를 통감할 때가 많습니다. 나보다 재능이 많은 누군가를 만날 때도 물론 그렇지만, 세상에 내놓았을 때 독자의 반응이 싸늘하다면, 그것만큼 절망적인 일도 많이 없을 거예요. 우리에겐 [써니]로 잘 알려진 배우 심은경이 주연을 맡고 '미야케 쇼' 감독이 연출한 일본 영화 [여행과 나날]은 글뿐만 아니라 창작을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겪어봤을 슬럼프를 소재로,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떠난 짧은 여행을 다루고 있습니다. 지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보고 나서 은은하게 계속 생각이 났던 영화였는데, 이번에 정식 개봉을 하게 되어 2회차 관람을 하고 왔습니다.





영화는 2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부는 주인공 '이'가 쓴 영화 시나리오의 이야기인데, 여름의 바다 마을에 여행을 온 젊은 여자와 어쩐지 권태로운 인상의 앳된 청년이 등장합니다. 바닷가에서 만난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들은 어쩐지 현학적으로 들립니다. 처음 만난 상대에게 꺼내기에는 뜬금없기도 하고 말이지요. 첫날의 우연한 만남 뒤에, 태풍이 들이닥친 둘째 날의 장면이 이어집니다. 비가 세차게 내리는 바닷가에서 다시 만난 두 사람, 여자는 갑자기 수영을 해야겠다고 합니다. 얼떨결에 따라나서는 남자. 높게 일렁이는 파도를 사이에 두고 외치듯 대화가 오갑니다. 여자는 물고기를 봤냐고 물어보고, 그 말에 남자는 물고기를 찾으러 더 깊은 바다로 들어갑니다. 여자가 다시 해변으로 빠져나온 뒤에도 말이지요. 어쩐지 불안해 보이는 여자의 표정을 끝으로, 첫 번째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2부는 영화 시나리오 작가인 '이'가 겪는 슬럼프와,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즉흥적인 여행에 대한 내용입니다. 1부의 이야기를 보다 보면 어딘가 이상하고 난해하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데, 이는 이야기를 만든 '이' 또한 느끼고 있습니다. 영화 전공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시사회에서 '본인이 쓴 시나리오가 영화화된 것을 본 소감'을 묻는 학생의 질문에 '나는 재능이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에서 짐작할 수 있어요. 시사회가 끝난 후 다음 시나리오는 잘 써지는지 묻는 교수, 아무래도 쉽게 쓰기가 어렵다고 말하는 '이'의 대답에 교수는 '어디 여행이라도 다녀오지 그래요?'하고 말합니다. 마치 그 말이 유언인 것처럼, 교수는 다음 장면에서 급사해버리고 맙니다.


영화 관계자들이 교수를 추모하기 위해 교수의 집에 모입니다. 그곳에서 만난 교수의 쌍둥이 동생은 교수가 모아 오던 오래된 필름카메라를 사람들에게 나눠줍니다. '이'는 괜찮다며 거절하지만, 어느샌가 그녀의 손에는 카메라가 들려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다시 시나리오를 쓰려하지만 여전히 지지부진한 상황에서, 창문 너머로 열차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립니다. 의식할 새도 없이 카메라를 들고 달려가는 열차를 찍는 '이', 그리고 문득, 여행을 가야겠다고 결심합니다.




눈길이 닿는 곳마다 하얗게 눈이 쌓인 어느 동네로 도착한 '이'는 흘러가는 강물도 바라보고, 오래된 동네 가게에 들어가 식사도 하며 시간을 보냅니다. 혼자 여행을 온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는 경험들이 지나간 후에, 숙소를 잡으려 하는데 무슨 이유에선지 시내 모든 숙소는 이미 만실입니다. 다행히 산 너머에 있는 여관에는 자리가 있을 거라고 알려주는 사람이 있었고, 그녀는 울며 겨자 먹기로 산속으로 향하게 됩니다. 밤이 되어서야 여관이 있는 곳에 도착하지만, 인기척이 없습니다. 한참을 '계세요?'라며 부르던 와중에 '누구요?'라며 퉁명스레 묻는 중년의 남자를 마주합니다. 여관 주인장 '벤조'와의 첫 만남입니다.


