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을 견디는 법

- 룰루 밀러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읽고

by philosophers needlework

나는 잠들기 전에 오디오북을 듣는다. 잠에 쉽게 들지 못할 때 잠시 듣던 것이 습관이 되었다. 이때 책을 고르는 일에 매우 신중해야 한다. 너무 재밌는 책은 절대 금물이다. 추리소설처럼 스토리를 열심히 따라가야 하는 책도 안 된다. 그렇다고 재미가 없어도 곤란하다. 듣다가 잠이 들어도 나중에 어느 부분부터 다시 들어야 하는지 되짚을 필요가 없는 책들이 좋다.

나는 지식과 정보 책들을 주로 듣는다. 예를 들어 와인의 역사나 커피의 기원 때로는 역사를 이야기처럼 다룬 책들 같이 혹시 놓쳐도 어느 곳에서든 다시 들으면 되는 그런 종류를 선호한다. 이때 만난 책이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였다. 소설이 아닌 것 같아서 듣다 말다 해도 괜찮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 책을 들었던 밤 나는 잠에 들지 못했다.

이 책의 저자 룰루 밀러가 데이비드 스타 조던을 처음 만난 것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찾아온 혼란에 흔들리고 있을 때였다. 사랑의 실패로 삶의 의미를 잃고 우주의 무관심 앞에서 무너져 내리던 그녀는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으로 평생의 연구 성과가 산산조각 났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선 한 과학자의 이야기에 매료되었다. 깨진 병 속에서 물고기 표본을 하나하나 건져 올려 다시 분류하고 이름을 붙여나간 그 집념 속에서 밀러는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는 행위가 가진 힘을 발견했다.

룰루 밀러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란 인물이 자기 자신을 찾는 데 꼭 필요한 해답을 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었다. 그녀가 데이비드에게서 찾고자 했던 것은 명확했다. 세상이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 어떻게 계속 살아갈 수 있을까. 자연에 질서를 부여하고, 수천 종의 물고기에 이름을 지어주고, 분류 체계를 만들어가는 데이비드의 집착은 밀러 자신의 정체성 혼란에 대한 답처럼 보였다. 이름을 짓는다는 것, 분류한다는 것, 질서를 만든다는 것, 그것은 곧 의미를 창조하는 행위였다. 하지만 그녀가 데이비드에 대해 깊이 파고들수록 거울에 비친 이미지 뒤에 무엇인가가 있음을 감지했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위대한 과학자였다. 수천 종의 새로운 물고기를 발견하고 명명했으며, 스탠퍼드 대학의 초대 총장으로서 미국 교육사에 큰 발자국을 남겼다. 대지진 이후 폐허 속에서 다시 시작하는 그의 모습은 인간 정신의 불굴로 혼돈에 맞서 질서를 세우고 무의미에 맞서 의미를 창조하는 영웅처럼 보였다.

그는 우생학의 열렬한 지지자이기도 하였다. “열등한” 인간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강제 불임 수술을 옹호했으며 실제로 그러한 정책이 실행되도록 영향력을 행사했다. 자연에 질서를 부여하고자 했던 그 집착이 인간 사회에 적용되었을 때는 끔찍한 폭력으로 변했다. 물고기를 분류하던 그 손으로 어떤 인간은 보존할 가치가 있고 또 다른 인간은 제거해야 한다고 생명을 구분했다.

공과 과 이 두 단어로 데이비드를 평가하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왜냐하면 그의 업적과 과오는 같은 뿌리에서 자라났기 때문이다. 질서에 대한 집착, 분류에 대한 열정, 혼돈을 견디지 못하는 마음 이것이 위대한 발견으로도 끔찍한 범죄로도 이어졌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뫼비우스의 띠 같은 인물로 한쪽 면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반대편 면에 서 있게 되는 안과 밖의 구분이 사라지는 그런 존재였다.

