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re I should head for
최근 루나 테라 사태를 지켜보며 잠자코 있던 생각들이 연이어 떠올랐다. 비트코인과 NFT에 대한 어설픈 개념만 알고 있었던 터라, 사실 이 새로운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에 대해 좀 더 깊숙히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요 며칠 많은 써칭을 했다. 써칭만으로 알기에는 이미 너무 커져버린 세계이기에 알아볼수록 더욱 흥미진진하다.
그간의 기술이 발전해온 흐름을 살펴보면, 대개 10년의 주기로 혁신적인 기술이 등장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초창기 기술들은 그 기술이 만들어진 10년 후에는 우리 삶의 깊은 곳까지 스며들어왔다. 컴퓨터, 윈도우 체제, 인터넷, 스마트폰, SNS 등등의 무수한 인터페이스와 기술, 플랫폼 발전들이 그러한 예다. 그래서 앞으로의 10년 후, 딱 2030년의 세상이 궁금해졌다. 사실 2040년까지의 세상을 통찰하기엔 나의 인사이트가 부족하다 여겨지고. 당장 도래할 8년 후, 10년 후의 세상이 어떠할지 조금이나마 짐작해본다.
물론 오픈씨(Opensea) 같은 NFT 마켓은 우리나라에서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여전히 먼 미래라 느껴지는 것들도 있지만, 코로나로 인해 우리는 자연스러운 변화를 겪어내며,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서기 위한 준비를 마쳤다는 느낌이 든다. 약 3년여의 시간 동안, 직장인들은 회사라는 물리적 환경에서 벗어나 그들이 머무는 어느 곳에서든 업무를 처리할 수 있게 되었고 학생들은 학교라는 공간적 특수성에서 벗어나 자신의 집, 도서관, 카페 등 어느 곳에서든 수업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코로나로 인한 인건비 활용의 어려움, 또는 접촉에 대한 거리낌으로 인해 비대면으로 처리할 수 있는 일들은 더 많이 생겨났고 어느새 우리가 말하는 메타버스, 가상현실을 접목시킬 수 있는 미래의 모습에 한 발 더 가까워지게 되었다.
내가 마흔 무렵이 되는 그 즈음의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그리고 그 세상에서 나는 어떤 모습일까?
요 며칠 내내 이런 화두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항상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한 개인의 성숙과 성장을 바라볼 때 가장 큰 행복과 감동, 그리고 삶에 대한 감사함을 느낀다. 그 누구보다도 그 순간은 행복하다고 자부한다. 그래서 이 일을 시작했고, 앞으로도 지속하고 싶은 마음에 내가 교직을 바탕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많은 고민을 한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나는 코로나 시국을 거쳐오며 학교라는 공간의 필요성에 대해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너무 오랜 기간 학교, 그리고 친구와 떨어져있다보니, 이 곳이 익숙치 않은 친구들은 학교를 떠나 자신의 세상을 찾아간다. 물론 많은 비율의 아이들이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여러 이유로 과거와는 다르게 많은 아이들이 학교를 떠나고 있다.
어쩌면 아이들은 더 빠르게 변화를 느꼈을지도 모른다.
진학과 진로가 최종 목표인 학교가 더 이상 자신에게 큰 의미가 없음을 말이다.
물론 사회성과 인격 도모를 위해 공동체 생활을 해보고, 그 속에서 자신을 발견해나가는 과정은 그 무엇보다 유의미하다. 하지만 변화하는 세상만큼 학교가 아이들에게 그 많은 것들을 잘 가르치고 있는가, 라고 묻는다면 나이스한 대답을 할 자신은 없다. 오히려 학교는 아이들에게 순종적이길 요구할뿐, 앞으로의 세상을 개척해나갈 힘을 주지 않고 있다.
그래서 문득 나에게 던진 질문도 이와 같았다.
나 역시 내가 궁극적으로 이루고자 하는 바가 꼭 이 학교라는 공간 안에서만 이룰 수 있는 것인가?
학교 밖이라고 다를 바는 없지만, 학교 안에서의 나는 여러 상황으로 인해 제약을 느꼈던 적도 있었기에 이런 질문이 마음 속에서 일어났다. 학교라는 특수한 공간 덕분에 누린 것들도 많아 감사함을 느끼지만, 내가 아이들과 함께 나눴으면 하는 메세지들이 과연 올바르게 전달되고 있었는지에 대해 스스로 질문을 던져본다면, 막연한 대답 밖에 남지 않는 듯 하다. 이것은 나의 잘못인지도 모르겠지만.