제멋대로 기른 수염이며 되는대로 입은 것 같은 옷가지, 항상 술에 취해있는 것 같은 말투까지, '벤조'의 첫인상은 누가 보더라도 좋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이' 또한 이런 상황이 불편한지 경계하는 낯빛입니다. 짧은 대화를 나누다 '그럼, 알아서 자쇼.'라며 먼저 곯아떨어지는 벤조, 당황스러움도 잠시 코를 억수로 고는 소리에 '이'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게 됩니다.


여관에서의 둘째 날이 밝습니다. '이'에게 이 여관에 대한 이야기를 써보는 건 어떻겠냐고 물어보는 벤조. '이'는 그렇다면 몇 가지 물어볼 것이 있다며 벤조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누가 봐도 아이가 적어놓은 것 같은 낙서며 문에 그려진 예쁜 그림들을 예를 들며 보통 이런 여관은 가족이 운영하는 경우가 많은데 다른 가족분들은 어디에 있는지 물어보죠. 벤조는 다들 떠나버렸다고만 말하며 자세한 대답을 꺼립니다. 마침 쓰던 이야기도 잘 안되고 있던 차에 옳다구나 싶던 '이'는 곧바로 실수했다는 것을 깨닫고, 너무 사적인 질문을 한 것 같다며 사과합니다.


밤이 찾아옵니다. '아무래도 난 끝난 것 같아요'라고 말하며 자리에 눕는 '이', 벤조 또한 술에 취해 잠을 청하려 누워있습니다. 낮에 있던 사건이 어쩐지 두 사람 사이에 있던 경계를 무너뜨린 것 같은 느낌입니다. 이어 '비단잉어 양식을 해보는 건 어때요? 뒤편에 있는 연못에서.'라고 벤조에게 제안합니다. 처음에는 '이런 작은 연못은 아무도 찾지 않는다'며 거절하는 벤조, 하지만 이내 무언가 결심한 듯 '비단잉어를 잡으러 가자'고 제안합니다. 두 사람의 소소한 일탈이 시작됩니다.


깊게 눈이 쌓인 산속, 어둠 속을 두 사람의 실루엣이 걷습니다. 옆동네에 큰 연못을 향해 가는 '여정'입니다. 연못에 도착한 벤조는 망설임 없이 비단잉어 한 마리를 훔칩니다. '이'가 말려보지만, 이미 공범이 되어버렸습니다. 조심스레 다시 여관으로 돌아오려던 길에, 그들 앞에 어린아이가 나타납니다. 벤조를 보고 놀란 기색도 없이 '아빠'라고 부르는 아이. 이곳은 사실 벤조의 전처와 딸이 사는 곳이었습니다. 비단잉어를 훔치는 것에는 성공하지만, 반대로 '이'는 카메라를 분실합니다. 목에 메고 있던 것이 연못 근처에서 흘려버린 것 같다고, 다시 찾으러 가려하지만 벤조는 봄에나 찾을 수 있을 거라며 말립니다. 아무래도 비단잉어의 값으로 치른 것 같습니다.


다시 돌아온 여관에서, 벤조는 무사히(?) 비단잉어를 훔쳐온 것에 만족해합니다. '이'는 먹으려고 훔쳐온 게 아니었냐고 반문하는데, 그는 '외국에 내다 팔면 한 마리에 몇백만엔씩은 한다'며 애초에 그녀와는 다른 생각이었음을 말해줍니다. 잡아온 녀석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나무통을 열어보는 벤조. 그러나 기세 좋게 했던 말이 무색하게도, 통 안의 비단잉어는 꽁꽁 얼어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무엇을 한 거였을까요.'라며 웃음을 터트리는 '이'. 어딘가 허탈하지만 그럼에도 여행에서 '가장 즐거운 경험'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런 '이'에게 핀잔을 주며 속상한 듯 돌아눕는 벤조. 또 하루가 지나갑니다.