마침내 밀러는 충격적인 사실을 발견한다. ‘물고기’는 생물학적으로 유의미한 분류가 아니라는 것. 우리가 ‘물고기’라고 부르는 것들은 진화적으로 서로 더 먼 관계에 있다. 어떤 물고기는 인간과 더 가까운 친척이고, 어떤 물고기는 전혀 다른 계통이다. 데이비드가 평생을 바쳐 분류하고 이름 붙인 그 질서는 사실 자연에 처음부터 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이 편의를 위해 만든 허구였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깨달음은 단순히 생물학적 사실을 넘어선다. 그것은 우리가 세상에 부여하는 모든 질서, 모든 분류, 모든 이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다. “___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빈칸에는 무엇이든 들어갈 수 있다.

“정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 데이비드가 "열등"하다고 분류한 사람들

“영웅은 존재하지 않는다”- 공과 과가 뒤섞인 인간의 복잡성

“의미는 존재하지 않는다” - 밀러가 찾고자 했던 우주적 질서

“질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 혼돈을 견디지 못해 만들어낸 허구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 절대적 지식에 대한 오만

“선과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 이분법적 판단의 한계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 고정된 정체성에 대한 환상

밀러는 데이비드에게서 답을 찾으려 했다가 결국 정반대의 교훈을 얻었다. 질서를 강제로 부여하려는 시도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혼돈을 견디지 못하고 모든 것을 분류하고 통제하려는 욕망이 어떤 폭력으로 이어지는지를 깨달았다.

우주에서 의미있는 것이 없다면,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밀러가 내린 결론은 놀랍도록 단순하다. 혼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세상에 질서를 강요하는 대신, 질서가 없음을 인정하는 것. 모든 것을 분류하고 이름 붙이는 대신, 분류될 수 없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물속에서 헤엄치는 수많은 생명들은 존재한다. 그들은 우리가 만든 범주에 갇히지 않고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고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 살아간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생명의 본질이다. 우리는 모두 존재하지 않는 물고기다. 누군가가 만든 분류 체계 속에 억지로 끼워 맞춰진, 실은 전혀 다른 존재들이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비로소 우리는 범주 밖으로, 질서 너머로, 혼돈 속으로 헤엄칠 수 있다.

이 책은 자기계발서처럼 시작해서 과학 에세이처럼 진행되다가 범죄 스릴러로 변했다가 결국 철학서로 끝난다. 이미 있는 기준에 맞추어 분류 불가능한 책, 그것이 이 책의 메시지를 잘 보여준다. 룰루 밀러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을 연구하며 자기 자신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녀가 발견한 자신은 고정된 정체성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분류를 거부하는 흐름이었다. 거울을 보러 갔다가 거울이 깨지는 것을 목격한 셈이다. 그리고 그 깨진 조각들 속에서 더 많은 진실을 보았다.


내가 물고기를 포기했을 때 나는, 마침내, 내가 줄곧 찾고 있던 것을 얻었다. 하나의 주문과 하나의 속임수, 바로 희망에 대한 처방이다. 나는 좋은 것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약속을 얻었다. 내가 그 좋은 것들을 누릴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다. 내가 얻으려 노력했기 때문이 아니다. 파괴와 상실과 마찬가지로 좋은 것들 역시 혼돈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죽음의 이면인 삶. 부패의 이면인 성장.

그 좋은 것들, 그 선물들, 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황량함을 노려보게 해주고, 그것을 더 명료히 보게 해준 요령을 절대 놓치지 않을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는 사실을, 매 순간, 인정하는 것이다. 산사태처럼 닥쳐오는 혼돈 속에서 모든 대상을 호기심과 의심으로 검토하는 것이다.

이 폭풍우는 짜증스럽기만 한 일일까? 어쩌면 그것은 거리를 혼자 차지할 수 있는 기회, 온몸을 빗물에 적셔볼 기회, 다시 시작할 기회일 수도 있다. 263,264쪽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룰루 밀러 글, 정지인 옮김, 곰출판 펴냄, 2021

매거진의 이전글허난설헌, 이름, 피카소