한 번은 아이들과 각자의 생에서 소중한 가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던 시간이 있다.
이 수업은 매년 갖는 시간이기도 한데, 생각보다 해가 거듭될 수록 돈이 중요하다고 답하는 학생들의 비중이 늘어난다. 물론 그러한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도 아니고, 아이들의 그런 생각에 담겨있는 근원적인 의미를 살펴보면 결국 자신의 가족을 위한 마음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실은 그 어떤 코멘트도 하기 어려울 때가 많았다.
자본주의 시대에서,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수단으로서의 돈의 중요성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 기본적인 수단이 갖춰져야 아마도 나의 삶에서 확장해 타인의 삶을 조금이라도 바라볼 여유가 생길테니까. 또, 이 문장 하나에 담을 수 없는 여러 케이스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잘 알고. 하지만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세상은 조금 다른 것들이었다. 좋은 학벌과 그로인한 멋진 직업, 그리고 뒤따라오는 부와는 좀 다른 세상을 보여주고 싶었다.
아이들이 말하는 것처럼
나와 나의 가족들이 잘 살기 위해 막대한 부를 쌓고 살아가는 것이 과연 우리에게 가장 큰 행복감을 주는 일인지, 그렇게 살 때 우리는 비로소 행복하다라고 말할 수 있을지, 결국 그러한 상황에서 느끼는 행복감은 내가 남보다 조금 더 낫다는 우월감에서 비롯된 행복감은 아닌가? 그렇게 우리만의 리그를 만들어 살아가는 것이 과연 나의 진정한 행복이고, 잘 살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사실 이 질문은 우리 아이들이 아닌, 세상의 보이지 않는 힘을 가진 이들에게 묻고 싶은 질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모두 같은 인간으로 태어나 유한한 삶을 살다 가는데, 누군가의 삶은 항상 일에 치여 고되고 힘들어야 하고, 또 다른 이는 그 사람의 희생 덕분에 온전한 하루를 보내는 것이 과연 정의로운 모습인가? 그 사람 또한 나와 다르지 않은 마음을 가진 사람인데, 우리는 같은 인간으로서 그런 사람들의 아픔에 눈을 뜰 수는 없는 것일까?
그렇다면 어떤 마음을 가져야할까?
그 사람의 인생도, 나의 인생도 모두 짓밟힐 이유는 없다는 것을 아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하지 않을까. 모두가 소중한 처음이자 마지막 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기에 말이다.
완전한 평등, 뭐 마르크스 같은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를 지향하자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우리가 한 “시대”를 함께 공유하는 타자들로서, 타인과 나의 삶을 함께 행복하게 가꿔나가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의 최종 지향점도 바로 그러한 마음이다. 나와 타자의 연대, 함께 성숙하고 성장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가고 싶다. 다만 어떠한 형태로 그 목표에 다가갈 것이냐는 여전한 고민이다. 그저 지금처럼 서로를 어떤 프레임 속에 가둔채 비난하고 나와 다르다고 구분짓기보다, 타인의 아픔에 연대하고 그 마음을 위할 길을 고민하는 것이 조금이라도 살만한 세상이겠다 싶다. 그래서 이런 목표에 다가서기 위해, 내가 머물러있는 공간이 학교여야만 하느냐고 내 자신에게 묻고 싶다. 머릿 속에 스치는 참 많은 생각들과 공상들이 있지만, 다 토해내기엔 아직 온전한 그림을 그려내진 못했다. 결국 이 시대의 흐름에서 필요한 것은 무시할 수 없는 자본의 힘이기에. 그래서 나도 실은 잘 모르겠다. 어떤 새로운 형태의 일을 도전해야할지, 아님 아예 창업을 할지. 다만, 타인의 아픔에 함께 연대하고 나아가는 사람이 되고 싶을 뿐이다. 이런 말도 안되는 의식의 흐름에 따라 쓴 글들이 결국 10년 뒤의 나를 만들어가고 있을테니, 틈틈이 포스트잇에 내가 시도해볼 수 있는 형태의 모든 일들을 나열해보아야겠다.
나는 어떤 형태로, 또 어떤 방식으로, 10년 후에 살아가고 있을까. 그리고, 당신은 어떤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