늦은 밤, 여관에 경찰이 방문합니다. 연못 근처에 떨어져 있던 카메라를 보고 벤조의 전처가 신고를 한 것이지요. 생각보다 빨리 벤조를 찾아온 것을 보면 혹시 벤조의 딸이 아버지와의 만남을 말한 건 아닐까 잠시 생각했지만, 곧 그건 아닌 것으로 밝혀집니다. 근처에 찍혀있는 두 사람의 발자국을 보고 그저 심증으로 온 것이었지요. 경찰이 카메라를 내밀자 발뺌하려던 두 사람의 표정은 숨길 수가 없어지고 맙니다.


사건은 그렇게 해프닝으로 마무리됩니다. 다시 복귀하려던 경찰이 벤조의 좋지 않은 안색을 보고 이마를 짚어 보는데, 열이 펄펄 끓는다며 병원까지 데리고 갑니다. 즉흥적인 일탈이 끝난 뒤에, '이'는 주인 없는 여관에 혼자 남게 됩니다. 열차는 하루에 두 번, 아침과 저녁에 있습니다. 저녁 열차를 탈 참입니다. 그럼 남은 시간에는.. 이불을 개키고, 바닥을 쓸고, 책상에 앉아 여관을 찬찬히 둘러보고.. 마침내 하얀 공책에 글자를 새깁니다. 하얀 눈밭에 발자국이, 적힙니다.





영화의 영문 제목은 [Two Seasons, Two Strangers]입니다. 영화를 다 보고 나니 [여행과 나날]보다 조금 더 직관적인 제목인 것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2부의 액자식 구성인 영화에는 제목 그대로 여름과 겨울, 두 계절과 두 명의 이방인이 등장합니다(1부의 여행객 여자와 2부의 '이'). 처음 관람했을 때에는 1부 여름의 이야기가 지나치게 길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끝까지 다 보고 나니 1부와 2부의 이야기가 서로 상응하도록 장치해 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1부에 해당하는 '이'의 시나리오는 이를테면 '완성되지 못한 이야기'입니다. 난해하고 이상한 기분이 드는 것은 아마도 의도적으로 연출된 것 같았습니다. 2부의 이야기에서 '이'가 벤조를 만나고 겪는 소소하지만 기이한 경험들을 통해, 비로소 1부의 이야기까지 완성됩니다. 반대로 2부의 이야기 또한, 1부의 이야기가 있음으로 인해 완성될 수 있습니다. 실패한 시나리오가 아니었다면, 카메라를 선물 받지 않았다면, '이'는 여행을 떠나지 않았을 테니까요. 사실 2회차까지 관람한 지금도 1부의 내용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1부가 왜 영화의 절반 가까이에 해당하는 분량을 차지해야만 했는지, 왜 남자는 물고기를 잡으러 나갔는지, 물고기는 무엇을 상징하는지 정도는 어렴풋이 알 것 같았습니다.


언뜻 달라보이지만 사실 서로 바라보고 있는 두 개의 이야기



이제는 말에 쫓기고 있다. 나는 말이라는 틀에 갇혀 있다. 여행이란, 말에서 도망치려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주인공 '이'는 글을 쓰는 직업을 가지고 있습니다. 중간중간에 내뱉는 내레이션에도 나오듯, '말'에 붙잡혀 살아가는 사람이죠. 그런 그녀가 글을 쓸 수 없는 슬럼프에 빠집니다. 어쩌면 '잘 쓰고 싶다'는 욕구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어느 날 밤 문득 그녀는 창 밖을 지나가는 열차의 사진을 찍다, 말에게서 도망치기로 결심합니다. 세상을 '텍스트'로만 표현해 오던 사람이 '이미지'로 표현을 하기 시작한 순간에 말이지요.


여관 주인 벤조와의 비단잉어 도둑질이 끝난 후, 여관에 돌아와 '이'가 하는 말은 그래서 더 인상적입니다. '우리 둘이 어두운 설원을 걸어가는 장면을 부감으로 바라보면 어떨까요?'라며 묻는데요, 그동안 그저 잘 '쓰기만' 했던 '이'가 이미지 매체인 영화나 드라마에 맞는 글에 대해 깨닫는 순간입니다. 말에서 도망치기 위해 이미지를 쫓아 떠난 여행에서, 이미지 또한 언어의 한 종류라는 사실에 대해 알게 되는 것이지요. 말이라는 틀에 갇혀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 틀이 아주 넓어서, 갇혀 있다고 생각한 것은 어리석은 착각이었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마지막 씬, 홀로 남은 여관에서 '이'가 하얀 공책에 '글을 쓰는' 장면과 아무도 밟지 않은 눈밭을 걸어가는 '이미지'는 그렇기에 사실상 같은 의미인 셈입니다.






