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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hilosophers needlework Jul 25. 2024

축제

- 딸이 집에 온다


 미국에서 생활하는 딸은 일 년에 한두 번 집에 온다. 한 달 남짓 일정으로 오는데 먹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 하고 싶은 것들을 시간 단위로 엑셀 파일에 저장해 엄마 아빠와 공유한다. 꼭 해야 할 것과 나중으로 미뤄둘 것과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는 항목을 색깔별로 구분한다. 자기가 챙겨야 할 물건들은 단톡방에 공지로 올린다. 명목은 까먹을까봐서이지만 실질은 다들 알아서 잘 하시겠지 하는 응석인 듯하다.      

 도착일이 다가오면 매일 택배 차가 들락거린다. 평소에 안 하던 반품과 교환도 하므로 배송 횟수가 더 늘어난다. 빼먹으면 곤란한 것들은 먼저 산다. 음식 중에는 미리 재료를 구해 만들어두어야 하는 것도 있다. 예를 들어 열무김치는 익힐 시간이 필요하니 도착 일주일 전에 담근다. 오이소박이는 갓 담근 신선한 것을 선호하므로 오면 만든다. 전날 먹다 남은 김치찌개와 찬밥이 먹고 싶다고 하므로 찌개를 끓이고 밥 해서 식힌 후 전날 먹다 남은 찬과 밥을 만든다. 공연과 전시 관람을 위해 미리 표를 사고 병원과 맛집을 예약한다. 예약이 안 되는 곳은 줄 서기 요령을 공부해 두어야 한다.      

 딸이 오면 잠깐의 축제가 벌어진다. 대파랑 오이가 억 소리 나게 비싸도 산다. 안 먹어도 안 죽는다며 잘 사지 않던 과일도 고민 없이 산다. 배 한 개, 애플망고 한 개, 사과 한 개, 감 한 바구니 이렇게라도 산다. 철이 지나거나 일러서 맛은 덜하고 값은 비싼 과일도 서슴없이 산다. 배와 사과는 국내산이 제일 맛있으니 산다고 쳐도 굳이 수입산 애플망고는 왜 사는지 모르겠다. 축제 때는 사람이 약간 돌기도 하니까 그런 것 같다.      

 나는 조용하게 산다. 의식주를 위한 최소한의 노력만 한다. 무엇을 크게 하고 싶은 것이 없으므로 마음의 동요가 적다. 뉴스를 보고 화를 내거나 안타까워해도 돌아서면 잊어버려서 마음도 편하다. 같은 음식을 반복해 먹어도 지루해하지 않고 잘 먹고 잘 잔다. 그렇게 내 일상은 평온하게 흘러간다. 하지만 딸이 집에 오는 날이 정해지면 엄청 바빠진다. 동면 상태에서 비로소 깨어난 느낌이다.     

 딸의 귀가로 나는 업데이트된다. 카톡 대문에 새로 올릴 프로필 사진이 생긴다. 못 보던 공연과 전시를 보고, 못 듣던 최신 음악을 듣는다. 젊은이들이 자주 쓰는 새로운 말을 익히고 유행하는 술을 맛본다. 딸의 눈을 통해 남편의 변화를 느낀다. 욕망하는 즐거움을 배운다. 딸이 돌아가면 나는 다시 동면의 세계로 들어가 다음 축제를 위한 에너지를 비축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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