한편으로는 '오해'를 '이해'로 바꾸는 과정으로 보이기도 하는 영화였어요. 1부 이야기에서 폭우 속에 여자와 남자는 수영을 합니다. 여자의 물고기가 있다는 말에 남자는 물고기를 잡기 위해 더 깊은 바다로 들어갑니다. 여자가 다시 육지로 올라온 후에도 말이지요. 남자는 여자를 기쁘게 하고 싶어서 물고기를 잡으러 가지만, 영화의 마지막에 보이는 여자의 표정에서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듭니다. 여자는 그저 남자와 함께 있고 싶었던 걸지도 모릅니다.

여담으로 중간에 여자가 남자에게 '더 깊이(일본어 발음으로 '후카쿠'였던 것 같습니다)'라고 외치는데, '불찰', '실수'라는 뜻의 '후카쿠'와 발음이 같습니다. 일본어를 잘 모르지만 아마 여기에도 말장난을 통한 장치를 만들어놓은 것 같았어요.


'이'의 각본인 1부 이야기 내에서의 오해도 있지만, 아마도 '각본'과 '영화' 사이에서의 오해도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가 의도한 주제가 영화에서는 드러나지 않았거나,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었을지도 모르죠. 미완성으로 끝난 영화는 그녀가 새로운 글을 쓸 수 없게 만들어버립니다. '말=오해'의 틀에 갇힌 스스로를 구원하지 않는 이상은 말입니다. 2부 이야기인 설원의 여행, 소소한 에피소드 속에서 낯선 경험, 낯선 '이미지'를 겪고 나서야 비로소 그녀는 '이해'에 다다릅니다.


야밤에 '비단잉어'를 잡으러 가는 벤조의 모습은 1부 이야기의 남자가 물고기를 잡으로 바다를 헤엄쳐가는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호기롭게 잡아온 비단잉어는 얼어버렸고, 몇백만 엔짜리 호사스러운 안주가 되어버립니다.('물고기'를 뜻하는 일본어 '사카나さかな'에는 '술안주'라는 뜻도 있습니다!) '이'는 물고기는 구실이었을 뿐, 벤조는 그저 가족들을 한번 보고 싶었던 것이라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공교롭게도 이날 물고기를 훔친 대가로 카메라를 잃어버리는데요, 그럼에도 그녀는 '어두운 설원을 걸어가는 두 사람의 부감샷'을 상상할 수 있게 됩니다. 카메라는 다시 돌아오지만, 그녀는 더 이상 사진을 찍지 않습니다. 벤조의 비단잉어처럼, '이'에게 카메라는 구실이었을 뿐이니까요. 여관을 나서기 전 사진을 남기지 않고 그저 눈으로 천천히 담아가는 장면은 그녀가 '오해'를 '이해'로 치환하고, 동시에 '이미지'를 '글'로 치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일상을 여행하듯이 살아가는 것, 어쩌면 모두가 꿈꾸는 생활일 것입니다. 매일매일이 낯설고 새로운 것들로 가득하다면, 지루해지거나 무력해질 틈이 없을 것만 같아요. 그러나 우리는 어렴풋이 압니다. 여행이 일상이 되고 내가 '이방인'이 아니게 되면, 그건 더이상 여행이라고 부를 수 없다는 사실을요. [여행과 나날]이라는 제목에서 '여행'은 '이'가 쫓던 '이미지'에 대응되고, '나날'은 '글' 혹은 '말'에 대응됩니다. 영화는 짧은 여행을 통해 나날을 되찾은 사람의 이야기를 보여줌과 동시에, 여행은 나날을 잘 보살피게 할 구실이라는 사실을 전달합니다. 오랫동안 일본에서 일을 하며 살아가면서도 여전히 자신을 '이방인'이라 여겨오던 주인공 '이'의 나날이 조금씩 이해받기를 바라며, 글을 마칩니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는 불안, 슬럼프를 깊이 있게 풀어낸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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